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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19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 아트 4
  2. 2012.03.03 영화 팜플렛 콜렉션 7
  3. 2012.02.18 더 웨이 (The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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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and Video art
 






1. 이야기를 시작하며...


조사를 진행해 나갈수록 애초의 발상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시물로서의 영상예술, 앞으로 주요하게 다루게 될 비디오(미디어)아트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과 몇 번의 우연한 만남만만을 상기하며 지레짐작식의 나태함으로 일관해온 내 스스로가 초래한 실수였다. 영상예술의 범위 내에 소속된 개별 요소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위치와 상호간 영향력의 관계에서 예술이란 공식석상의 끄트머리에 몸을 담그고 있는 (처음으로 숫자를 명받으며 그 후 나타난 8,9의 예술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는 7번째 늦둥이로서의) 영화의 존재를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초의 계획은 정지된 이미지에 생명을 부여해준 영화가,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아방가르드적 전복사고의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통해 혁명적 예술사고의 유연성을 가능케 해준 영화가,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통한 영상의 개인적 소유와의 교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도전정신과 만나 TV란 (부정적 늬앙스로서의) 매스 미디어를 향해 펼쳐온 극복과정의 결과물로서 걸어온 행보를 살펴보려는 것이었으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였으며 비디오(미디어)아트를 이해하는 단계에서 별 도움이 안 되는 초점 맞추기였다. (계속된 자료 조사를 통해 느낀 바지만)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이전 예술에 비해 보다 복합적인 결합물의 형태를 띄우고 있었다. 이 둘은 모든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폭발하는 지점에서 분명한 시작점을 획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물론이며, 도전적인 영화작가들의 영감과 정신을 저변에 깔고 현대미술,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플럭서스 운동 등의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유발된 영상의 용광로인 비디오(미디어)아트를 단순히 영화의 영향력에 얽매어 언급하는 건 본질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는 편협한 근시안적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 초 제출한 계획서에는 멜리에스로부터 촉발된 영상의 무한한 가능성이 숱한 기성극복의 사상과 도전적인 표현기법의 흐름과 만나 60년대 비디오 아트의 탄생까지, 그에 미친 영향력과 이 후 실험/언더그라운드 무비 등의 인상적 순간들을 회고하며 비디오 아트(미디어 아트)의 영상적 실험정신에 비견할만한 현대 영화작가들의 오늘 까지를 알아보고자 했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영화와 영상예술이란 구색을 위해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몇몇 비디오(미디어)아트 작품을 덧붙이고자 했었다.


