상업성은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종종 예술과 상품의 경계에서 갈등담론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상업성의 순기능 중 하나로서 그 작품의 시대성과 개인의 기억이 그 행보를 함께 하게 해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위에 언급한 예술-상업 담론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부분은 새로운 의미로 정의되곤 한다. 최근 몇년 간 각종 예능프로를 통해 90년대 음악적으로 홀대받았던 대중상품들이 추억의 매개로서 각광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됐다. 전부터 하던 생각이지만 문화의 위대한 점은 상품성이란 기준에 맞춰 시대를 불가피하게 반영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본다. 작가의 창의력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편차가 존재하지만 그 기반에는 최소한의 시대적 요구가 존재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대상을 통해 작가의 주제를 전달받기도 하지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순간의 풍경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고히 간직하게 된다. 만일 현 시점에서 극장에 걸려있는 '우리들'이란 영화를 보게 된다면 20여 년 후 우리의 기억속에 이 영화는 20대 혹은 30대의 시선에서 어린시절의 미묘한 감정을 뒤늦게 포착했던 자신의 감정의 진폭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인생여정 속 2016이란 카테고리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The era of cinema'는 기억의 매개로서 문화가 자리하는 위치를 분명히 해주는 작품이다. 21미터 설치비디오로를 통해 개인의 시점과 기억의 순간을 잇고있다. 영화를 본 후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극장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돈을 내고 이야기와 음악을 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시간때우기의 일부로 의례적으로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 기억이 갖는 가치는 함부로 예상할 수도 예단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인디스 월드'를 본 후 광화문에서 잠실까지 돌아오던 그 길의 풍경과 날씨가 선명히 기억난다. 난 이 영화를 본 후 인권에 대한 사고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마이클 윈터바텀이 주목했던 시대적 이슈가 내게 어떠한 큰 영향을 줬는지는 분명히 설명하긴 힘들다. 그럼에도 난 2005년의 그 어떤 순간의 감정도 명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극장을 나서던 때의 심정만은 또렸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게 이 영화는 소중하게 남아있다. 이것은 내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 동시 향후 내가 인생을 살아갈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작게나마 힌트를 주고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의 단서가 20대 초반의 나에게 던져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추억거리를 선택할 수 없다. 무엇이 어떠한 의미로서 먼 훗날의 내게 메시지를 던져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재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서다. 모두에게 추천한다는 표현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모든 사람이 봤으면 한다. 무작위의 예비된 추억거리들은 음악의 형태를 가졌을 때 그 파급력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BGM 이란 표현과 같이 무엇인가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문화는 많지가 않다. 이것은 존중의 위협인 동시 어마어마한 영향력의 상징일 것이다. 음악은 인생의 특정 시점을 장식해주는 통과의례가 되기도 한다. 음악은 그 장소를 특정하는 기억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음악은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생각들을 포장해 놓은 사물이 될 수도 있다. 2014년에 제작된 '이 노래를 기억하세요? Alive inside' 는 예술/문화가 가진 시간적 지표로서의 굳건함. 그 축복과 같은 기억의 매개로서의 사명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다시한번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모든 사람들이 봤으면 한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 있어 국가와 개인의 도리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선에서 절차가 진행되듯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가끔 외롭고 소외된 누군가를 위해 작은 아이디어를 행복하게 실현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하곤한다. 이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 정말 창의적이고 고마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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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규정함에 있어 막연한 답답함에 멍해져 버리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블랙 코미디/블랙 유머' 등의 개념을 스스로 확정지으려 할 때 종종 나타나곤 한다. 아르헨티나 영화 <Wild Tales>는 본연의 성과나 그 가치를 떠나, 흐릿했던 개념으로 인해 항상 신경쓰이던 손 끝 가시같은 체증을 시원하게 날려준 고마운 작품이다. 옴니버스 형식이기에 다양한 상황들을 나열하곤 있지만 극의 톤이나 표현방식은 일관된 측면이 있기에 2시간의 제약 내에서 블랙 코미디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허나 쓰디쓴 희극의 특정한 표정만은 원없이 전시하며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할 블랙 코미디 특유의 피곤한 즐거움을 충실히 제공하고 있으니 희극의 다양한 모습이 궁금한 사람들은 기회가 된다면 꼭 봤으면 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주 간단한 농담이라도 그 근원에는 두려움의 가시가 감춰져 있다. 예를 들어 "새똥 속에 든 흰 것이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면 방청객들은 그 순간 학교에서 시험이라도 보는양 바보 같은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것도 새똥이죠" 라는 답을 들으면 반사적인 두려움은 웃음으로 바뀐다. 그건 결국 시험이 아니었던 게다.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다. "소방관들은 왜 빨간 멜빵을 맬까요?" "조지 워싱턴은 왜 산비탈에 묻혔을까요?"


