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luence/Private'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6.12.15 2016 겨울 2
  2. 2016.11.08 한 장 1
  3. 2016.09.02 능력
  4. 2016.08.01 경험
  5. 2016.06.24 2016 - 1
  6. 2015.02.11 파트리크 쥐스킨트 - 깊이에의 강요
  7. 2015.01.03 버스정류장 4
  8. 2013.10.26
  9. 2013.08.12 DISCOGRAPHY 6
  10. 2013.06.26 평론가 매혈기 (김영진) 3

2016 겨울

2016. 12. 15. 21:21 from I​nfluence/Private




이른 아침 출근길. 환승할 역에서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건너편 거대한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고 때이른 환함에 아직 몸을 숨기지 못한 달이 신비로운 크기로 함께 하고있다. 추운 날씨에 두 손은 주머니 속에 따스히 담겨있지만 굳이 카메라를 켜서 사진 한 장을 찍어본다. 내가 본 압도감과는 전혀 다른 소박함에 기분이 상한다. 별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난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었다는 생각에 살짝은 마음이 든든해진다. 5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다시 난 몸을 웅크린 채 추위와 싸운다. 잠시 후 어느 버스가 멈춰선다. 이 시간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출근길의 바쁜 발걸음들이 이어진다. 그 사람 역시 시간에 쫓겨 바삐 버스에서 몸을 내린다. 잠시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하던 그 사람은 나와 같은 풍경에 눈이 멈춘다. 그 역시도 굳이 카메라를 꺼내 두 손을 추위 속에 담근다. 심지어 구도를 위해 이리저리 위치도 잡아보고 있다. 나보다 훨씬 열정이 넘치는 사람인가보다. 별 의미도 없을 그 사진을 찍어두곤 다시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걷는다. 비록 그 사람은 나의 존재 조차 모르겠지만 몇년이 지나서도 2016년의 겨울 풍경을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난 오늘의 이 일을 생각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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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2016. 11. 8. 12:35 from I​nfluence/Private







지금껏 보아온 영상매체의 모든 순간들을 통틀어 최후의 1초를 고르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 순간이다. 이 때의 이별은 BGM 의 얄팍함과 시점쇼트의 위대함을 동시에 일러준 최고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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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2016. 9. 2. 14:47 from I​nfluence/Private



진공의 시간이 있다. 가령 고속버스에 앉아 지루한 풍경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거나 이상할 정도로 느린 엘레비에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숨죽이며 서있는 순간들이 그렇다. 생각의 시작점은 모르겠으나 그럴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특별한 능력의 취사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해줄리 만무하지만 그냥 아무런 맥락없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해 본다. 언제나 일순위는 상대방이 듣고 있는 음악을 남몰래 청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큰 힘은 항시 책임감이 따르기에, 지나치게 큰 힘은 항시 완력이 감정적 측면의 사고에 우선하기에 부담스럽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하기에 난 상대의 음악을 스리슬쩍 나혼자만 엿들을 수 있는 능력을 원한다. 사람들에 대한 궁금즘이 많다. 어쩌면 이 따분한 사회구조속에서 평생 이렇게 지루하게 살다가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 혹 상대와 대화를 나누거나 인연을 꾸려가지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에 대한 사소한 취향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내 기준에 있어선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시민들로부터 어떠한 책임감도 양도받지 않을 부담없는 능력인 동시 음악이라는 위대한 예술을 바탕으로 상대를 추리해간다는 측면에서 정말이지 낭만적인 능력이다. 


이는 어찌보면 이기적이고 게으른 성향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취향과 기호를 바탕으로 인연을 선택한다. 일전에 특정부류의 인간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본적이 있다. 감정싸움의 성취에 굉장히 무디며 정서적으로 많은 것들을 일방향의 흡수로 일관하는 심심한 사람들에 관한 글이다. 자존감에 기반한 기싸움을 선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언제나 편한 태도로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주지만 남들보다 훨씬 낮은 지점에 있는 일정한 경계를 건드리는 순간 그 관계는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해가 간다. 이는 별다른 욕심이나 불안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저냥 살아가는 지독한 회의주의자들이 타인들의 눈에 긍정적인 인물로 비춰질 때 발생할 여지가 있다. 그러하기에 사람을 쉽게 사귀고 가볍게 다가가지만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들은 부담없지만 절대로 그 경계를 건드리지 않을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 같다. 