목차는 완전히 뒤집어 졌다. 물론 여전히 이곳의 타이틀은 <영화와 영상예술>이다. 하나의 중심챕터를 이루던 영화 속의 실험적 표현은,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영화를 활용하는 이유 그리고 내 스스로 본 주제를 선정한 ‘왜 영화일까?’의 서문에서 그 발자국만 남겨놓고 과감히 삭제하고자 한다. 애초의 논지는 현대 미술관 곳곳에 베여있는 발전적인 실험정신과 그 반복의 과정에서 피어날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가능성의 교훈을 점점 망각해가고 있는 현대의 영화적 흐름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자 하였다. 과거에는 분명히 예술적 가치발산의 장이기도 했던 영화란 영역이 어쩜 이리도 다양성 소실에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상업성 핑계에만 매달려있는지, 그리고 관객들은 어찌 충돌과 실험의 역사가 현재 우리가 누리는 보편성의 씨앗임을 망각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무감각히 스스로의 활동반경을 좁혀나가는지 스스로 묻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가 예술내지 문화를 대면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디오(미디어) 아트에 대한 접근과정에서 보다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아트 작업과 영화 본연의 구조에 대한 탐색을 위해 공간성과 상호작용을 몸소 경험하는 실험적인 비디오 설치 작품들이었다. 영화의 장면을 차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은 ‘피쳐링 시네마(작년에 국내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사용한 명칭이나 외국에서도 이와 같이 명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사와 시간경과란 영화적 특성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창의적으로 충돌시키면서 지독한 익숙함을 이용해 기시감의 역발상을 유발하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고정적이며 한정적인 영화 관람의 범위가 암실을 벗어나 개개인의 소유에 까지 미치는 과정과 함께 비디오(미디어)아트의 시야확대가 이뤄지며 점차 그 수가 증가해 오고 있다. 단순히 편집을 이용해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에서부터 사운드와 공간을 활용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때때론 오마주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직접 세트를 짓고 새롭게 촬영을 하는 방식에 이르기 까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당 초 2,3 작품의 간략한 소개로 마치려했던 이 분야가 새로운 핵심 주제로서 부상하게 된 것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 창작물속에 내재된 잠재력에 대한 관심과 흥미 때문이다. 잠재력이란 표현은 본 분야가 내재한 힘과 영향력에 대한 기대이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이에 대한 관심 내지 시도가 여타 다른 장르에 비해 폭이 넓지 않으며, 더욱이나 현 한국예술계에선 그 시도가 미미한 수준이기에 끌어온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도록 하고, 아무런 존재이유 없이 자질구레 길기만 한 지금까지의 주제변경의 변은 앞으로 진행될 구성에 대한 보고를 끝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왜 영화인가’ 라는 선언이 아니라 ‘왜 영화일까?’ 라는 자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어찌하여 숱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영역에서도 이다지도 자그마한 공간에 깃발을 꽂았는지, 그리고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가들은 어찌하여 창작적인 촬영물이 아닌 참조의 방식으로서 남의 이야기를 빌어 작품을 구성했을지, 나름의 생각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반부는 영화를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들에겐 족보랄 것이 없어 깔끔히 구분 지을 울타리가 마땅치 않았다. 다소 자의적이고 산발적으로 이야기가 진행 될 것 같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된 부분과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스스로 정리해보며 앞으로 다가올 ‘파운드 푸티지’ 기반 혹은 영화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업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왜 영화일까?


서로 간 봉합의 흔적마저 서서히 옅어져가는 현 예술계의 동향을 생각해본다. 지금 나의 시각에서는 양자 간 선후 관계나 영향력에 대한 이론적 서술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거니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부분이다. 고집스레 영화가 내려준 영상으로서의 단초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속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본 주제에 해당되는 비디오(미디어)아트 작품에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존재 가치를 통해 이유와 효과와 교훈을 깨닫고자 한다. 순전히 아마추어적인 입장에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나는 영화가 좋다. 그러하기에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이야기하면서도 애써 영화를 끌어당기는 것 이다. 통상적 흐름을 파괴하며 반서사의 기지아래 극단의 위치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영화 기반 비디오(미디어)아트 작업은 영화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불투명한 거울과 같다고 생각한다. 흐리고 뭉그러진 모습으로 자신을 비춰주지만 그 속의 본질은 분명 자기임을 인지하게 하기에, 스스로를 자세히 보려 애쓰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면 일상에선 깨닫지 못한 새로운 교훈을 자각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고 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영화의 이름앞에 불투명한 거울이 되어 발전적 방향으로 교훈을 제시한다고 보진 않는다. 단순히 영화 이미지를 차용할 뿐 온전히 비디오(미디어)아트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미적 심상을 고취시키는 선에서 끝나버리는 작품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The maybe...


