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의 장편 데뷔작 <Targets>는 당대의 공포에 관한 문답을 B무비의 여건 내에서 너무도 영리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엄청난 영화광이었던 20대 청년 피터는 로저 코먼이 제안한 극도의 제한적 창작 조건 위에서 불과 1년전 발생했던 전대미문의 총기학살 사건의 기억을 지혜롭게 응용한다. 그 과정에서 미국사회, 그리고 미국시민이 체감했던 테러의 두려운 체중을 측정한다. 총기테러라는 낯선 소재로 인해 '호러'씬의 숨겨진 수작이란 수사는 쉬이 납득이 가진 않지만 후반부 자동차 극장학살씬의 스릴러적 묘미와 말도 안되는 병렬구조를 기어이, 그리고 충분히 설득력있게 매듭진 독특한 손재주는 이 작품을 훌륭한 영화로 인정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됐다.   




7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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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주제가 상호보완적으로 기막힌 합을 이룬다. 4개의 시선에 딸린 각기 다른 방식의 연출적 진술은 메시지를 살찌우는 동시 영화감각에 대한 튼실한 증거로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 고전을 대함에 있어 그 칭송의 핵심은 1895년으로부터 발생되온 순행적 가치를 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본격적인 출세작인 <라쇼몽>의 경우는 55년만의 만개가 아닌 60여년 이상 지켜온 독보적 선점에 있다고 본다. 주제적 몰입도, 영화적 간결성. 난 아직까지도 <라쇼몽>과 유사한 의도를 지닌 작품 중 이보다 설득력있는 영상언어를 접해본 기억이 없다. 제니퍼 린치의 <서베일런스>를 생각해보자.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원한 버팀목이다.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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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공포를 장르화시키는 과정엔 필연적으로 당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95년작 <SAFE>는 줄리안 무어의 창백한 얼굴과 연약한 캐릭터성을, 화학물질로 상징되는 현대의 비가시적 공포와 외로이 맞서게하며 생경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드라마, 스릴러, 호러 그 어느 장르에도 편입되지 않은 채 최소한의 상업적 흐름 마저 거부하는 이 영화는 족보를 찾기 힘든 괴상한 기록이다. 작정한듯한 안티 클라이막스는 되려 낯선 충격으로 영화를 끝맺음 시킨다. 무기력한 연출의 공포, 피부 마저 제 옷인 여배우의 열연. 꽤 많은 수확이다.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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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OGRAPHY

2013. 8. 12. 03:17 from Cinema/Mine














얼마전 영화게시판에 근 한달 내 본 영화들에 관한 간단한 리뷰를 끄적인 적이 있다. 고작 한달이라는 짧은 시간을 기억해내는 자리에서 무려 3,4 편의 영화들의 경우는 감상에 대한 기억 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려니 여기며 며칠을 보낸 후 왓챠라는 어플을 받아 수천 수만의 리스트 중에서 내가 감상한 작품들을 하나 둘 고르다보니 그 존재 자체를 잊은 상태로 살아가는, 너무도 좋은 영화들이 많다는 사실에 약간의 경각심을 느끼게 됐다. 몇년전 폐쇄했던 블로그에서도 모든 감상의 기록을 남겨보려는 시도는 했었다. 타고난 게으름 탓에 실패했으나 이번에 다시한번 도전하려 한다. 보고 들은 것들은 무조건 기록해야겠다. 작품의 원 컨텐츠에 접근하기 보단 주변부의 정보나 새로운 발견에 큰 재미를 느끼는 탓에 스치듯 훑어가는 정보들의 양을 전부 기억하기가 힘들다. 여기 저기에 끄적였던 기록들을 겨우 겨우 검색해야만 과거의 감상을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곳엔 영화를 바로 옆 글에는 앨범을, 귀찮더라도 적자. 적어.    


포스터를 누르면 IMDB 페이지로 링크가 되는, 뭐 그런 뻔하디 뻔한 구조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대부분은 IMDB일테고 북미 시장에 이름을 알리지 못한 몇몇 제 3국의 영화일 경우 경우 트레일러로 연결된다. 한국영화는 특별한 링크가 필요없을것 같다.  













 








    



Jazz on a summer's day 는 1958년에 열린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전경을 담아놓은 다큐필름이다. 바로 직전에 쓰인 '전경'과 '다큐 필름'의 순수한 의미에 이보다 근접한 작품이 또 존재하려나. 지역의 풍경과 그 곳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가 전해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작자나 전수자의 첨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의미로서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본 작품의 가치로도 연결되는데, '재즈'라는 주제적 흐름 마저 눌러버리며 시대상의 생생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해받는 미덕이 있다. 카메라의 포커스 역시 무대와 관중을 양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와같은 선택을 했다는건 놀라운 기분을 전해준다. 58년의 미국사회. 그러니깐 <백 투더 퓨처>에서 마티 맥플라이가 뛰어든 시대로 부터 고작 3년이 흐른 시점이다. 난 당시의 이미지들에 큰 동경을 느끼는 편이다. 물론 60년대 이전 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기록물에서 읽을 수 있는 모호한 단정함에 묘한 흥분을 느낀다. 50여년 이상의 세월에 큰 흥미를 느낀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락영화인 <백 투더 퓨처>에 가장 근접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쳐다보고 있으니 재즈고 나발이고, 그들의 패션과 표정 하나 하나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50년대를 기록하는 필름의 색상 역시 환상적이니, 더이상 무슨 형언이 필요하겠나. 



영화는 낮을 이야기하는 소소한 전반부와 밤을 수놓는 후반부의 별들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 암스트통 역시 어둠이 깔린 페스티벌의 절정기에 위치해 있다. 난 그럼에도 전반부에 펼쳐지는 카메라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밤이 찾아오고 재즈계의 큰 스타들이 스며드니 카메라는 (기술적, 대중도의 차이로인해) 자연스레 무대에 고정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난 이 작품의 참맛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색에 관한 관찰이라고 생각하기에 찬란한 햇살 아래 개성있는 조연을 자처한 객석의 생동감이 참으로 좋다. 코나의 노래를 인용하자면, 객석의 낮은 무대의 밤보다 아름답다. 라고나 할까. 영화가 끝나면 페스티벌을 떠나보내는 어느 일군을 포착하며 하나하나 스탭롤을 올려 보인다. 작품에 대한 편견이 부른 착각일까. 카메라 감독, 음향, 조명, 음악 ... 각종 스택들의 이름은 보았지만 감독의 이름을 읽지 못한것 같다. 뭐 착각이라도 좋다. 이렇게 객관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다큐를 감상한 후 그런 착각을 했다는건 꽤 괜찮은 일이니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굉장한 혼란을 느낄때가 있다. 현실과 진실에 포커스를 맞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시각을 지나고 난 후 무시무시할 정도로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정작 그 작품을 통해 해당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입장에선 훅 맥이 풀려 버린다. 송일곤이 만든 시간의 다큐와 <Jazz on a summer's day>가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건 이런 이유에서 일거다.