초인적인 능력에 관한 아무런 맥락없는 이 몽상은 결국 나 자신이 아무런 판단 없이 잡다한 사고들만 이런 저런 경험에 섞어 속절없이 띄워보내고 있는 지금의 오후와 닮아 있기에 그냥 멍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이러한 능력을 가진 지구인이 있다면 그건 김창완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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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2016. 8. 1. 11:58 from I​nfluence/Private


며칠 전 한강다리를 건넌 적이 있다. 평소라면 거닐 일이 없는 서강대교 위였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본 한강의 모습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밤섬의 존재였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다리 위를 걸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20대 초반 언제쯤 별다른 목적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 건넜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이 곳을 언젠가 걸어본 경험이 있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 당시 이해준 감독이 했던 상상을 못했던 걸까. 한강다리-투신-밤섬-표류. 너무도 명백하고도 매혹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현장에서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어릴적에는 항상 찰리 카우프만 식의 창조를 창의라 맹신했던 것 같지만 조금씩 다양한 환경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과 저마다의 가치에 수차례 놀람을 반복하다 보니 존재하는 것, 당연한 것 속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스토리텔링의 재능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최근 읽어 본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셸 퓌에슈가 쓴 '설명하다'였다. 설명이라는 동작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소통과정에서 설명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특정한 동사 내지 형용사 하나로 세상살이의 가치를 갈무리하는 모습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무작정 걷고 보고 들으며 성장해 온 내 20대를 모두 끝마치고 성인기의 한 단락을 전환하려는 현 시점에서 나만의 동작을 떠올려본다면 아마도 '경험하다'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인 것 같다. 대상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자극하는 모든 동기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일텐데 나는 지난 삶의 경험들을 차곡히 몸 속에 쌓아 느낌을 서강대교 위에서 밤섬을 내려다보며 어느정도 정리하게된 것 같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지' 에서 '어떻게 이 생각을 못할 수가 있었지'로 옮겨간 것이 20대의 모든 경험이 내게 건내준 소박한 의문문인 것 같다. 비단 이것은 창작과 창의에 관한 문제 뿐만이 아니다. 발단은 그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사회적, 일상적 분야에 있어서 나라는 사람이 신경쓰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점차 늘어가기만 하는 것을 느끼고 있기에 단순히 어느 한가지 요소에 매몰된 독자적 사고에서 벗어나 주변의 인과관계와 예외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 보다 성숙한 시각이 몸에 베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저만치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홀로 빛나는 무엇을 막연히 동경하기 보단 나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의 서로 다른 경험에 기반한 그들 각자의 이야기에 더욱 귀기울이게 되는 30대의 시작이다.   










Posted by Alan-Shore :

2016 - 1

2016. 6. 24. 16:08 from I​nfluence/Private








사당




















노량진














노량진

















노량진


















신촌












팔달문


















연무동






















천호



















창룡문




















연무동


















연무동
















망원시장















영등포















연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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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존재에 대해 손쉽게 단정지으며 타인의 그릇됨을 빈정거리듯 떠들어대는 일을 싫어한다. 직업적 숙명이 아닌한 형편없는 대상에게 가하는 최상의 반응은 무관심 정도라 여기며 그냥 지나치고 만다. 항상 마음에 걸리던 풍경과 소리들이 있다. 농담따먹기식의 무심한 한 줄이 누군가의 일상 곳곳을 오염시키는 모습, 비평이라는 단어의 본질조차 망각해버린 자기도취식의 무례함들. 비록 그것이 헛점이 존재하는 대상일지라도 이를 향한 우리 일반의 지레짐작과 단언은 선을 넘어버린듯 하다. 각종 TV 쇼를 통해 자신의 명성과 품위를 거래하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현 시점에서 많은 부분에 있어 혼동될 여지는 존재하지만, 그래도 요즘 사람들은 잠시라도 진지한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는 너무도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이기에 유사한 외형의 본질로 다가가는 과정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민이 가능할 것이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나'의 존재는 온전히 스스로의 사고만으로는, 결심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세상의 음성, 나의 존재를 세상의 일부로 완성시키는 그 음성,시선,기운에 대한 성찰. 그리고 누군가를 완성시켜야할 나의 생각 또한 조심스레 다듬어줄 성숙한 그 무엇. 대단할 것 없는 상식을 대하며, 심심한 몇 단락을 읽으며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된 하루였다.  