지금부터 영화가 선택된 이유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의 이미지는 1995년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 전시됐던 코넬리아 파커의 <어쩌면>이란 작품을 찍은 사진이다. 유리관 안에서 한 여인이 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날 저 상태로 8시간을 잤다.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튀어 오른 것은 이 이미지였다. 이 작품이 내 뇌리에 정확히 박혀있을 수 있던 이유는 평온히 잠을 청하고 있는 저 여인의 이름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틸다 스윈튼. 하지만 단순히 그녀가 유명한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이라는 작품에 대한 강력한 각인효과가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영화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진한 인상을 심어주는 측면은 존재하겠지만 이는 단순 해프닝으로서의 구경거리를 넘어 그 저변에 깔린, 영화라는 존재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영향에 대한 견고함을 상기시켜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가 복잡히 얽힌 집중력. 작품 속에 영화가 개입하는 순간 관람객의 사고는 단순히 작가의 메시지 내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우리와 일생을 함께하며 모든 감각과 숱한 감정의 기억을 공유해온 영화란 존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직면한 대상에 대한 경험적 환기를 통해 개인적인 다양한 사고와 작가의 주제 표현을 뒤섞어 작품의 감동을 획득한다. 이러한 작용은 비단 영화 뿐 아니라 대부분의 매체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2002년 오마 페스트가 만든 <CNN Concatenated>를 떠올려보자. CNN의 아나운서와 캐스터들의 한 음절씩을 차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 이 작품에서 설파하는 표면적 단어의 나열은 굉장한 영향력을 지닌다. 이는 대중의 수용방식에 대한 비판인 동시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상기 시켜준다.


CNN Concatenated 


이러한 차용은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들어나게 해주는 친대중적 몰입도를 획득한다. 우리는 영화를 기반으로 완성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창작물을 대면하며 각자의 기억과 감각을 안고 완성된 이야기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 이다. 가장 쉽게 표현해 자신이 감상한 영화가 미술관 한켠에서 영사가 되고 있다. 그는 편견과 기대를 품고 호기심어린 발걸음을 떼게 될 것 이다. 우리의 삶 전반에 세포처럼 내제화 되어있는 영화라는 이름의 기억이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의 실험적인 표현과 주제전달의 좋은 미끼가 되어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대척점의 매력 또한 발생된다. 확신과 기억을 안고 다가선 관객에게 작가들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파괴의 미학으로서 영화에게 가학을 행한다. 관객의 망막에 닿는 이미지는 이미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에 혼란이 초래된다. 파괴의 미학인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품들이 선사하는 세계는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관을 초토화 시킨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동시적으로 활용하여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친대중적 몰입도와 함께 동시발생적으로 이는 양가적 감정으로서의 역기시감을 한데 섞어 환각적 배경을 구축하며 친숙한 초대와 붕괴적 선언을 이용해 강력한 파급력을 발생 시킨다.


The era of cinema


다음으론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옆에 제시된 작품은 21 미터 길이의 설치 비디오로 1890년대부터(정확히 1896년의 멜리에스의 영화) 현재까지의 작품을 시대사 별로 차례차례 이어붙이며 순차적으로 피사체를 움직인 <The era of cinema>이다. 중심인물이 시대를 통해 좌에서 우로 움직일 때 마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그를 좇는다. 이러한 행동적 유도는 영상으로서의 영화가 지닌 역사성과 대표성 그리고 시적영역에 있어서 영화가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위치를 말해준다. 각자의 영상 아래는 년도가 표기된다. 영화는 시적 구분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친숙히 설명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영상과 이미지를 보며 시간을 상기하고 구분한다. 매해 영화는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을 탄생시킨다. 단순한 스타의 표상이 됐건 작품적 경탄이 됐건, 영화는 우리의 옆에서 대표적 영상매체로서의 기억을 공유한다.


기록되어 영사되고 투영되는 방식은 어떻게든 시간성을 가지게 된다. 비디오(미디어)아트와 영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시간성’이란 숙명을 지닌다. 이러한 공통특성은 본 장르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 ‘시간’이란 주제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영화를 참조하는 이유는 시간을 품고 있는 방식에 있어 상호간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적 제약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화는 서사라는 틀을 배경삼아 고유의 영역 내지 특징으로서 이를 소유하며 직선적으로 시간을 표현한다. 이에 비해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의식적으로 서사를 회피하는 과정에서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며 순환적인 시간을 선택하며 동시성과 즉시성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른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의 대 시간 개념은 비디오(미디어)아트로 하여금 판이한 시간적 배경을 옮겨와 영화를 새롭게 정의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변환의 흥미를 느끼게끔 해주는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작품의 대부분은 시간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직선적 시간성과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파편적이고 순환적인 즉시적 시간성을 동시에 활용하며, 그 어느 소재보다 시간의 개념을 폭 넓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기에 많은 작가들이 영화를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마디로 영화를 활용한 비디오 (미디어)아트는 시간개념 활용에 유리한 뛰어난 시적 활용처라는 뜻이다.