백 투더 퓨처 1편에서 마티 맥플라이는 자신의 부모님을 이어준 후 무대에 올라 척 배리의 노래를 부른다. 저메키스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역사에 관한 농은 여기서도 이어진다. 마티의 무대를 수화기 넘어 척 배리의 사촌이 들려주는 씬. 백 투더 퓨처의 시점으로 부터 3년이 흐른 본 작품의 무대 위에서 척 배리는 마티 맥플라이 처럼 한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기타를 연주한다. 그냥 혼자서 낄낄 거린 순간이기에 기록하고 싶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순진무구 성장담, <보이>는 작품의 가치에 비해 부차적인 주변요소로 인해 후한 평가를 받는 듯하다. 특별한 차별점이나 성취가 느껴지지 않는 이 영화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냈을지, 두고 두고 고민할 부분이다. 한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통상적으로 인지해온 뉴질랜드에 대한 인상과 너무도 판이한 세팅 정도랄까. 어쩌면 그런 부분에서 사람들은 흥미를 느낀 것일까. 국적을 지우고 본다면 동어 반복의 성장담에 불과한것 같다. 배우들을 보는 맛은 확실히 존재한다. 물론 훈훈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지는 착한 영화다. 다들 이렇게 하나하나 이유를 찾다 좋아지는 것일까. 물론 나쁘진 않다. 



<스테이션 에이전트>는 요 몇년간 왕좌의 게임을 통해 주가를 올려온 피터 딘클리지의 가장 훌륭한 영화 필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데스 앳 퓨너럴>이란 코미디 영화를 봤다. 07년작인 영국 영화와 2010년의 리메이크 작 모두에 피터는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존재 이유라곤 이미 시체가 들어찬 관 속에 들어갈 아주 작은 사람의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서사적 의외성과 단발성 웃음을 위한 장치 정도랄까. 그 속에는 어느 배우가 들어가도 무관했을 것이다. 키만 아주 작다면. 하지만 <스테이션 에이전트>는 여타의 작품에서 그를 활용해온 방식과는 판연히 차이가 있다. 그는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며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세상에 드러난 상처를 몸소 끌고 다니며 주변부의 인생과 슬픔을 당기는 인물이다. 감독의 제작과정과 해당 배우의 인생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진 못했지만, 그 둘의 의기투합 위에는 핀으로 분한 그의 인생이 담겨있으리라 믿는다. 작은 사람. 누구나 단박에 눈치채는 외부적 생채기. <스테이션 에이전트>의 톤과 흐름은 배우 본인과 감상자 모두를 감싸안으며 따듯하고도 유머러스하게 위로한다. 정말이지 웃기고, 슬프며, 감동적이기 까지한 작품이다. 더 신기한건 그런 정서의 표면을 흐르는 이야기는 참으로도 뻔하다는 것이다. 미묘하다. 미워할 수도 없다. 이 영화가 참 좋다. 별을 5개 붙일때는 그냥 그 영화가 참 좋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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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2012)

2012. 12. 14. 12:10 from Cinema/Mine




사샤 바론 코헨-래리 찰스 콤비의 환상적인 조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입장에서, <독재자>들은 그저 시시한 상심에 지나지 않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이한 발상과 유치한 연출방식에 다소 의아함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호의를 철회할만한 태만이 느껴진건 아니니 그들의 창작활동에 희극의 미래를 걸고픈 믿음엔 변함이 없다. 고작 세 편째다. 어차피 한번쯤 겪어야 했던 정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앞선 두편의 걸출한 코미디의 컨텐츠 속에는, 단발성 아이디어와 작가적 창의성에 의존한 시스템적 코미디물이 따라갈 수없는 예외성이 존재했었다. <보랏>과 <브루노>의 기막힌 감각들을 이벤트라 별칭하며, 다시금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묻고싶을 뿐이다. 다른 매체에서 탄생시킨 캐릭터성을 차용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작품들, 그들과 단순 비교를 하기엔 <독재자>의 부담감이 애처롭다. <보랏>과 <브루노>를 통해서 이전엔 미처 발견해지 못했던 희극적 감각을 자극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그들, 존재감을 알리는 데에 완벽한 성공을 거둬냈지만 그 과정에서 소진된 형식과 소재를 어떤 방식으로 대체해낼지, 지금 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다. 현재 상업영화에 불고 있는 경계적 연출방식의 희극적 답안을 어떤 방식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 너무도 궁금하다. 이들의 사랑스런 난장을 끝까지 따라가고 싶다. 현재 지구상에서 스크린 밖에서도 자신의 캐릭터성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배우는 그가 유일하다. 배우 그 자체만으로 작품 전체를 상징할 수 있는 희극인은 사샤 바론 코헨 뿐이다. 우연한 타이밍에 기생하는 반짝거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르와 방식, 모든것의 중점에서 웃음의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 10년 텀의 장르적 싸이클을 한두번쯤 씹어먹을 만한 상징적인 물건이라 믿고싶다. 영화 시장에서 코미디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TV 의 상상력에 침몰되며 점점 단순화되고 있다. 난 사샤 바론 코헨에게 짜릿한 역전극을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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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간 봤던 영화들 중 가장 사랑스럽고 독특한 개성으로 똘똘뭉친 작품은, 느닷없이 영국에서 날아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리차드 아요아데 감독의 데뷔작 <서브마린> 이었다. 2010년에 공개된 이 후 선댄스를 비롯한 이곳 저곳의 소박한 영화제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알리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자꾸 시선이 가는 영화였다. 손을 맞잡은 올리버와 조다나가 무심히 정면을 응시하던 한장의 사진. 그 이미지만으로 충분했다. 분명 좋아하게 되리라 직감했었다.





특별할 것 없는 15세 소년 올리버 테이트의 귀여운 심연으로 빠져들게 만들며 흡사 '올리버 테이트 되기'와도 같은 신비한 탑승감을 선사해줬던 <서브마린>은 독창적인 톤과 근례엔 찾아보기 힘든 사적인 진솔함으로 관객에게 다가서며 영국판 웨스 앤더슨 무비란 기분좋은 별칭도 획득한 작품이다. 영화의 전체 무게감과 맞먹을 만한 매력적인 '남과 여'의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최소 향후 10년간은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와 <아멜리에>가 선점하고 있던 사랑스러운 커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의내려줄 만한 보물이기도 하다. 요즘까지도 툭하면 돌려보는 영화다.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머리를 말리며 돌려보곤 한다. 자세를 잡고 진지하게 감상하지 않아도 <서브마린>의 공기와 세계관이 소박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며 옆에서 돌아가고 있단 느낌에 큰 위안을 받는다. 자꾸 털어 넣는다고해서 더  좋아질건 없는걸 알면서도 흡사 본능처럼 끊임없이 손이 가는 레모나 가루의 마력과도 같달까나.