  


Posted by Alan-Shore :

버스정류장

2015. 1. 3. 01:17 from I​nfluence/Private





버스정류장을 서성이며 사람들을 구경하곤 한다. 나는 왜 거기에 서있는가. 일단 모두가 멈춰있기에 나와같은 심심한 구경꾼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긴하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모여있지만  가장 멍한 상태로 과정을 허비하는 장소. 그 곳을 들르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 중 아무런 목적이 없이 멈춰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 내 인생의 허비방식과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들 내가 무엇인가를 하며 타인들 속에 섞여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과 겉모습만 같을뿐, 나는 그냥 서있는 거다.  거기다가 그 곳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나 관여가 없다. 타인에 대한 경계가 이토록 적은 장소도 얼마 없으니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관과도 닮아 있는듯 하다. 그토록 몸을 가까이 함에도  불필요한 관심과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 아마도 이런 이유들로 인해 목적없이 그 곳을 서성이는 일이 좋은 것 같다.


가장 심심해보이는 장소지만 의외의 사건들도 벌어지곤 한다. 사람은 좋아하지만 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선 꽤나 큰 부담을 느끼는 나에겐 이 장소가 아주 특별하다. 언제나 나의 관심을 끄는건 모르는 사람의 사소한 행동과 첫 발화시점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시 일들이 벌어진다. 그 경중을 떠나 무엇인가가 일상적인 리듬을 깨고 각각에게 반응을 요하는 순간,  그 때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을 보는게 참 재미있다. 종종 자연스러운 핑계를 삼아 이야기를 걸어볼때도 있다. 들어볼 일 없는 상대의 어투와 음성을 듣는 것도 좋다. 행동과 말의 실체를 나의 짐작과 비교해보는 일도 흥미롭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렇게 잊혀진다. 누군가가 쉬는 시간에 아무 생각없이 핸드폰을 만지며 게임으로 순간을 허비하듯 나도 그냥 그렇게 지나보낸다. 몇번인가 특별하다 할만한 순간들도 있었다. 올 초에는 정류장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밥을 얻어먹고 버스까지 얻어 탄 적이 있었다. 정오 쯤 집을 나서서 수십개의 정류장을 지나치며 6,7 시간 정도를 걸은 날이었다. 너무 멀리왔기에 잔돈이나 빌려 버스비를 모아볼 생각에 말을 걸었던 것인데 놀라울 정도로 무력하고 힘겨운 하루를 보냈던 그 아주머니에게 내가 건 낸 사소한 부탁의 말은 일상의 반복적인 리듬에서 상당히 예외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여졌던것 같다. 이런게 좋다. 아마 자신의 자식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최근의 우울함을 과거의 화려함 속에 꽁꽁 감춰서 내 앞에 펼쳐놨었다. 버스 안까지 이어졌던 대화는 신비로웠다. 나는 몇정거장을 먼저 내려서 또다시 걸었다. 집 앞 정류장에 곧장 내려버리기엔 그 시간들의 여운이 아쉬웠다. 어릴때부터 느낀것이지만 일상의 구역이란게 무의식 속에 그려져있는 것 같다.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귀가길에서 도착이라는 느낌이 완성되는 구역이 존재하는 것 같다. 여하튼 그 일상의 시작점이 애매했기에 한참을 앞서서 내렸던것 같다. 수원과 용인을 잇는 드넓은 차도의 한 구석을 조용히 걸었다. 