실제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 농담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블랙유머라 불렀다. 살다보면 삶은 때때로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위안을 생각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 부딪치기도 한다. 드레스덴 위로 폭탄이 쏟아질 때 우리는 지하실 천장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마치 대저택에 앉아 비 내리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는 공작부인처럼 "이런 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아무도 웃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그의 말은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 그의 말 덕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총알이 빠른 속도로 옆사람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어느 부위에 맞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하며 이리 저리 몸을 돌려본다. 그 우스운 모습에 살며시 조소가 흐른다. 자기 뒷통수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총알도 못보고 말이다. 그래도 남자는 앞사람 보다 몇 초 정도 더 행복했으니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닐 수도. <Wild Tales>와 커트 보네거트의 문장을 접한 후 막연히 떠오른 블랙 코미디의 이미지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님을 안다. 허나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우리가 건내받은 피곤한 웃음의 씨앗의 핵심은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언제 어디에서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불안한 가정에 있다. 멀리 떨어진 것이라 존재 조차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은 내가 사는 이 땅 어디선가 나 혹은 당신의 발밑에 심어져 있다는 확률이며 종종 남들이 나를 그 씨앗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황당한 순간도 '0' 이 아닌 확률로서 세상에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 자체에선 생각할 거리가 많지 않은 영화였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고민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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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접하게 된 서사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케네디가 마주했던 1962년 가을에 관한 기록이었다. 2000년에 제작된 <Thirteen Days> 를 본 후 나와 같은 생각이 든 사람이 있다면 제프리 D. 삭스가 쓴 <존 F. 케네디의 위대한 협상>을 꼭 읽어 봤으면 한다. 냉전의 시대, 그들의 갈등과 오해가 초래한 세상의 위태로운 나날들은 서사 창작의 뜻이 있는 이들에게 아찔한 자극이 될 것 같다. 영화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한 영감이 되겠지만 책을 통해 사건 전후의 양 진영간 대립구도와 서로의 생각들을 천천히 접하고나면 당대의 긴장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조 단테는 93년 작 <마티니>를 통해 쿠바 미사일 위기의 공포를 B 무비와 섞어 괴상한 독창성을 선보인바 있다. 만일 기회가 된다면 여기까지 관심이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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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 DVD 서플먼트 (구로사와 기요시, 관객과의 대화 中)