이토록 소중한 작품을 연출한 재주꾼의 두번째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어찌 이 소식을 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국 시트콤 <아이티 크라우드>의 모스로 얼굴을 알린 그는 아직까진 연출보단 연기자의 비중이 더 크다. 올해 벤 스틸러와 빈스 본 등의 코미디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The watch>에 출연했지만 작품 자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배우로서 헐리웃 상업영화에 안착하는 일엔 헛발을 딛은 것 같다. 대신 2013년에 공개될 그의 두번째 영화 <The double>은 영국에 적을 둔 작품이긴해도 '제시 아이젠버그'와 '미아 와시코우스카' 등을 주연 캐릭터로 캐스팅하며 리차드 아요아데 월드의 세계적 확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Joe Dunthorne 의 동명소설 <서브마린>을 각색해 데뷔전을 치른 그는 이번에도 소설책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 작가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 리차드는 러시아 대문호의 초기작(1846년에 만들어진 2번째 소설)을 기반으로 정신분열과 도플갱어에 관한 어두운 코디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것이라곤 원작의 존재, 런던에서 진행된 촬영, 간단한 컨셉, 몇줄의 인터뷰 그리곤 따끈한 두장의 사진이 전부다. <서브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리차드가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로 촬영됐다고 한다. 이번에 공동 각색에 참여한 이는 하모니 코린의 형제인 아비 코린. 아직까지 IMDB에 공개된 시놉시스는 달랑 한줄이 전부다.


A comedy centered on a man who is driven insane by the appearance of his doppleganger.


아직 영화의 정식 시놉을 접하진 못했으니 원작의 스토리를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예상하는 수 밖에 없겠다. 1846년에 완성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골랴드킨은 승진을 꿈꾸는 평범한 관리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인지 그의 미래는 암담해 보인다. 절망에 빠진 골랴드킨은 그것이 어떤 음모와 관련된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에게 극도의 모멸감을 불러 일으킨 사건 이후 그는 거리에서 또 다른 골랴드킨과 마주친다. 그들은 처음에는 서로 종속관계를 유지하지만, 이 관계는 점차 경쟁자로, 적으로 발전한다. 제2의 골랴드킨은 원조 골랴드킨이 근무하는 동일 관청에서 직책을 얻게 되고, 원조가 실패한 승진의 기회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처럼 보인다.



정신분열 내지 도플갱어로 압축되는 스토리의 외형에 제시 아이젠버그와 리차드 아요아데의 인터뷰를 더해 보자. 지난 5월에 시작된 촬영은 진작 완료되었고 현재는 어느정도 작품의 편집까진 완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 속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대부분의 배경을 세트로 만들어 도시 전체를 완성했다고 한다. 거기다 도플갱어란 컨셉에 맞게 기본적인 특수효과도 가미되니 확실히 이번 영화에선 자본의 덩치가 불어난듯 싶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장르에 대한 이야기인데 코미디와 호러가 반복적으로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아이러닉한 컨셉에 맞춘 블랙 코미디의 구조에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로 가득한 공포영화의 어두운 톤이 배경이 깔린다고 한다. 인터뷰를 읽다보니 원작의 1846년을 현대적으로 각색함에 있어 그 배경을 평범한 현대 런던이 아닌 독특하고 침울한 별도의 공간으로 상정해 이야기를 꾸며나갈 것 처럼 보인다.    


 



위의 이미지는 몇일전에 처음으로 공개된 <The double>의 스틸샷이다. 미아 와시코우스카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무기력한 본체를 연기하고 있는 듯한 제시 아이젠버그의 캐릭터는 슬쩍 훔쳐볼 수 있다. 반가운 것은 두번째 사진에서 제시 옆에 서있는 배우 노아 테일러. 그러니깐 그는 <서브마린>에서 주인공 올리버 테이트의 심약한 아버지를 연기했던 배우이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데뷔작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상당수가 이번 신작에도 참여한다고 한다. 매력적인 그녀 야스민 페이지 (조다나)도 함께 한다. 단지 익숙한 배우의 출연이 반가운게 아니다. 독창적인 데뷔전을 치른 감독들이 헐리웃으로 넘어가 메가폰을 잡곤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았던, 그 괴상한 코스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즐거운거다. 자국 시장에서 규모만 조금 키워 자신의 색을 그대로 유지해갈 수 있단게 얼마나 기쁜일인지, <타인의 삶>을 만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이상한 헐리웃 데뷔작 <투어리스트>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았었나.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더라도 유지가능한 색과 신선한 가능성만 보여줄 수 있다면 괜찮은거다.  모든 단서를 긁어모은 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겹쳐질만한 영화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에드가 라이트의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를 기다리던 설렘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리고 이 영화는 과연 한국의 스크린에 걸릴 수 있을까. <서브마린>은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결국 DVD를 살 수 없었다. 그의 두번째 영화를 기다리며 <서브마린>의 트레일러를 한번더 플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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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감상의 가치는 충분한 영화다. 누구나 한번쯤 감상해볼만한 작품이며, 존재가치나 영화적 완성도에 있어 분명 존중받아야할 영화라 생각한다. 작품에 대한 호의를 분명히 밝힌 상태에서 한가지 치명적 아쉬움을 짚고 넘어가야 겠다. 전작인 <부러진 화살>을 보지 못해서 정지영 감독의 스타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본 작품에서 취한 연출적 의도를 정확히 분간해내긴 힘들겠으나 감독의 의지나 방향성과는 별도로 주요 지점에서 감정선의 맥을 끊고 몰입을 저해하는 듯한 상투적인 연출의 배치는 아쉬운 실수 내지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


한정된 공간안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진행하는 구조를 기준삼아 평하자면 그렇게까지 훌륭한 각본은 아니었으나 시나리오 상의 감독이 구축한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로서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의 환영은 '이야기'의 초점을 온전히 육체와 기억으로 고정시켜주며 그러한 단점을 망각토록 유도해준다. 역사의 무게와 배우들의 열연은 결국 <남영동 1985>를 나쁘지 않은 영화로 기억하게 할 것이다.

 

시선의 고정과 영혼을 바친듯한 연기의 나열로 인해 주제적 목표와 영화적 재미는 기준치 이상으로 충분히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낡은 상투성이 목에 걸린 가시마냥 자꾸 신경 쓰인다. 물리적 압박에 숨통이 막혔던 관객들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면서, 폭력성에 마비됐던 이성이 그간의 경험적 조각들을 모아 스스로에게 이야기의 가치를 형성하고 의미를 완성시킬 '순간'에 와서 설득력없는 식상함으로 안일하게 대처한게 아닌가싶다. 정말로 주요한 내면의 묘사나 갈등의 순간들을 대처함에 있어 매끄럽게 선을 잇지 못한것 같다.  


러닝타임의 절대 비중을 따져보면 미미한 순간들이긴 해도 이런 투박하고 아쉬운 연결로 인해 '남영동 1985'를 올해의 영화로 꼽지 못할것 같다. 극의 절반을 경과할때쯤 난 확신했었다. 근 2,3년간 본 한국영화 중 <황해> <부당거래> 이후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될것 같다고. 결정적 상투성과 미적지근한 현재 시점의 묘사로 인해 이 영화는 그냥 2012년 한국영화의 어느 한 순간 정도로 기억될 것 같다. 지옥과도 같은 22일에 대한 묘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깨를 짓누르고 신경에 바람을 불어넣는 듯한 강렬함을 느끼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허나 노감독의 고정관념일지, 주제에 대한 강박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먼지쌓인 시선과 불필요한 부연설명의 존재는 소제의 온도를 오롯이 장르로 연장시킨 차가움도, 뚜렷한 주제 전달을 위한 악몽과도 같은 드라마의 뜨거운 열변도 당당히 독립시키지 못한채 어중간히 섞여버린 인상이다. <남영동 1985>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만한 흠은 아니지만 분명 영화적 포만감엔 아쉬움이 남는 틈이라 할 수 있다. 