오늘도 일이 있었다. 인적은 드물지만 시외버스와 시내버스가 교차하는 지점이기에 그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린 자리에서 곧장 다른 차에 올라타곤 한다. 유독 공허한 거리에서 그 정류장만이 북적이는 이유다. 그녀는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십여미터 앞에서 만취한 여성이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이내 인도위에 올라와 자빠졌고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류장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 하나 보고있었다. 잠시 후 몸을 가누기도 힘든 그녀는 차도로 나가 아무 차에나 대고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피로한 금요일의 퇴근길에 그녀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런 목적없이 서있었던 나 뿐이었다. 택시를 타려는 거냐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술이 사람을 먹으면 이런 발음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계속 차도로 진입하려는 그녀의 몸을 한팔로 잡아둔 채 택시를 기다렸다. 아프다. 아프다. 이내 큰 소리를 지른다. 난 앞만 바라보며 택시의 빨간 등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는 선 채로 잠을 청하는 듯 했다. 신기하게도 여성의 몸을 손으로 잡고있음에도 마치 쇳덩이를 쥐고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몸에 손이 닿아도 이보다는 복잡한 생각이 들듯했다. 아마도 그 순간 그녀와 나는 같은 시간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다. 나를 인지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누군가의 몸이 손에 닿는 느낌이 이처럼 무감각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오늘 밤의 시간에선 나라는 존재는 평생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서 전혀 기억되지 못함에도 무엇인가를 함께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천성적으로 타고나길 누군가를 도울때 기분이 좋다. 하지만 선의가 해석되는 순간이 기분나쁘기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신경쓰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억되지 않는 움직임을 통해 오늘 하루의 생각을 끝마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금방 택시는 나타났고 조수석에 쓰러지듯 앉아있는 그녀는 행선지를 묻는 나의 질문에  '광교' 라는 한마디를 남기곤 기사님과 함께 사라졌다. 찬 벽에 손바닥을 기대고있는 듯한 느낌을 줬던 그녀의 어깨가 앞으로 내 삶에  몇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난 오늘 하루도 역시 별 일 아닌 일에 의미를 떠올려보며 나이의 숫자 하나를 더해가고 있다. 새 해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남기는 이유는 나역시 잘 모르겠지만 올해는 무엇인가 많이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려 하기에 그 연습이자 다짐으로서 끄적였던것 같다. 물론 이런 류의 헛소리는 아니고. 보고 듣고 읽는 것들에 대해 짧은 반응이라도 해야지.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는 정말이지 대단한 표현이다.  김창완 아저씨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위에 이 표현까지 소중히 얹어서 인생을 회의적이고 즐겁게 살고 싶다. 


 

Posted by Alan-Shore :

2013. 10. 26. 12:12 from I​nfluence/Private






























생각날때 마다 적어야지 











Posted by Alan-Shore :

DISCOGRAPHY

2013. 8. 12. 03:32 from I​nfluence/Private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분명 기억은 난다.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도, 앨범 아트를 얼추 따라 그릴 수도, 언제 마주한 음악인지도 기억은 난다. 허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컴퓨터를 포맷해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대부분의 음악적 기억들은 추억만 남긴 상태로 내 곁을 떠나버린다. 음악을 발견하면 인물과 명칭에 관심을 쏟기 전에 마냥 소리에만 집중하는 탓에, 디지털 기록의 상실은 곧 내 머리속 포맷으로 연동된다. 엄청난 무게감으로 쏟아져 내리는 싱글들은 포기해야 한다. 그것까지 다 포착한다는 것은 과욕이며 무모한 짓이다. 최소한 전 트랙을 감상한 앨범이라면 그 존재 정도는 기억해야 하는게 맞는것 같다. 




앨범 커버를 누르면 유튜브 영상으로 링크가 되는, 뭐 그런 뻔하디 뻔한 구조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대부분은 음악일테고 몇몇 경우 뮤비도 연결된다.  








































Posted by Alan-Shore :





















영화가 점점 어른들의 매체가 아니라 아이들의 오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고통과 불행과 배려를 다루는 영화일 경우 때로 텔레비전의 SOS 프로그램처럼 관객의 감정을 착취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긴다. 거짓말 하지 않는 영화에만 흥미가 생긴다. 그게 중년의 가장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내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3,4번 정도 읽었던 책을 다시금 집어 봤다. 김영진의 <평론가 매혈기>는 사실 대단한 야심이나 거창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책은 아니다. 개인의 영화적 체험들을 키워드와 인물로 엮어 담담한 문체로 소개하고 있는 공간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개인으로서, 문화원 막내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해 몇십년간의 영화적 기억들을 성실히 관통하다 고다르의 존재감 앞에서 멈춰서서 마침표를 찍고있는 어느 평론가의 고백이자 매혈의 에세이다.