영화를 보기 위해선 당연히 빛이 필요합니다. 빛이 있으면 반대쪽에 어둠이 생깁니다. 이것이 영화의 원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어둠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스크린이 전부 어둡다면 그곳에 단지 스크린의 천 조각이 보여지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텔레비전의 경우 검은 화면이라는 것은 그저 브라운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란 단순히, 제 뒤에도 있는 하얀 천 조각에 투영된 빛의 알갱이에 불과합니다. 존재나 세계같은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닌 단순한 빛의 반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영화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요소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보여지지않는 것이 소리로서 확실한 존재를 들어내는 영화의 표현은 자주볼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바람같은 것입니다. 바람은 절대로 보이지 않지만 소리로서 바람을 표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닫혀있는 문의 반대편은 어떨까요. 거기서 작은 소리가 들리거나 뚜벅뚜벅하며 발소리가 들린다면 관객은 문 저편의 세계를 눈치 채고 무언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죠. 긴장감을 느끼거나 공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어둠이 스크린을 지배하여 화면이 까맣게 되어도 소리의 힘을 잘 이용한다면 이것은 스크린에 보여지는 것이 아닌 진짜 어둠이라고 느끼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소리를 가지게 된 거죠 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에 대한 것은 이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강령> DVD 에 수록된 관객과의 대화 내용 중 '소리'에 대한 이야기 일부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강령, 로프트를 하나로 묶어 놓은 트리뷰트 영상을 올려 본다. 이 사람의 영화는 우습지가 않아서 좋다. 호러 장르물을 보며 그 세계관의 정서에 설득 당한 기억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장면을 꾸미는 감독의 기지에 흥미를 느낄 뿐 온전히 그 속에 젖어들었던 적은 없었다. 일반적인 호러물들은 장르색을 짖게 띄는 특정 표현방식들을 순차적으로 잇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여백들을 고민없이 방치해두는 경향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어떤 장르보다 홀로 완결성을 성취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식의 무책임함은 항상 절반의 만족감만을 줬던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을 챙겨보는 과정에서 스산한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아쉬움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극복해낸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랄까나. 무엇인가 내 몸을 힘껏 움켜쥐는 듯한 긴장감에 영화 속 모든 시간들에 정신을 빼앗긴듯 하다. 일상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소재를 다루는 순간에도 누구나 지니고 있을 현대인의 어두운 속내와 가장 일상적인 시야를 배치하며 내 세상의 밖이 아닌 관객의 안으로 안으로 이야기를 밀어넣게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소재, 주제, 배경이 촉발한 우리의 감정들은 어쩜이리도 온순하게 감독의 질문에 귀기울이는 걸까. 이야기는 궁금하고 메시지는 서늘하다. 지독히도 평범한 공간들은 불안하다. 작품들을 몇 번 더 보며 고민해볼 문제겠지만 아마 어쩌면 그가 사용하는 소리가 불러일으킨 최면이 아니었을까. '음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거장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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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을 지나 곧장 죽음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든 십대 소년과 썩지 않을 영혼의 젊음으로 그저 육신만을 노화시켜온 70대 소녀의 만남. 할 애쉬비 감독의 71년 작 <해롤드와 모드>는 어찌보면 단순해 보일 수도 있는 극단적 상황세팅과 캐릭터성을 고수하면서도 희귀한 활기의 러브스토리를 자연스레 꽃피워 낸 작품이다. 절망에 다다라 죽음을 쫓던 소년은 설명가능한 세상의 모든 이치로 부터 도망다니며 존재도 모를 이의 장례식을 전전하던 중 스스로 동화 속 세계에 몸을 던진 그녀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제자리 걸음 같았던 그의 청년기는 성큼 성큼 그녀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며 행복한 스텝을 밟게된다.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살짝쿵 빗겨나있는 소년이 겪게 될 마법같은 계절의 성장기 정도로 한정하기엔 <해롤드와 모드>가 품에 안은 아름다움이 안쓰럽다. 반세기 가량 벌어진 그들의 물리적 나이는 분명 극적인 소스로서 작품의 메시지에 풍미를 더해주긴 하지만 이것은 상반된 연령대의 캐릭터들이 서로의 결핍과 무지를 일방적인 교훈의 형태로서 위안하기 위해 설치된 도구는 아니다. 앞서가던 이가 손을 내밀어 동동구르던 소년의 발짓을 한 걸음 한 걸음 양지로 이끌어내는 그저 그런 교훈극이 아니란 말이다. 세상은 이해못할 각자의 신념으로 소박한 행복을 상상하던 두 인물이 기막힌 우연으로 같은 길에 들어선, 무척이나 로맨틱하고 꿈결같은 데이트 무비다. 서사의 틀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영화는 결국 특정 시대를 살던 어느 지구인의 소망 혹은 일탈이다. 가벼운 유머코드를 섞어 해롤드와 모드가 살던 시대의 정치-사상적 기운의 엄숙함을 슬쩍 들어내는 부분이 있다. 영화는 그러한 해학을 기반으로 꿈꿔진 러브스토리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 모든 이야기를 이쁘게 포장해준 해방같은 노랫말들. <해롤드와 모드> 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두 발을 붙이곤 폴짝 폴짝 귀엽게 뛰어오르는 상상이다. 그 뜀박질은 시대를 조금 앞선 것으로 보인다. 미학적 성숙이나 표현의 도발성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할 애쉬비의 이 사랑스런 영화는 만고불멸의 뻔한 인간적 도리인 관계의 본질적 순수성, 그 행복함의 어마어마한 무게에 대해 미소지으며 물어보고 있다. 40여년 전에 던진 질문에 대해 아직도 우린 망설이고 꿈꾸고만 있으니, 그의 상상은 언제나 앞서있을 것이다. '뭐야 이거 철부지의 유치한 징징거림일 뿐이잖아. 하여간 현실 모르고 뜬구름만 잡는 한심한 놈이구만.' 예상 가능한 꾸짖음에 홀로 조용히 생각한다. 아 오늘도 밤거리를 산책할 때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이나 나왔으면 좋겠다. 어제 디제이가 해준 이야기 덕에 하루가 참 신났었는데... 예술의 대면에 있어 극단적인 구획나눔은 여러모로 소모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생의 수 만큼이나 그들 각자의 걸작이 존재한다. 그 어떤 형태의 형식이건 그것이 꼭 예술로 인정받지 못할 지라도 말이다. 난 그냥 그렇게 살란다. 해롤드와 모드 처럼. 뻔하디 뻔했지만 결코 미워할순 없었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면 '정수'란 표현이 나온다. 이 영화는 내게 순수의 최소치를 지탱해줄 관계에 관한 고마운 '정수'가 될 것 같다.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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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열을 따져 무엇하겠냐만은 스릴러 장르를 받아들임에 있어 화려하게 치장된 시각적 설득과 정성껏 지어진 이야기의 몰입 중 후자의 시도가 훨씬 정교하고 독창적인 재능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 편이다. 비단 스릴러 장르 뿐 아니라, 영화가 산업 오락물의 상징으로 올라선 이후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얇게 잘라진 컷들의 숨가쁜 조화와 시청각적 도구의 홍수로서 지탱해온 집중의 과정 속에는 끔찍하리만큼 큰 격차의 완성도의 틈이 존재하기에, 왠지모를 권태와 편견이 생겨버린것 같다.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형식의 독창성으로서 이야기를 살찌어온 소수의 선구자들에게 민폐를 끼치고있는 나태한 창작자들의 안일한 러닝타임 메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야기와 대사의 흐름만을 내세우며 관객들과 정면으로 맞서려는 용기있는 예술가들의 기특한 반가움에 애정이 갈 수 밖에 없는것 같다. 