<남영동 1985> 의 가치는 배우와 그 연기력이 집중적으로 파고든 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중점적으로 응시하고 있는 '고문'이란 행위를 표현함에 있어 특별한 영화적 장치를 활용하진 않고 있다. 대부분이 무기력하게 바라보도록 꾸며져 있다.  특정 장르영화의 팬이라면 세포하나 미동하지 않을 수위지만, 체감 수위는 예상외로 높은 편이다. 역시 중요한건 표현을 담는 그릇인것 같다. 고작 5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닿을 수 있는 근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이기에,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선 정신적 자극이 박원상의 수난을 보다 지독하고 자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것같다. 막연하게 귓동냥으로 들어온 독재의 그림자 속으로 온전히 몸을 내던지는 경험의 가치는, 언제나 과거사 문제에 안일하게 뭉뚱그려온 우리네 현실을 향해 던지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였다.

영화가 공개된 시기 때문에 이 작품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외부적 힐난이 존재할 것이다. 개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진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인권과 경각에 대한 범위 안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한 작품이다. 선동으로 치부하고 감상도 하기 전에 낙인을 찍어 존재를 부정하기엔 너무도 잔악한 역사였고 충분히 곱씹어볼만한 부끄러움 이었다. 정견을 가지고 흑백논리로 득과 실을 논하기엔 너무나 심한 과정이었다. 정치를 마치 패션처럼 전시하며 극단적인 배타성을 띄는 몇몇 젊은이들에게도 단지 '인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각본만 가져가서 다른 감독이 연출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인터뷰를 읽어보니 감독과 배우들간의 신뢰가 없었다면 완성되기 힘든 영화였던것 같다. '왕년의 스타감독'이 쏟아내는 푸념과 한탄의 다큐 <영화판> 을 통해 오늘날 노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대한 고민을 내던졌던데, <남영동 1985> 는 그에대한 충분한 자답이 됐을것 같다.


2004년으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엔딩 크레딧을 메우고 있는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까지 전부 들어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후일담을 꾸미더라도 <타인의 삶> 같은 완결성이 아니라면 이전의 메시지와 감각을 둔화시킬 뿐 그닥 좋은 매듭을 짖긴 힘들다. 특히나 이처럼 강렬한 직선의 영화라면 더욱. 그리고 군부정권에 혹사당한 피해자의 증언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은 누군가에게 굉장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영화적 감흥의 자아성찰을 둔화시킬 위험이 있다. 22일의 '팩트'에 집중했다면 더욱 근사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남영동 1985> 의 독특한 특성은 지적을 함에 있어 기묘한 부담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영화적 완성도와 기술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생각을 펼치다 보면 왠지모를 죄책감이 달라 붙는다. 옳은 시선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담감이다. 


고문 포르노가 판을 치는 영화판에서 '고문'의 이미지가 긍정적인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쉽지않은 경험을 선사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이런 영화가 없었단 사실이 의아하기도 하다. 간격의 길이만 다를 뿐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될 역사이기에, 과거사에 둔감한 젊은이들과 우리 뒷세대에게 의미있는 인권 교육의 장이 될 것 같다.



[ 505호실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캐릭터가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박원상. <남영동 1985>를 박원상의 영화라 해도 서운해할 사람은 없을것같다. 그리고 이경영. 이토록 좋은 배우가 왜 원조교제를 해서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필모그라피에 허무하게 구멍을 냈는지...]   




 

 

 

 

 


Posted by Alan-Shore :



가장 흔히 듣는 질문 '요즘 괜찮은 영화 뭐있어?' 그러나 얼마전 이 질문을 받아든 순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삼 자각했단듯이 머릿속으로 자답할 뿐이었다. 확실히 요즘엔 영화를 안보는구나. 이유없이 빠져든 대상이었기에 시들해진 지금에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대리만족이나 도피보단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스케치를 고민하는 시기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현실적인 상념의 과정속에 부자연스런 환상을 뿌리리라 근심하기 때문일까. 아예 안보진 않아도 확실히 이전보단 빈도가 준것만은 사실이며 자연스레 이곳에서 할 이야기거리도 부족해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주해 충동적으로 행한일이 있었다. 5년전 광화문의 어느 극장에서 나를 치유했줬던 영화를 스크린으로 다시금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이었다. <카모메 식당>은 영화를 대함에 있어 전환의 기점이 아닌 유보의 독려로서 잠시 모든것을 내려놓고 부담을 덜어내라는듯 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사실 영화를 공유하는 방식과 능력에 있어 많은 회의를 느끼는 요즘이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영화를 너무나 사랑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소개하는 방식과 핵심들을 보고있자면 수사를 위한 문장쌓기, 투명하고 직관적인 감상에 대한 흔해빠진 서술의 반복뿐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웹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의미없는 소문장들의 전시만을 위한 전시를 눈살찌푸리며 바라보면서도 정작 가이드로서의 고민보단 형식만을 메우기 위해 핵심과 진심을 챙기지못한 내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에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앞날에 펼쳐질 일상들에 대하여, 불안까진 아니여도 호기심어린 고양이 눈으로 생각들을 응시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과 문제들이 해결된 후에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취미인으로서의 봉사,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영화전문 블로거가 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당장에는 힘든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당장 이곳의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이전보다는 고른 호흡으로 허술한 생각보단 명확한 자료와 의미있는 진술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진심' 말이다. 강박과 허식을 덜어낸 진심어린 나만의 공간. 생각과 경험을 정성스레 쌓고싶다.


슬슬 마무리다. <카모메 식당>을 감상한 후 여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블로그의 완결성을 위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나의 또다른 취미생활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영화 뿐 아니라 나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걸 좋아한다. 오히려 짧은 템포속에 기발한 사고들이 가득 들어찬 영상과 멜로디 속에서 영화 이상의 활력과 영감을 얻는 편이다. 그래서 내 맘 한켠 어딘가의 목 좋은 자리를 찾아 소박하게나마 나만의 <카모메 식당>을 오픈했다. 거창할 것 없이 그냥 이곳 블로그를 임시적으로 보수확장 하고자 한다. 현실적 여유가 완성되기 전까진 포스팅의 완결성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게시물들은 단지 제목과 대상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우연하게 발견한 어느 소담한 나무의 시원한 그늘처럼 종종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슬쩍 기대어 일상의 바쁜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만남이 되었으면 한다. 당초 끌고오던 진심에 대한 고민에 <카모메 식당>에서 배운 여유의 덕목을 살포시 올려본다. 그렇게 불안과 취향을 달래본다,


그래도 이 모든 생각들을 한편의 영화를 통해 결론지을 수 있었으니 영화는 내게 있어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이야기하는 방식의 절실함을 알려준 <그을린 사랑>. <차가운 열대어>를 통해 영혼강탈자의 영화적 매혹을 일러준 소노 시온 감독. 떠나가고 남은 것들의 소중한 눈물들 <굿바이 그레이스>와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실현가능한 범위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살냄새를 풍겨주며 내 맘속에 들어온 돈 루스 감독의 <해피 엔딩>. 최근에 내 마음을 움직인 몇편의 영화들을 기억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아래의 영상은 본문을 관통하는 정서의 핵심이다. 영화의 엔딩을 함부로 올려선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지만 많은 것들을 일러준 순간으로서 이 글과 맥을 함께하는 씬이기에 붙여봤다. 감상여부는 스스로 판단해서. 그런데 정말이지 훌륭한 마무리 아닌가.