지극히 사적이고도 무던한 이 글들이 바로, 영화와 관련된 저서를 중 내가 가장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영화 서적들을 몇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학구적 접근, 주로 영화사나 장르적 탐구를 다루는 학술적 느낌이 강한 교재 정도랄까. 시나리오나 촬영을 비롯한 몇몇 세부 분야의 전문적 저서들도 이 곳에 포함될 것이다. 넓게 보면 특정 인물의 자서전이나 전기들도 포함될테고. 그리곤 영화를 중심부에 놓고 색다른 주제를 끌어와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여행, 미술, 음악, 인문, 철학에 관한 에세이들이 있다. 마지막으론 일기 내지 기록물의 형식으로 특별한 주제없이 영화와 개인의 우정과 사랑을 적어내린 리뷰-수필집들이 존재할 것이다. <평론가 매혈기>는 이 세번째 카테고리 내에서도 영화에 대한 애정의 순도가 가장 높은 책일 것이다. 이런류의 책들 중엔 짤막한 리뷰들의 단순한 모읍을 개인의 영화적 여정과 동일시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런 글들을 연이어 읽고 있자면 척추만 도려내진 느낌에 더해 산발적인 나열들을 보고있자면 현기증까지 나버릴 것만 같다. 또다른 한 측에 존재하는 거물급 평자의 숨이 막히는 사색과 재능없는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잡담이 가득한 글들을 보고있자면 냉온탕의 극단성에 도통 흥미를 붙이기가 힘들어진다.


애정의 순도. 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직업인으로서의 현실감과 영화와 삶을 동반해온 자의 환상이 공존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해진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서 매혈이란 강한 단어를 빌려온 것만 봐도 알수 있듯이 본 저서에서 김영진씨는 영화의 2선에서 현역들을 바라봐온 평자의 고민에 일정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절대적 비중은 크지 않지만 독립된 섹션과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사이 사이에 숨어있는 그의 글쟁이로서의 고민은 <평론가 매혈기>란 서사에 드라마를 부여해준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든다. (실제로 이 책은 예술-영화 섹션이 아닌 에세이-수필 코너에 가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특별히 극성맞은 표현들은 눈에 띄진 않아도 천천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진정성있는 애정의 순도가 어느샌가 나를 적신다.


평자로서의 열등감과 한계, 인생과 비슷한 무게로 커져만가는 영화의 존재. 이들을 양축에 적절한 비율로 나눠가며 그간 지켜봐온 이야기를을 들려준다. 경험으로서의 1 부. 감독열전으로 꾸며진 2부. 전자는 씨네필 문화의 어느 순간에 관한 포착으로, 후자는 띄엄 띄엄 깊게 파고드는 영화적 교양으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본다. 


김영진은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다. 필름 2.0 시절의 그의 글들은 왠지모를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확한 분석으로 공감을 이끄는 그의 수수한 재주에 홀딱 반했던 적이 있다. 무심한듯 툭툭 내뱉는 문장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방이라곤 찾아볼수 없는 매끈하고 탄력넘치는 팔뚝이 눈앞에서 묵묵히 근력운동을 해나가는 이미지가 떠올랐었다. 책속에서 밝히고 있듯이 김영진 평론가는 헤밍웨이의 문장을 '깨끗한 문장의 매력' 이란 제목을 달고 언급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불을 꺼보았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건 마치 조상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잠시 후에 나는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하고 비를 맞으면서 호텔로 걸어 돌아왔다.