Sync 연작


이미지는 언어에 종속되기에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영화는 언어를 탐하고 통상의 비디오(미디어)아트는 분명한 서사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발생한 차이이다. 하지만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영상영역에서 영화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영화 자체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란성 쌍둥이 같이 비슷한 유전자와 제각각의 외모를 지녔다. 언어를 탐하고 서사를 회피한다는 건 두 개의 영역이 차별성을 지니는 동시에 언어와 이야기란 경계선을 중심으로 서로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디오(미디어)아트는 결국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정된 서사의 파괴와 이미지 반복, 시간적 왜곡, 거울 이미지 등을 통해 표현된다.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는 숙명적 관계로서, 그 존재 자체가 서로에 대한 반사이며 반영이기에 작가들은 영화를 차용하며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분신에게 영상예술로서의 새로운 고민과 표현의 확장 단초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24 hr Psycho (iphoto re edit)


마지막으론 현 시점에서 영화의 이미지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유된 자원임을 강조하고 싶다. 창작에 있어 소통의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하고 절실해진 현 세대에서 창작품을 만드는 일은 단지 기성 작가의 고리타분한 업무가 아니다. 손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자. 더글라스 고든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의 초당 프레임 수를 조정해 아주 느린 속도로 영화를 재생하며 무려 24시간 동안 영화가 진행되도록 만든다. <24시간 싸이코>는 시간경험의 독특한 예를 보여주며 많은 관람객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 후 유튜브를 통해 많은 오마주격의 영상들이 올라오게 됐다. 그중에는 <24초 싸이코>와같이 시간개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데스크탑의 슬라이드쇼를 사용해 상반된 느낌의 음악과 자신만의 영상효과를 가미하며 전혀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 냈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현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소통과 참여의 장에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작업이 내제하고 있는 공유된 자원의 특성이 잘 어울림을 알려주는 경우라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영화란 매체 자체가 가진 친대중적 몰입도와 비디오 아트 특유의 파괴적 형식이 결합해 관람객의 기억과 감각을 쉽게 끌어당긴 후 전혀 새로운 지점으로 유인해 강렬한 주제의식을 전달 해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 상반된 시간적 속성의 경계를 오가며 여타의 비디오(미디어)아트 소재보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간에 대한 사고를 진지하고 효율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본 작업은 영화매체 그 자체에 대한 은유적인 집중으로서 반 영화적인 해체 작업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는 자기 지시성 내지 자기 반영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공유된 열린 자원으로서의 영화 이미지는 수많은 상호작용과 파급력을 이끌어 낼 수 있기에, 개인에게 기술적 도구가 충분히 지원 가능한 현 시대의 흐름에서 즐겁고 흥미로운 공유의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의미의 예술적 확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위의 4가지 주요 사유뿐 아니라 일상에 박힌 숱한 조각들을 임의로 골라 이쁘게 찢고 오려붙여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본 작업에 어찌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재밌는 일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이다. 본격적으로 작가들을 소개하기 전에 본 작업의 선조격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우선하고 싶다.