 


Posted by Alan-Shore :





천재들의 조우, 필립 K. 딕과 스필버그의 만남 '원작과 영화에 관한 수다'


여기 2054년의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10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60쪽이라는 좁다란 백지위에 그가 꿈꾸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간결하게 써내려갔고, 다른 이는 바로 50년 후인 근 미래의 모습을 145분이라는 시간동안 필름위에 찍어 내려갔다. 작가와 연출가로서 각각 세기의 천재라는 칭호를 받는 이 두 사람이 바라본 2054년의 모습은 비록 같은 인물들이 동일한 상황 속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너무나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제작될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흥행성을 가진 배우가 조우한다는 사실이 이슈화 되었지만, 그에 선행하여 두 명의 천재적 창조자의 조우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과연 이들의 조우는 성공적이었을까? 아니면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우선, 앞서 언급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 필립 K. 딕은 자신의 명성에 비해서 아직까지 스크린에 옮겨진 편수는 극히 적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지닌 그 중량감은 가히 위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SF장르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블레이드 러너>와 풀 버호벤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던 <토탈 리콜>까지 70년대 이후 부흥기를 맞은 SF영화계의 가장 걸출하고 무게감 있는 작품들은 모두 필립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사이보그를 통한 통찰과 기억의 상실을 매개로 한 통찰. 언제나 그는 우리 인간들의‘실존’과‘정체성’을 향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주었다. 이번에 언급할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블레이드 러너와 토탈 리콜의 시기적 중점에 존재하면서도 그들보다는 더딘 진화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간 그가 다루었던 정체성 문제에서 벗어나 약간 다른 시각으로 미래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현대문명의 발달로 인해 기술은 발달하게 되고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문제에 관한 딜레마를 다룬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영화 감상문에 있어 이토록 원작자의 설명이 길어 진건 이 영화를 논하는데 있어서 필립 K. 딕의 존재감은 스필버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2년,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극장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접했다. 나는 이 영화를 접한 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거친 화면과 강렬한 색체들이 어우러진 미래사회의 모습. 그리고 범죄 예방수사국이라는 매력적인 소재와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 볼만한 정치 사회적 메시지들, 물론 아직까지 감상주의와 가족주의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A.I. 이후 다소 거칠어진 스필버그의 모습이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파이트 클럽>과 <지구를 지켜라>에 더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과제를 통해 이 작품의 원작을 접하면서 약간의 실망감과 아쉬움이 남기 시작했다. 그만큼 필립 K. 딕이 구축해 놓은 세계관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화를 보며 다소 복잡한 전개라고 생각했던 스필버그의 세계관은 핵심을 놓친듯했고 짧은 단편소설보다 단순한 전개였다. 아니 그보다는 상업영화로서 편리한 길을 가기위해 포기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물론 극적 재미와 상업적 완성도는 스필버그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60페이지로 이뤄진 필립 K. 딕의 2054년은 전혀 흥미롭지는 않다.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반세기 이후의 재해석판은 충분한 재미와 친절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뺄 필요까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다수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에 대응하는 소수가 있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스필버그의 세계 속에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을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소설과 원작 모두 기계문명으로 인한 인간속박의 타당성에 관한 의문이나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관성과 딜레마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유무는 꽤나 큰 차이점을 가져다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예언가는 각각 다른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보고서들이 하나의 사슬로 묶이면서 그간 진행되어온 앤더튼의 행보를 명쾌하게 해석해 주는 과정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자신의 명백함을 주장하려던 앤더튼은 3명의 예언자들이 보여준 다수와 필연적 소수의 존재를 감지하고, 누명을 벗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극이 진행될 수 록 자신의 의지로 바꿔보려던‘운명’이 역설적으로 고정되는 모습은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서로 얽혀버린 세 개의 리포트의 순차에 따른 주인공의 심적 변화와 주제에 다가가는 보다 효과적인 요소들로 작용한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이러한 복잡하고 매력적인 요소들을 거부하고, 단순한 음모론과 함정의 수준에서 모든 것들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소설의 말미를 장식하는 앤더튼과 워트워의 2페이지에 달하는 대화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존재했기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1956 VS 2002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것 이상으로 원작을 각색하는 작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몇 백 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축약하는 보통의 각색 작업과는 달리 단편 소설을 영화할 할 때에는 연출자의 해석과 세세한 곁가지들의 추가, 그리고 감독의 상상력이 살을 더하게 된다. 이 작품은 원작의 틀에서 여러 살들을 붙여나가기 보다는 모티브와 초반 설정만 차용했을 뿐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도하고 있다(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에서 소설과 영화의 설정이 전적으로 동일한 인물은 단 한사람도 없다. 영화의 주제를 향한 최종적인 목표는 같은 곳이지만 그들이 최종적인 목표치에 도달하기에 앞서 개개인들이 바라보는 단기적인 시야와 동기들은 소설과 영화간의 큰 격차가 있다. 주인공인 앤더튼의 외향에서부터 시작해서 극의 진행에 있어 등장하는 반대세력으로 설정된 인물까지, 모두가 상이하다. 그렇다면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1952년 필립 K. 딕이 창조한 세계와 2002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세계는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까?


역시 필립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주제 전달이다. 그리고 예언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패러독스를 현명하게 매력적인‘무기’로 전환시키는 과정 또한 작가의 상상력에 힘을 보태준다. 하지만 필립의 작품 속에 발견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야기만 있을 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모든 캐릭터들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에 대한 사연은 ‘운명’이요 그들을 향한 시련은‘과정’일 뿐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과 감정의 이입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다. 극 전반에 깔린 단조롭고 어두운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밋밋하게 만들어 버렸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래! 역시 스필버그는 대단해