' 비를 맞으면서 호텔로 걸어 돌아왔다.' 바로 이것이다. 헤밍웨이 소설의 매력은. 철이 들어 수 많은 문장가와 사상가의 책을 접하고 감동과 좌절을 거듭한 지금도, 나는 곧잘 낡은 헤밍웨이 소설책을 꺼내 몇 줄 읽는다. 깨끗한 문장의 매력은 그런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헤밍웨이에게서 받은 그 문장의 매력을, 난 김영진의 글로부터 느낄수 있다. 매체 특성상 기고를 위한 칼럼과 문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순 없겠지만, 정말이지 나는 김영진의 담백하고 논지를 흩트리지 않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평론가 매혈기> 속 이창동 감독을 다룬 부분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이창동 감독의 정체성을 깔끔하게 포장한 느낌이 든다.  



영화감독으로서 명성이 높아졌지만 명성의 진정성에 시큰둥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자신의 영화가 감동적이라고 누군가 말해도 그는 크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응대할 것이다. '눈물은 그저 생리적 작용일 뿐이에요. 그게 감동이라고 하면 감동이겠지만 영화관 밖에 나와 잊어버리는 눈물은 의미가 없어요' <오아시스>의 개봉을 앞두고 만났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관습적인 감동을 원하는 관객의 심장을 노리는 자객이었다.


그의 영화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위악적인 표현의 산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게 진지함의 열렬한 표현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고뇌와 좌절과 상실을 알아야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정공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창동의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차츰차츰 그의 예술가적 성숙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물로 나타날 것이다. 삶과 영화의 정직성을 등가로 놓는 그의 근본주의자로서의 태도는 관전자들을 늘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장력과 통찰력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는 평론가와 독자의 궁합이다. 세상의 모든 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기울일 수도 없다. 결국 중요한건 자신과 비슷한 취향과 사고를 지닌 대표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도 김영진 평론가는 신뢰가 가는 존재다. 러프컷을 연재할 당시 느낀 것인데, 특정 영화를 향한 과도한 찬사에 드는 소박한 반기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운의 소외작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응원에서 상당부분 본인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는 1선에서 활발하게 비평활동을 하며 별점을 던지는 입장이 아니기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시선의 평론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뿌듯한 구석이 있다. 





스크린 위의 노출을 보고 흥분하는 것보다 스크린에 모자이크로 가려진 것들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 더 위험하다. 스크린을 통해 느끼는 욕망은 근본적으로 결핍된 욕망이다. 나는 스크린 위의 여성을 욕망하지만 스크린 위의 여성은 나를 욕망하지 않는다. 스크린을 통한 동일시는 잠시 동안 백일몽에 젖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백일몽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면, 때로는 그 백일몽에서 우리가 벌건 대낮에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본다면, 스크린 바깥의 우리 삶은 더울 환해질 것이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스크린에서 관능을, 진실을 접할 기회를 주지 않는 억압된 문명이다. 문명이라는 가치 아래 금욕을 강제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나는 우리 사회에 좀더 많은 외설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더 세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풀어 헤치는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눈치 보지 않고 대부분의 장면이 전신 나체로 채워져 있는 그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인간의 나체를 보는걸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는, 왠지 불감증의 가련한 증세가 풍긴다. 그 불감증은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분간할줄 모르고 추한 것에서 진실을 볼줄 모르는 사회의 모든 고상한 척하는 도덕률이, 사실 권력의 우산 아래 조종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박물관 구석에 전시된 우아한 나체상보다는 밝은 대낮에 공공연히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나체를 보고 싶다. 아니, 그 전에 모자이크로 가리지 않은 온전한 나체를 스크린에서 보고 싶다. 




언제나 찬반론의 중심에서 찬사와 비난을 배불리 드시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열렬히 응원하는 일인으로서 금자씨에 대한 김영진의 호의는 왠지모르게 고마운 느낌이 든다. <친절한 금자씨> DVD 의 2 CD 코멘터리는 김영진 평론가가 홀로 등장해 금자씨의 미덕과 가치를 설명해주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들어봤으면 좋겠다. 