극작가로 더 유명했던 데이빗 마멧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 <위험한 도박 (House of games)> 은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힘든 매끄한 스토리라인의 몸체와 적재적소에 단단하고 부드럽게 자리잡은 대사의 살결로 이뤄진, 흡사 아름다운 나체의 순수한 경외감을 연상시키는 완전한 작품이다. 거기에 조 만테나의 철저하게 영화적인 눈빛과 음성까지 추가하며 꿈틀대는 생명감을 부여하였다. 내게있어, 전 문단에서 언급한 기특한 반가움의 상징이 바로 이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둑한 배경속에 그려낸 밤거리의 윤곽과 종종 홀현히 피어났다 금새 아름답게 흩어지는 연기의 이미지 정도가 느와르풍에 기반한 시각적 지원을 해내곤 있지만 <위험한 도박>의 뼈와 심장은 온통 이야기에 대한 경험, 그리고 관객마저 속여먹으려는 듯한 매력적인 대사의 중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인생의 권태를 맞이한 어느 성공한 여성의 충동적인 일탈을 사기꾼들의 은밀한 일상속으로 대입시켜 한편의 근사한 성장-범죄 드라마를 완성시키고 있다. 25년이란 세월의 무게가 작품의 외면 곳곳에 상투적인 생채기를 내긴 했지만, 어느 범죄 드라마에 맞서서도 뒤쳐지지 않을 오리지널리티와 대사의 저력을 간직한 작품이라 믿고 있다. 흔히들하는 실수 중에 반짝거리는 단문의 아이디어에 집착해 작품 전체의 균형엔 큰 관심을 쏟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컨셉과 트위스팅에 함몰되어 특정한 씨퀀스만을 위해 이야기의 완결성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위험한 도박>은 고른 균형감으로서 모든 장면들이 서로를 지원하며 상향 평준화를 지향한다. 언뜻 보기엔 큰 욕심은 보이지 않지만, 영화 속 대사와 점잖은 연출의 모든 조각들을 모아보면 작가출신 연출가의 거대한 야망의 퍼즐이 맞춰질 것이다. 근사한 영화를 마주하고 싶은 관객들이라면 <위험한 도박>을 꼭 보길 바란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며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읽어내리는 경험이 아니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대화이며, 짜릿한 심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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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그 존재의 이유를 필름위에 담아오신 존 워터스 감독의 94년작 <시리얼맘>이다. 아직 그의 작품을 모두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시리얼 맘>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정상적인 공식과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춘 영화란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성적이거나 과도하게 역겨운 이미지는 배제했으며 무엇보다 이 영화는 뚜렷한 스토리 라인은 가진것 같으니 말이다. 기본적 설정은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우리의 어머니가 무차별적인 연쇄살인마 라면... 이란 가정에서 시작된다. 다양한 흉기를 사용해서 시도때도 없이 사람을 죽여대지만, 이 영화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토록 끔찍한 내용을 이렇게 화사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위에 풀어놓으니 그 역설적인 감성이 심히 매력적이라 할 수 있겠다. 