아무리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원작에 비해 단순화 시킨 상업적‘수’를 썼다 한들 이 작품을 논하는데 있어서 스필버그 감독이 들인 노력과 정성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등장하고 2년 후, 오우삼 감독 역시 필립 K. 딕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데 도전한다. 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스타일리쉬한 오우삼표 영화도 아니었으며, 어두운 미래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필립의 작품도 아니었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으로 남아버린 이 영화는 필립의 세계관을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따르는 많은 어려움들을 보여주는 예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2054년의 시각화는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E T>와 <쥬라기 공원>을 창조해낸 그의 상상력은 괜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사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범죄 예방 시스템을 제외하고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소품이나 표현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이 영화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미래사회의 모습들은 전적으로 스필버그에 의해 재창조된 것들이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동체인식 시스템에서부터 정찰용 스파이더와 창조적인 교통체계까지, 영화에서 쓰이는 특수효과는 그 어떤 작품들 보다 더 적절한 곳에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수효과에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기술력으로 포장된 이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기술력과 긴장감 넘치는 연출력이 충돌하며 빛을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원작 소설과는 달리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접할 수 있는 상업적인 재미를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필립 K. 딕이 창조한 미래사회의 모티브는 그대로 차용하면서 기술력과 거장의 수완을 적절히 혼합시킨 연출을 시도하며 표면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관객과 평단을 만족시킬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필버그가 창조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역시 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필립 K. 딕의 냉소적인 표현과는 달리 스필버그는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의 손길을 뻗으려 노력한다. 그것은 곧,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속에 매몰돼있던 캐릭터들을 조금 더 입체적이고 중점적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주인공인 앤더튼에게는 가족에 얽힌 과거를 부여하고, 원작에서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던 예언가에게는 극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매개로서 위치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지나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것들은 스필버그의 영화를 성립하는 중요한 요소들이긴 하지만, 필립 K. 딕이 창조한 어둠과 혼돈의 세계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설정들이었다. 스필버그의 연출은 오락영화로서 분명히 훌륭한 것이지만,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는 가족과 인간에 대한 지나친 애정은 작품의 무게를 떨어뜨리며 원작에 비해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필립 K. 딕의 투시력과 스필버그의 창의력 그리고 탐 크루즈의 흥행성이 조합된 영화라고 평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다소 아쉬운 부분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원작의 주제와 상업영화로서의 재미를 적절히 혼합한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두 거장의 조우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두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결국 원작과 영화는 필립 K. 딕의 비관과 스필버그의 낙관이라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대조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낙관과 비관 중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냐는 문제를 떠나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찰해볼만한 주제를 수많은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이 둘의 조우는 꽤나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00년 전에 존재했던 한 소설가의 메시지와 50년 전에 존재했던 한 감독의 손에 의해 깔끔하게 재단된 이 이야기는 2054년, 그 시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과연 앞으로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지, 그렇다면 두 거장들 중 누구의 예언이 적중하게 될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만남이며 경사로운 조우라고 할 수 있겠다.



SF의 틀 속에 스릴이 살아 숨쉬는 필름 느와르 '장르에 관한 잡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기본적으로 SF 영화의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영화와 장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SF 장르란 무엇일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로서는 과학적 허구<Science Fiction>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인류사회의 허구들을 뜻하지만 그것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요, 과학적 근거를 바탕에 둔 채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는 이야기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임에도 장르에 대한 이해나 그 특성들을 자세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편이다. 아마도, 장르 영화들이 사용하는 일정한 틀들이 영화의 진행을 단순화 한다는 편견에‘장르 영화’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듯 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SF 장르에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SF 영화의 분석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논리적으로 비교할 재주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SF 장르영화와 이 작품과의 연계성과 <마이너리티 리포트> 가 가진 매력을 생각해 보고 이 영화에서 SF 장르 외에도 찾아볼 수 있는 타 장르의 적용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SF 장르는 현재의 인류가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언뜻 보면 현실과 가장 동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장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SF 장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특성들을 가장 자유롭고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현실 반영적’ 장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계문명의 발전에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할 주제를 던져주고,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속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등장시키며 우리 인류들의 사유를 한번쯤 진지하게 토론하게 하는 SF 장르는 가장 사회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SF 장르라는 말이 곧 어마어마한 제작비와 화려한 테크놀러지의 이용을 필요로 하기에 단순히 덩치만 큰 블록버스터 영화로 취급될 수도 있다. 주제의 전달 역시 중요하지만, 영화 역시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고 거대한 규모의 제작비가 투여되는 SF 장르에서는 오락성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의 존재와 미래사회의 경계등에 대한 진지한 주제들을 뛰어난 오락성의 박자에 맞추어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훌륭한 것도 없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디스토피아?


그렇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SF 장르의 기준에서 봤을 때 어떤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영화일까. 기본적으로 SF 영화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바로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가진 유토피아적 발상과 비관적인 시각으로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디스토피아의 구분이다. 전자는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인류문명의 모험과 도전이라는 테마를 자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과학기술의 ‘비약적인’발전에 따른 폐단을 보여준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인 필립 K. 딕은 언제나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의 기준으로 바라보았다. 비약적인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성파괴와 기계와의 대립구도. 흥미롭게도 SF 영화의 극단적인 양 축에 존재하는 두 명의 창조자는 하나의 작품에서 공존을 시도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시각을 유지하며 극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론은 ‘희망’과 ‘가족’이라는 테마로 극복하고 있다. 절망을 이야기 하면서도 가족의 사랑으로 이것들을 극복해 내려는 태도는 다소 의아하게 받아들여진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역시 SF 장르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이 장르는 시대를 반영하는 우화적 텍스트로서 SF의 기능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어리언>이나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외계의 존재를 표면적으로 등장시키면서 미국인들이 가진‘타’에 대한 경계와 극복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SF 영화는 현재의 가장 민감한 문제들을 초 현실이라는 틀을 사용하여 은유적이고 상업적으로 포장하곤 한다. 이 해석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9/11 테러 이후 테러범에 대한 경계를 위해 애국자법<USA PATRIOT>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9/11 이후 일반의 삶을 어느 정도 제한하며 테러방지에 대한 강압적 태도를 취하는 정책이다. 수백편의 판권을 소유한 그가 9/11 테러이후 가장 먼저 이 영화를 택한 것은 이러한 정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스필버그는 이 후에도 꾸준히 <우주전쟁>과 <뮌헨>을 만들어내며 9/11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속에 담긴, 스릴러와 느와르의 빛


지금부터 언급 할 이야기는 장르적 핵심과는 많이 빗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접하며 느낄 수 있었던 스릴러와 느와르의 맛에 대한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시간이 흘러갈 수 록 영화의 장르 역시 서로간의 공존을 선택하고 더욱 더 풍성한 볼거리와 새로운 주제 전달을 위해 다른 장르와의 배양을 시도한다. 원작에서는 미래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이 주를 이룬 단순한 SF 소설에 그쳤던 이 작품은 영화화 되고, 상업화 되면서 훌륭한 스릴러 영화의 구조와 느와르 영화의 빛깔을 첨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등장인물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캐릭터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액션 스릴러의 구조로 풀어나갔다. 여러 시퀀스에서 스릴러 장르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 앤더튼과 아가사가 범죄 예방 수사국의 추적을 따돌리는 시퀀스는 스릴러적 연출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예언과 추적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풍선이나 우산 등의 소도구들을 이용하여 관객에게 스릴을 안겨주는 이 시퀀스는 감독의 노련함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일전에 어디선가 읽기를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히치콕의 영화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명과 오해를 받는 한 남자가 진실을 향해 달려 나가는 모습이나 주인공과 경찰과의 관계 그리고 극의 진행과정에서 언뜻 엿보이는 영국식 냉소적 유머까지 이처럼 히치콕의 스타일과 비교된다는 점 자체가 이 영화가 스릴러로서도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또한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특히 촬영부분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는 2054년형 필름 느와르 느낌을 살리고 싶다고 이야기 할 만큼 필름 느와르는 이 영화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컨셉 이었다. 기계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딜레마를 안겨주는 이 영화는 기계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세상을 연출하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은 그간 스필버그 감독이 만들어왔던 그 어떤 영화와도 닮지 않은 냉정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가득한 영상을 만들어 냈다. 필름 느와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전반을 포괄하는 하나의 컨셉으로서 주제의 전달에 있어 적절한 분위기 형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당신들의 미래 <마이너리티 리포트>, '주제를 통해 바라본 영화와 문화의 연관성'