looking for alfred


3. 파운드 푸티지 필름


영상 창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과 궁리를 연속하고 있는 이 땅의 작가들의 사고 한켠에는 분명히 선대의 영화작가들이 호기심의 이름으로서 힘껏 끌어당겨온 경이로운 표현의 발견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파운드 푸티지’를 기반으로 영화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려는 작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빛과 암실, 그리고 작가와 관객의 관계를 통해 빛의 예술이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심상은 어떤 것일지 골똘히 몸소 실천해보는 여타의 작가들의 활동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탄생한 지도 벌써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구조적으로나 시대상으로나 영화시장의 영역 내에서 예전과 같은 도전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예외적 대우를 받는 극소수의 영화작가가 아니라면 영상언어로서 참신한 운을 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직관적인 투명성을 내포한 표현적 측면의 예술로서 영화를 반가이 맞아주지 않는 시대이지만 그간 영화가 남겨온 족적을 매만지며 영상예술로서의 영화를 고민하고 계승하고자하는 작가들이 근접 분야에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곳에선 본격적으로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를 소개하기에 앞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예술 창작물들의 실질적인 선례를 짚고 넘어가보고자 한다. 이는 특정 장르를 파생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지점에서 묵묵히 흘러온 여러 영향력들이 어느 우연한 시점에서 만나 한데 뭉쳐져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게 되는 오딧세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 장르의 직접적인 선조격인, 바로 윗세대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에 대한 이야기다.


1895년 영화는 열차와 함께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후 멜리에스는 카메라의 일시적인 고장을 계기로 수많은 영화적 표현 기법의 힌트를 얻게 된다. 초창기 작가들은 표현의 다양화를 위해 몽타주, 서사, 장치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진행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 중에서도 본 장에서는 영화 내 시간과 공간을 구축하고 합성하는 몽타주 기법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부분을 조립한다는 의미의 몽타주는 필름의 단편을 조립해 영화적인 시공간을 창조하여 작품 내 현실을 구축하는 방식인데, 1920년대 소비에트에서 활발히 이론화된 본 기법이야 말로 영화의 조작과 변형을 기반으로 하는 ‘파운드 푸티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숙지해야할 개념이다. 파괴의 미학이라는 ‘파운드 푸티지’ 영상작업은 필름과 필름을 이어 서사와 공간의 구축하는 몽타주와 비교해 그 의도성만 다를 뿐 기본적 존재원리는 상당히 유사하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 은 영화가 탄생한 후 고작 7년 만에 첫 명함을 내밀게 된다. 지난 수업시간에 감상했던 에드윈 S. 포터의 1902년 작 <어느 미국인 소방수의 생애>는 최초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에디슨의 회사에서 일하던 포터는 어느 날 영화 저장소에서 자료를 찾다 소방서에서 찍은 다양한 촬영물을 본 후 영감을 얻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이 후 소련에서는 혁명 직 후 에스퍼 I. 슈브가 헌 필름 (Cast off film)을 이용해 1927년에 <레마노프왕조의 몰락>과 <위대한 길> 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 작품들은 초기의 대표적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흐름은 이어진다. 초현실주의 미술가 조셉 코넬은 파운드로 달아 판매하는 ‘헌’ 영화를 수집하여 20여개의 실험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대표작으로는 1936년에 제작된 <로즈 호바트>가 있는데 이는 로즈 호바트라는 여배우가 1931년작인 <보르네오의 동쪽>에서 출연한 장면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코넬은 그녀가 나오지 않는 장면과 액션장면에 삭제 및 재편집 등을 거쳤으며, 여기에 과학영화 등을 삽입하며 이야기의 연속성을 해체하였다. 19분 짜리 헐리웃 산 실험영화는 16프레임이라는 느린 속도와 다크 블루 필터의 사용, 삼바음악의 차용 등으로 전에 없던 독특한 의미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새 기준을 제시하게 된다. 1958년 브루스 코너가 연출한 <영화>라는 작품에서는 뉴스 릴과 과학영화, 포르노, 릴 필름 등을 앗상블라주 기법을 활용해 통합하며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한 차원 발전시키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켄 제이콥스의 1985년작 <퍼펙트 필름>과 레즐리 손튼의 1997년작 <올드 월디> 등의 대표작들이 주목을 끌으며 현대까지 그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는 스테파니 바버와 같은 작가가 가장 큰 주목을 끌고 있다.