캐슬린 터너, 그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지닌 귀여운 광기를 역동적인 방법으로 잘 풀어낸것 같다. 그녀는 Serial Mom 그러니깐 영화 자체라 할 수 있는 인물로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적절히 조절해내는 탁월한 연기를 해낸다. 상당히 설득력있고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얼마전 존 워터스 감독의 <Dirty Shame>을  봤었는데 그의 작품속에서 살아가는 아줌마들은 하나같이 묘한 구석이 있는것 같다. 시리얼 맘의 감성에 매료된 후 90년대 이 후 그가 찍어낸 작품들, <Cry Baby> < Cecil B. Demented> <Dirty Shame>을 시간나는 데로 봐왔는데 이토록 훌륭하고 맛깔난 쓰레기라면 난 주저없이 휴지통 속에 머리를 쳐박고 싶다. 


마지막으로...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미 중산층의 오묘한 이중적 이미지는 환상적인 이야기거리인것 같다. 경제적 계층구분을 없애고 가족이란 집단만 생각해봐도 참 매력적이다. 알다가도 모를, 멀고도 가까운 허나 끊기는 어려운 그들의 사정과 비밀이라니... 확실히 좋은 요리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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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The Cove에 관한 몇가지 기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작품은 일본의 타이지 지역에서 행해지는 돌고래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로서 얼마전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작품이에요. 외국의 각종 영화 싸이트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있으며 국내에서도 개봉 한달이 되가는 현 시점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고 있기도 하죠(소수이지만요). 그리고  제목인 더 코브는 '만'이라는 뜻이에요. 바다가 육지 쪽으로 파고 들어온 지형을 뜻하는 것으로서 본 작품의 주된 무대가 되는 일본의 타이지만을 의미해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단순히 작품 속에서 전달하는 야만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의 진실 때문만은 아니였어요.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긍정적 변화의 기운을 처음으로 느꼇거든요. 행동하는 이들의 열정과 엔딩부의 참혹한 현장을 두 손 놓고 멍하게 지켜보고만 있자니 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온 몸을 휘감더군요.    

 

이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영화에 언급된 내용들을 하나 하나 열거해가며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이 작품이 지닌 순수한 열정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초래할것 같아서 피하고 싶네요. 90분의 시간과 8,000원의 티켓값이 의미없이 소모될리 없는 작품이기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과 불편함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거에요. 저역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극장을 찾았던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은 전달방식의 불편함을... 래리 찰스의 <신은 없다> 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과연 다큐멘터리가 순수한 장르인가라는 의구심을 품은적이 있어요. 하지만 <더 코브>는 고리타분한 설명조의 작품도 아니고 단순히 편파적인 위치에서 불편한 선동을 하는 작품도 아니에요.


다큐멘터리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극영화를 넘어서는 극적 순간들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는 못하겠어요. 하지만 여느 극 영화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지루함없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능력은 분명히 있어요. 누구나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실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새로운 경험이 될거에요. 무엇보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운동에 참여할 기회도 생길 수 있고요.  