그렇다면 이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하고 싶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난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영화와 문화의 연계를 나타내는 5가지의 주제 중에서 이 영화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사회와 정치에 관한 분석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스필버그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들은 생략한 체 몇 가지의 교훈만을 남기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영화가 전해주는 여러 가지 메시지들이 존재하겠지만, 영화와 내가 접하는 위치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은‘나’라는 개인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우선시하기에 나에게 가장 와 닿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트뤼포 역시‘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당신의 우편함을 찾아봐라’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우선 이 작품은 원작소설에서 큰 비중을 두고 다루었던 개인과 체제 사이의 이데올로기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SF 장르의 타 영화들과 비교를 해본다면, <터미네이터>에서 보여 지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인류의 안락을 위해 발전시킨 기계문명에 의해 역설적으로 지배당하는 모습들이 비춰진다. 일반의 SF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던 인류의 지나친 문명진보적인 시각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들어난다. 하지만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2054년은 아직까지 그러한 문제들을 논의하기에는 이른 시기이다. '감기‘라는 질병도 이겨내지 못한 더딘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반의 SF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 보다는 우리사회의 통제권 내에 있는 시스템에 대한 역설에 관한 목소리가 더 높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2054년은 범죄 예방 시스템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점적으로 봐야할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의 주제‘란 바로 범죄 예방 시스템에 관련한 잡설들이다.


범죄 예방 시스템, 그 절대 권력에 대하여


우선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진행에 있어서, 범죄 예방 시스템이란 워싱턴이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서 일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전국화는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이루어질 사항이었으며, 극중에서 다루는 시기적 상황은 투표 시행 이전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현재 워싱턴에서 시행중인 이 제도는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한 하나의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범죄 예방 시스템은‘정의’라는 목표를 위해 국민들의 생활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권리를 박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은 앤더튼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한 아파트를 부감샷으로 훑어 옮겨가는 씬 이다. 이 장면에서 워싱턴의 시민들은 부부싸움을 하는 도중에도, 심지어 성행위를 하는 도중에도 정찰용 스파이더의 동체인식 검사에 일상적인 반응으로 응하고 있다. 이러한 사생활 침해에도 국민들이 범죄 예방 수사국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목숨에 대한 보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인권침해를 암묵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나타난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을 갖게끔 하는 새로운‘권력’에 의해 암묵적으로 통치당하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권침해에 관한 문제들을 전제하며, 그 이상의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범죄 예방 수사국의 감사 임명을 받은 워트워는 수사국을 직접 접하고야 그곳의 시스템과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연방수사국의 대표로 감사 임무를 맡은 이가 이곳의 시스템에 대해 그제 서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범죄 예방 수사국의 폐쇄성과 정치적 권력에 있어서의 타 기관의 우위를 보여준다. 살인의 예방이라는‘사회정의’를 등에 업고 국민과 사회의 법 위를 휘젓고 다니는 범죄 예방 수사국은 하나의 거대한 권력으로서 사회적으로는 인권에 대한 경시와 정치적으로는 암묵적인 통치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명을 구하기에 그러한 자격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인명은 재천이거늘...


모든 물음에 있어 기본적으로 밝혀야 할 문제는 범죄 예방 시스템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것이다. 극중에서 앤더튼은 워트워를 향해 테이블 끝으로 공을 굴려 보낸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을 워트워는 잡아낸다. 이 장면에서 앤더튼은 범죄 예방 시스템의 확신을 보여준다. ‘당신이 공을 잡은 이유는 공이 땅으로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고, 당신이 그 공을 잡음으로서 공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해자가 어차피 유발할 살인에 대해 사전에 차단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물체를 비교한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발적 살인을 행하려는 이에게 실행 이전에 다가가 범죄를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범죄 예정자들이 ‘살의’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 사람을 범죄자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는 감정적으로 살인을 시작했음에도 아직 물리적으로는 이행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다면 범행 직전에 검거된 이들을 어떻게 살인자와 같은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사회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예언’과 기술적 조합이라는 인력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아니 도전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이자 자연에 대한 무모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규정한 시스템으로 다른 인간을 옭아매는 이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사회적인 법과 윤리의 틀에서 많은 것들이 어긋난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기존에 자신들의 사회적 약속으로 만들어낸 법체계를 무시하는 모순적인 처사라고 생각한다.


※ 여 담

【 지금까지 이 부족한 글을 정성스레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장 분량에 맞추려다가 제가 워낙에 좋아하는 영화이기에 쓸데없는 말들이 이리 저리 붙어 길어졌습니다. 그 쓸데없는 말들 하나하나가 전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향한 저의 애정이라 생각하니 지우기는 안타깝더군요. 저 역시 작게나마 미래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는 공무원 지망생입니다.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기에 이번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시나리오 작가분의 강의를 듣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밝히기를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작품을 좋아함에도 이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는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국내의 여러 평론가들의 글들을 접하고 이 영화에 대한 사사로운 자료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고 깨달은 내용들이 다소 저의 영화 감상문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평론가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제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명쾌한 표현들을 읽어나가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감상문에 쓰인 글들이 다소 영화 평론가들의 논지와 유사한 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1살




Posted by Alan-Shore :