<올드보이>의 성공 이후에 대단한 화제 속에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윤리학의 복합성을 탐구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상당수 관객이 별로 이 영화의 주제에 만족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영화는 '천벌 받을 짓을 한 천하의 몹쓸 몸이라해도 그에게 복수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고 묻는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너무 인위적이며 절대적인 악에 대한 희생자들의 분노는 그 소시민들이 실은 우리와 다를게 없다는 감정 이입을 잠시 끌어내지만 결정적 상황에서 사람을 과연 어떻게 죽일 것이냐를 놓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 공포영화의 괴물 살인마처럼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조명에 비쳐진 그들은 막 현실을 떠난 유령같은 존재들로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는 우리가 누구나 악이라고 여기는 존재에 대해 섣불리 단죄도, 청산도, 용서도 하지 못한 이 시대의 불우를 스크린에 옮기고 있다. 그것은 백선생을 꼭 정치적 메타포로 읽어내지 않더라도,  여하튼 이 시대를 살며 뭔가 가위 눌린 답답함을 느끼는 우리의 체증에 대해 따듯한 위로 같은걸 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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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친절한 금자씨>의 도발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릴때마다 즐겁다. 관객을 들었다가 놨다 하는 박찬욱의 재능을 이 장면을 통해 느끼기 때문이다. 금자가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귀가한다. 골목에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다. 금자를 연모하는 연하의 남자가 금자를 따라 오며 가볍게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른다. 빨간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금자의 뒤에서 남자는 남일해의 흘러간 유행가 <빨간구두 아가씨>를 부른다. 공포영화 같은 불김함과 시적인 서정이 경쾌하게 결합된 이 장면의 톤은 언어화 할 수 없는 금자의 삶, 또 그녀와 비슷한 운명에 처한 이 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농담같은 것이다. 그녀는 걷는다. 눈 오는 길을, 구두소리를 내며, 뒤돌아 보지 않고 걷는다. 손에는 자신이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그녀는 그것을 그녀의 딸과 함께 먹을 것이다. 딸은 골목길에서 금자를 기다리고 있다. 두 모녀는 이윽고 만난다. 그리고 케이크를 먹는다. 그녀는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먹고 정화를 다짐할 것이다. 여전히 화면 배경에는 눈이 소복소복 내린다. 가느다랗게 희망 비슷한 여운을 남겨 놓고서.











저서와 동명의 타이틀을 단 평론가 매혈기 파트에서는 평생의 영화적 체험을 책 속에 차곡차곡 채워넣은 이 작업에 대한 소박한 주문을 적어넣고 있다.  김영진과 위화. 신기하리 만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위화란 작가도 다시금 떠올랐기에 오늘 도서관에 들려 그의 수필 한권을 빌려왔다. 천안문 사건의 6월 4일을 5월 35일로 부를 수 밖에 없는 그 땅 위에서 소신껏 던져보는 중국에 관한 보고서인듯 하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예술 관련 서적들만 보다 우연히 기분좋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 갔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으며 취향을 확장하는 일에 흥미가 점점 커진다. 다음은 또 어느 구멍으로 빠져들지. 여튼 마지막으로 김영진의 문장을 남기며 <평론가 매혈기>에 관한 짧은 기록을 끝내도록 하겠다. 





병에 걸려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들을 찾아가는 길에 중년의 허삼관은 아들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여러번 피를 판다. 그것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게 피를 판 극적인 경험이었다. 육체는 지쳐가고 있는데 생존은 더 절박해지는 것이다. 말년에 허삼관은 문득 자기 자신을 위해서 피를 팔고 싶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피를 판 돈으로 홍주와 볶은 돼지간을 먹고싶다는 생각에 병원을 갔다가 새파랗게 젊은 남자에게 조롱을 당한다. 허삼관의 늙은 피는 이미 죽은 피가 많이 섞여 있어서 가구 칠하는데나 쓸수 있을 거라고, 허삼관은 절망하지만 사실 그는 피를 팔 이유가 없다. 피를 팔지 않고도 홍주와 돼지간을 사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것이 힘들게 산 그의 인생에서 얻은 유일하고도 굉장한 보상이다.


영화를 보고 그 느낌과 감동을 글로 써서 먹고사는 평론가에게는 결국 영화가 남는 것이다. 좋아하고 지지했던 영화들이 담아낸 삶의 자취가 몸에 베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볶은 돼지간이나 홍주 보다는 몇 권의 책과 영화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