 

작품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이야기 해보자면, 얼마전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킨 <맨 온 와이어> 의 팽팽함과 마이클 윈터바탐의 다큐에 가까웠던 극 영화 <인 디스 월드> 의 먹먹함이 동반된듯 해요.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던  마이클 무어나 모건 스퍼록의 재치있는 연출과는 많이 달라요. 농담을 던지기에 너무나 가슴아픈 현실이니까요.

 

내포된 열정이나 메시지의 순수함도 맘에 들지만, 이를 극대화하는 현명한 연출방식도 참 마음에 들었어요. 다큐멘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돌고래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이에 반하는 집단과의 갈등. 이 두가지의 명확한 흐름을 견지하며 다큐멘터리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가는 진행은 엔딩부의 참혹한 현실을 극대화 시켜주며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을 가지게끔 해주는것 같았어요.

 

얼마전 이 작품을 관람한 국내 관객수가 1,000 명을 넘겼다고 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어요. 극장을 나서며 제가 무엇을 할 수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영화속 주인공들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실천 했듯이 말이죠. 제가 할 수 있는건 그냥 이 영화의 존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영화를 보는게 유일한 취미에요. 하지만 상대방에게 극장에서 특정 작품을  관람하라는 말은 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영화들이 있고, 이를 감상하는 더 복잡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깐...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을거라는 생각은 쉽게 하지 않아요. 하지만 <더 코브>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꼭 보세요. 이 영화.  

 

먹먹한 가슴으로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것 같았고, 추운날씨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코도 계속 훌쩍거리게 되더군요. 그래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힘차게 물결을 가르는 돌고래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금방 행복해 지더군요. 돌고래는 생각만 해도 기분좋은 동물이니깐요.



Posted by Alan-Shore :


한.중.일 삼국의 감독들이 각각 한편씩 연출을 맡았던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2004에서 '봉준호'감독님이 한국대표로 연출하셨던 30분 가량의 단편영화이다.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화면들을 우리사회 곳곳에 설치된 'CCTV'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모습을 띈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공공장소나 개인 가정집, 그 어느 곳에서 'CCTV'를 접하더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요즘, 이곳 저곳에 설치된 CCTV에 담긴 특정 '개인'의 모습만을 따로 한곳에 모아본다면, 그것이 바로 그 '개인'의 연대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영화이다. 


CCTV의 특성상 한 장면을 무조건 한 테이크로 가야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연대기적 흐름으로 구성된 10테이크 가량의 인생'축약집'이라 볼 수있다. 2001년 고속도로 회로 카메라에 찍힌 31살의 백수 '조혁래'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HARD WORK. 열심히 일을 해보려는 백수 '조혁래'의 모습과... 좌절을 비춰준다. 그 후 조혁래가 걸인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초반에 보여주며  앞으로 차차 늘어갈 '폭력'의 전염성을 암시하는 장면들을 곳곳에 숨겨놓고 있다. 

   

장시간의 테이크로 이루어진 '조혁래'의 인생속에서 언제나 그를 둘러싼 주변부에는 '폭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주위를 멤돌던 폭력과 범죄의 칼자루는 인생막장에 다다른 그에게 넘어가게 되고, [인플루에자]라는 제목처럼 그 폭력성은 마치 전염되듯이 빠른 속도로 '점점 잔인하게' 변해간다. 그가 저지르는 첫번째 범죄의 모습은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여주는듯 우스꽝 스러운 '행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 수록 그가 범하는 폭력성은 겉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게 되고, 수법은 점점 잔인하게 변해간다. 관객들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지켜보던 인간 '조혁래'의 인생이 차차 피빛으로 이글어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들은 단지 'CCTV'의 눈을 통해서, 그 과정들을 '조용히' 지켜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봉감독이 선택한 'CCTV'라는 매체는 더욱 빛을 발한다. 언제나 한결같이 어딘가를 무미건조하게 '촬영'중인 카메라의 모습은 차갑고 냉정하며, 심지어 서운하다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게 비춰진다. 작품의 섬뜩함을 배가 시켜주는 요소라 할 수있겠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감시 카메라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이 작품은 '폭력'의 전염성과 진화의 과정들을 적절한 매체속에 담아낸 섬뜩하고, 기발한 작품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 하고 후반부로 갈 수록 지나치게 극적으로 변해가는 '장면'들은 페이크 다큐로서의 매력을 감하시키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윤제문씨와 고수희씨의 서늘한 연기가  '섬찟한' 매력으로 다가온 작품 이였다. 봉준호표 영화답게, 한없이 어두우면서도 순간 순간 씁쓸한 '웃음'이 공존하고 있는 작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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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on a summer's day (1959)