디아스포라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했던 것은 어느 감독과의 대담자리였다. 그의 이름은 ‘장률’. 대륙과 반도의 어느 중간지점 쯤 위치하고 있는 감독의 작품 속에는 중국변방 지역에서 삼륜차를 끌며 김치를 파는 조선족의 모습과 두만강을 경계로 우정을 나누게 된 조선족 소년과 함경도 북한 소년의 관계를 통해, 움직여야만 했던 혹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불안과 한계의 경계 속에서 삶을 위해 삶을 이어가는 대다수의 수동적 디아스포라의 모습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사실 영화를 본 이후에도 이 작품들을 통한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었다. 영화의 감상이 끝난 후 가지게 된 감독과의 대담자리에서 그가 뱉어낸 이야기를 접한 순간 단순히 서울을 기점으로 안과 밖의 경계인식을 해오던 내 머릿속 지도의 개념이 한층 확대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중국말로 생각을 한 후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 영화들은 정작 중국 땅에서는 단 한 차례도 소개 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막연히 기묘한 경험으로서 접하게 된 이러한 이야기들이 문화인류학 수업을 통해 민족과 상상의 공동체의 이해를 거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과 인식들에 당도하는 순간 디아스포라에 대한 심상이 보다 강렬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많은 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져가는 요즘, <Touch of spice> 속에 담긴 경계와 소비의 함의파악을 통하여 2011년의 대한민국, 영원한 정착과 일관성이란 곧 무의미한 환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이곳에서 오늘을 살아가야만 하는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그간의 수업을 통해 듣고 느낀 바를 토대로 다시금 떠올려 보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이권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다퉈온 과정 속에서 역사서의 문장들이 채워져 왔으리라 믿고 있다. 특히 디아스포라 같이 독특한 개념의 집단들은 갈등의 시계추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서 파생된다고 본다. 만약 키프로스내의 그리스-터키 간 분쟁이 없었다면 파니스는 이스탄불의 어느 향료가게에서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사이메와의 추억을 통해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작은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자신은 존재조차 모르는 어느 경계지대의 이권다툼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인생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로 문화와 정치의 이동과 마찰 속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근대국가의 개념이 명확해진 이후, 특히 집단 간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본격화 되면서 점화되기 시작하여 글로벌화의 추세 속에서 보다 빠른 속도로 다양화되며 하나의 단어로서는 규정짓기 힘든 복잡성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큰 맥락에서 나누어 파악해 본다면 각자의 원점에 위치하고 있는 뿌리를 향해 정신적으로 품고 있는 향수와 애착의 정도가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니스의 기억과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본 영화의 구성은 독특하게도 유년기와 중년기를 통해 각각의 특성들을 보여줌으로써 한 개인의 순간순간들을 넓게 펼쳐내어 1-2세대의 태도와 존재성의 차이를 한 몸속에 담고 있다. 그 결과 억압의 객체로서의 다수적 측면과 선택의 주체로서의 소수적 측면을 파니스의 인생여정을 통해 보여주며 디아스포라가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주연장신청 기각과 추방명령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본격화 된다. 파니스의 가족은 그리스의 혈통을 지니고 있음에도 터키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경계인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터키에선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에선 터키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일상은 여러 방면을 통해 강요를 받기 시작한다. 파니스의 성장과정 속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강요이다. 학교와 경찰서에서 파니스의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듣는 이야기는 그리스 언어와 역사에 대한 강조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런 조언을 구하기 전에 파니스 부모에게 던진 ‘터키를 떠나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죠?‘라는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어린 학생에 대한 교육적 차원의 훈계가 아니라 민족과 민족 간의 갈등 속에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상대를 구별 짓고 혈족적인 굴레 속에서 타자를 배격하는 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위 문단에서 언급한 차별을 전제로 한 폭력적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요리와 파니스의 관계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직접적인 정치 사회적 묘사 없이 일상의 영향력을 통해 구성원으로서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룬 작품인 만큼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매개삼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 많은것 같았다. 유년시절 파니스가 음식을 만드는 행위는 부모와의 사소한 마찰로서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고 있다. 물론 향료로서 세상을 묘사하는 영화이기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요소이지만 나는 그 과정속에서 파니스를 향한 부모와 세상의 시선과 태도를 바라보며 디아스포라와 같은 숙명적 소수자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틀에서 벗어낫다‘ 판단되는 것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자신만의 삐뚤어진 자를 들이대어 기준을 설정하고 올바르기를 강요하는 태도, 바로 그와 같이 다름에 대한 인정없이 강요와 평준화를 요구하는 폭력적인 시선. 파니스와 부모 사이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바라보며 굵직한 상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 생의 최악의 5초를 회상하며 서글피 눈물 흘리던 파니스의 아버지가 대변하는 이민족의 서러움만큼이나 디아스포라에 대한 한 운명을 잘 표현해주는 듯 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본 작품의 중심에는 항상 맛에 대한 기억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동하며 그때마다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서 바꿀 수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있다' 라는 가정일 뿐 무조건 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는 현재의 시스템과 문화를 구축시켜 왔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에피타이저 - 메인디시 - 디저트의 소제목으로서 <Touch of spice> 속 파니스의 기억들은 명확하게 나누어진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을 이전과 이어주며 사회적 차별의 시선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스탄불의 그것과 맥을 함게하게 해주는 것은 계피를 비롯한 여러 향신료 및 맛에 관한 소비적 태도이다.


이익추구를 우선시하는 경제적 논리 하에서 지역, 민족 간의 경계의 벽을 가장 쉽게 드나들 수 있기에 상업적 측면은 점점 보편화되며 세계화에 있어 담장 무너뜨리기의 대표적인 측면으로 부각되고 있다. 자신을 구성하는 소비패턴을 통해 정체성과 차별점을 둔다는 것. 그리고 이익집단의 정책에 따라 전 세계의 인류들이 비슷한 방식과 유사한 과정으로 이를 경험한다는 것. 얼핏 보면 한 가지 맥락으로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소비의 단면적 특징의 일부일 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또 다른 경우의 수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디아스포라 같이 자신의 뿌리 밖으로 소수인원들이 튕겨져 나갔을 경우 이와 같은 소비의 특성은 앞서 언급한 보편화의 대척점에서 자신들만의 특수한 문화를 유지해나가는 방어적 장치로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 전반에 이와 같은 특징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가장 확실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은 파니스의 삼촌과 그리스 약혼녀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피상적으로 대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그들은 조리법을 논하면서도 각자의 차이를 분명히 들어내고 있다. “우린 음식에 뭘 숨기지 않아 ! ” “시집 오려면 숨기는 법도 배우세요.” 그렇게 파니스 가족의 소비방식은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디아스포라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 비자발적이고 억압된 숙명적 상황.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계위치를 이용해 다양성으로서 인생을 살아내는 상황. 그리고 시대의 상황에 따라 모두를 묶기도, 각자를 묶기도 하는 소비패턴의 상반된 모습들. 본 영화 속에서는 위에 언급된 바들이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서 디아스포라와 사회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 의거해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입장에서는 역시나 파니스의 중년기에 더 많은 시선이 가게 되었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걷는 그의 주변부의 상황과 모습들을 보며 현재적 의미로서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몇몇 가지 눈에 띄는 사항들이 필름 너머의 현실 속 상상력을 자극해 주었다. 고향땅으로 돌아와 그들과 그리스어도 터키어도 아닌 영어로서 소통하는 파니스의 모습. 터키의 대학에서 별다른 제한 없이 교수직을 맡게 되는 모습. 수업시간을 통해 들은 선택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지닌 디아스포라의 모습들. 그들의 특성들이 분명하게 들어난 장면들이었지만 나는 영화 속에는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은 쓸쓸함이 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제 아무리 자신의 능력과 기회를 통해 억압적 상황을 탈피해 주체적으로 선택권을 지니게 된 이들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폭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뿌리에서 뽑혀진 이들의 의식과 정서 속에 남겨진 불안함과 공허함이 파니스의 표정 속에서 얼핏얼핏 느껴졌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점점 다양한 형태로서 확장될 것이다. 일년 후 내가 살고 있을 장소가 꼭 대한민국일 것 이라 장담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낳은 자식들이 결혼상대로 외국인을 데리고 올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화된 사회 속에서 언제든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직장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지금 그러한 곳에 살고 있다. 장과 단을 따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올바른 파악과 이해라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현재가 완성되기 까지 지나온 발자취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의 실수담과 무용담들. 짧은 강의와 한편의 영화였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고 정리해본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정체된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 앞으로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다름에 대한 편견적 우를 범하지 않도록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 같다. 파니스는 샤메이와 이스탄불의 거리를 거닐며 짧게 중얼거린다. ‘다들 달콤한 걸 들고 다녀...’ 많은 것들은 변하고 우리의 생각 또한 많은 그것들과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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