Rose hobart (re edit)


전혜숙 교수는 대부분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들이 어떤 파운드 푸티지를 근거로 했는가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파운드 푸티지 필름’ 방식자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영화>와 <로즈 호바트>를 예로 들며 이들 작품은 자신 스스로가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되어있음을 애써 강조하며 영화의 구조 자체를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영 화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역설적인 작업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 특유의 혼란스럽고 낯선 지각적 교란은 비디오(미디어)아트 장르의 특성과 닮아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작업방식은 훗날 많은 비디오(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작을 통해 어떤 서사적 변화가 발생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조작되었는가에 집중하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작가들의 작업방식은 그대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예술 창작 작가들에게도 이어졌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매체인 영화를 해체하며 그가 지닌 조작의 힘과 리얼리티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4. 영화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가들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현대미술 관련 서적과 film, movie, cinema, found footage, video art, media art 등의 키워드를 조합해 닿을 수 있는 모든 웹페이지를 뒤져본 결과 총 21인의 작가가 만든 38편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영화 이미지를 토대로 새로운 재해석을 가한 작품이 30편이였고, 특정한 씬을 리메이크 하거나 영화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 작품은 8편이였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마르코 브람빌라 - Civilization, Evolution , Sync, Sync watch, Sync fight, Ritual compositon No.1, Flash back

피에르 위그 - Dubbing, Remake, The third memory, L'ellipse

더글라스 고든 - Through a looking glass, Deja vu, 24hr psycho

칸디스 브라이츠 - Soliloquy trilogy

크리스찬 마클레이 - Video quartet, Watch, Telephone

제니퍼 & 케빈 맥코이 - Horror chase, The kiss, Traffic series, Learning from las vegas

마이클 호아퀸 그레이 - The blink

요한 그리몽프로 - Looking for hitchcock, Double take

브루스 코너 - Cosmic ray

크리스토프 지라르데 & 마티아스 뮐러 - kristall

임민욱 - 희생

노재운 - God4saken

트레이시 모펫 - Mother

올리버 피에치 - The shape of things

Cinezoique - The era of cinema

안소니 맥콜 - Line describing a corn

구스타프 도이치 - a girl and a girl

벤 러셀 - The black and the white gods

자넷 카디프 & 조지 브루스 밀러 - The paradise institute

아이작 줄리언 - Ten thousand waves


직접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조사할 수 없는 주제이기에 위의 목록에 올라온 작품 중 12편 가량은 간단한 설명과 함께 몇몇 이미지만을 보는 수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26편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 올려놓은 영상을 보거나 관람객들이 어설프게 촬영한 짧은 기록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가 의도한 공간속으론 참여하지 못한 채 방한구석에서 상상을 가미해 써내려간 반쪽짜리 경험이지만 그간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작품들의 구성을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추후삽입 – 투명성이란 표현을 좋아한다. 철저한 비전문가로서 수잔 손택이 강력히 주장해온 예술 감상에 있어서의 직관적 투명성을 다년간 믿어오고 실천해온 사람으로서 각각의 작품에서 예리하게 의미와 장점을 추출해 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엉터리로 끼워맞춘 부분도 있으며 비평가의 생각에 기댄 부분 상당수 있다. 4장의 보고는 작품의 작동원리와 대략적인 지향점 정도에 초점을 맞춰 주시길 바란다.]


이번 주제선정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선사한 작가 마르코 브람빌라의 작품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전 미디어 아티스트 7인이 모여 만든 실험영화 <제한해제>를 국내의 한 영화제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7편의 작품 속에서도 유난히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본 작가가 연출한 1,2분 분량의 아주 짧은 단편 <Sync> 였다. 이는 남녀가 만나 성행위를 하는 순간을 영화와 각종 영상물에서 추출한 후 이를 이미지 단위로 뽑아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어지도록 배열하며 숨 쉴 틈 없는 드럼 비트 아래에 깔아놓은 작품이었다. 