2014. 1. 16. 14:14 from Cinema/Mine




Jazz on a summer's day 는 1958년에 열린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전경을 담아놓은 다큐필름이다. 앞문장에 쓰인 '전경'과 '다큐 필름'의 순수한 의미에 이보다 근접한 작품이 또 존재하려나. 지역의 풍경과 그 곳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근사한 추억이 펼쳐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가 전해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작자나 전수자의 첨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의미로서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본 작품의 가치로도 연결되는데, '재즈'라는 주제적 흐름 마저 눌러버리며 시대상의 생생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담아내는데 노력하고 있다. 카메라의 포커스 역시 무대와 관중을 양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와같은 선택을 했다는건 이래저래 놀라운 사실이다. 50년대 후반의 미국의 풍경. 그러니깐 <백 투더 퓨처>에서 마티 맥플라이가 뛰어든 시대로 부터 고작 3년여가 흐른 시점이다. 난 당시의 이미지에 큰 동경을 느끼는 편이다. 물론 60년대 이전 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다양한 종의 기록물에서 읽을 수 있는 모호한 단정함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류의 흥분을 느낀다. 반세기 가량의 세월의 텀에서 큰 흥미를 느낀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락영화인 <백 투더 퓨처>에 가장 근접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쳐다보고 있자니 재즈고 나발이고, 그들의 패션과 표정 하나 하나에 탄성이 터져나온다. 50년대를 기록하는 필름의 색상 역시 환상적이니, 더이상 무슨 형언이 필요하겠나. 거칠게 갈아놓은 듯한 색상의 따스함들.

 

 영화는 낮을 기록하는 소소한 전반부와 밤을 수놓는 후반부의 화려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루이 암스트통 역시 어둠이 깔린 페스티벌의 절정기에 위치해 있다. 난 그럼에도 전반부에 펼쳐지는 카메라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밤이 찾아오고 재즈계의 큰 스타들이 스며드니 카메라는 (기술적, 대중도의 차이로인해) 자연스레 무대에 고정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난 이 작품의 참맛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색에 관한 관찰이라고 생각하기에 찬란한 햇살 아래 개성있는 조연을 자처한 객석의 생동감이 가득한 그들의 낮이 더 좋다. 코나의 노래를 인용하자면, 객석의 낮은 무대의 밤보다 아름답다. 라고나 할까. 영화가 끝나면 페스티벌을 떠나보내는 어느 일군을 포착하며 하나하나 스탭롤을 올려 보인다. 작품에 대한 편견이 부른 착각일까. 카메라 감독, 음향, 조명, 음악 ... 각종 스택들의 이름은 보았지만 감독의 이름을 읽지 못한것 같다. 뭐 착각이라도 좋다. 이렇게 객관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다큐를 감상한 후 그런 착각을 했다는건 꽤 괜찮은 일이니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굉장한 혼란을 느낄때가 있다. 현실과 진실에 포커스를 맞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시선을 필터링 한 후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케이스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정작 그 작품을 통해 해당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입장에선 훅 맥이 풀려버릴만한 일이다. 송일곤이 만든 시간의 다큐와 <Jazz on a summer's day>가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건 이런 이유에서 일거다.


백 투더 퓨처 1편에서 마티 맥플라이는 자신의 부모님을 이어준 후 무대에 올라 척 배리의 노래를 부른다. 저메키스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역사에 관한 농은 여기서도 이어진다. 마티의 무대를 수화기 넘어 척 배리에게 들려주는 씬. 백 투더 퓨처의 시점으로 부터 3년이 흐른 본 작품의 무대 위에서 척 배리는 마티 맥플라이 처럼 한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기타를 연주한다. 그냥 혼자서 낄낄 거린 순간이기에 기록하고 싶었다.  


9/10


가장 즐거운 무대는 아니타 오데이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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