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규정함에 있어 막연한 답답함에 멍해져 버리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블랙 코미디/블랙 유머' 등의 개념을 스스로 확정지으려 할 때 종종 나타나곤 한다. 아르헨티나 영화 <Wild Tales>는 본연의 성과나 그 가치를 떠나, 흐릿했던 개념으로 인해 항상 신경쓰이던 손 끝 가시같은 체증을 시원하게 날려준 고마운 작품이다. 옴니버스 형식이기에 다양한 상황들을 나열하곤 있지만 극의 톤이나 표현방식은 일관된 측면이 있기에 2시간의 제약 내에서 블랙 코미디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허나 쓰디쓴 희극의 특정한 표정만은 원없이 전시하며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할 블랙 코미디 특유의 피곤한 즐거움을 충실히 제공하고 있으니 희극의 다양한 모습이 궁금한 사람들은 기회가 된다면 꼭 봤으면 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주 간단한 농담이라도 그 근원에는 두려움의 가시가 감춰져 있다. 예를 들어 "새똥 속에 든 흰 것이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면 방청객들은 그 순간 학교에서 시험이라도 보는양 바보 같은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것도 새똥이죠" 라는 답을 들으면 반사적인 두려움은 웃음으로 바뀐다. 그건 결국 시험이 아니었던 게다.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다. "소방관들은 왜 빨간 멜빵을 맬까요?" "조지 워싱턴은 왜 산비탈에 묻혔을까요?"


실제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 농담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블랙유머라 불렀다. 살다보면 삶은 때때로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위안을 생각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 부딪치기도 한다. 드레스덴 위로 폭탄이 쏟아질 때 우리는 지하실 천장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마치 대저택에 앉아 비 내리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는 공작부인처럼 "이런 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아무도 웃음을 터뜨리진 않았지만 그의 말은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 그의 말 덕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총알이 빠른 속도로 옆사람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어느 부위에 맞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하며 이리 저리 몸을 돌려본다. 그 우스운 모습에 살며시 조소가 흐른다. 자기 뒷통수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총알도 못보고 말이다. 그래도 남자는 앞사람 보다 몇 초 정도 더 행복했으니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닐 수도. <Wild Tales>와 커트 보네거트의 문장을 접한 후 막연히 떠오른 블랙 코미디의 이미지다.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님을 안다. 허나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우리가 건내받은 피곤한 웃음의 씨앗의 핵심은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언제 어디에서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불안한 가정에 있다. 멀리 떨어진 것이라 존재 조차 깨닫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은 내가 사는 이 땅 어디선가 나 혹은 당신의 발밑에 심어져 있다는 확률이며 종종 남들이 나를 그 씨앗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황당한 순간도 '0' 이 아닌 확률로서 세상에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 자체에선 생각할 거리가 많지 않은 영화였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고민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