마르코 브람빌라는 <Sync>에 대응하는 반응물로 <Sync fight> 와 <Sync watch> 등의 작품을 만드는데 전자는 각종 영화 속 폭력적인 싸움 장면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각각 별도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토록 하였으며, 후자는 성행위와 폭력적인 싸움 장면에 맞춰 극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며 감동하고 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시각이 겨우 쫓을 만한 빠른 조각들의 연결로서 보여주고 있다.


Sync

Sync watch

전시회에서는 3개의 스크린을 설치하여 정신없이 쏟아지는 성과 폭력의 이미지들을 영화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관람하게 만들고 있다. 짧은 순간을 구성하기위해 수백편의 이미지들을 범람시키는 본 작품은 영상 속 움직임의 구성 원리를 새삼 느끼게끔 하는 동시 우스꽝스러운 관계형성을 통해 매체 자체에 대한 비판을 동반한다.



Flashback


Ritual composition No.1


Cvilization Evolution


Evolution



브람빌라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잘게 쪼개진 조각들이 이루는 큰 그림의 활력 넘치는 전달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Flash back>과 <RItual composition NO.1>의 경우 <Sync> 연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화면 속에 유사 속성의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배열하며 활동적인 이미지의 분절되고 연결되는 효과를 통해 각각의 주제를 잘 이야기 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브람빌라는 거대한 세계를 구성해 상징성을 지닌 이미지의 차용을 통해 주제를 전하기도 한다. <Civilization> 과 <Evolution>의 경우가 그러하다. 본 작품들은 종과 횡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미지를 연속하며 거대한 세계관을 이룬다. 문명과 진화의 타이틀에 적합한 수백편의 영화 속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하나의 웅장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지금껏 감상한 모든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본 작품들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지니게 된 상식과 기억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거대한 인공세계를 구축한다. 비디오(미디어) 아트 장르 뿐 아니라 영화와 뮤직비디오 장르에서도 활동하는 작가이며 아무래도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는 작가이다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상 싸이트에 공유되고 있어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24hr Psycho


다음으론 시간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 더글라스 고든에 대한 소개이다. 앞서 간략히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대표작인 <24hr psycho>는 극한의 슬로우 모션 기법을 사용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유례없는 시간적 경험을 경험토록 유도한다. 영화 <싸이코>의 유명한 욕실 살해 시퀀스는 본 작품에서 1시간 가량 지속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대면하면서 끊임없 이 기억과 또 다른 사고와 마주한다. 이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특유의 파괴적인 형식 실험인 동시에 현대적 의미의 지나친 쾌락의주적 편집에 대한 반발이며, 영화적 경험을 매개로 관람객에게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묻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더글라스 고든은 <Deja vu> 를 통해 헐리웃 스릴러 영화 <D.O.A>를 세 개의 스크린에 재생시키며 각각 초당 25,24,23 프레임의 설정으로서 살짝 씩 어긋나게 배치한다. 연속된 세 개의 이미지는 소량의 시간차로 조금씩의 차이를 보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환상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Through a looking glass


뿐만 아니라 <Through a looking glass> 라는 작품을 통해선 더욱 적극적으로 관람객들을 기억의 장소로 초대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한 장면인, 트래비스가 거울을 보며 읊는 "You talkin' to me?" 라는 대사를 듀얼 스크린을 이용해 각각 반대쪽 스크린에 재생 시킨다. 주인공이 내뱉는 이야기를 동일한 스크린에 펼쳐내며 관객을 그 속으로 밀어 넣는다. <24hr psycho>가 영화를 통해 시간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제시해본 실험이었다면 <Deja vu> 와 <Through a looking glass>는 영화적 경험을 기반으로 관람객의 기억과 감각을 향해 던지는 환상적인 체험이라 생각한다. 더글라스 고든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가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이다.


 

Taxi driver scene


피에르 위그는 보다 실험적인 방법으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엮어 낸다. 그는 <Dubbing>, <Remake>, <The third memory>, <L'ELLIPSE> 등의 작품을 통해 영화적 경험에 대한 실험을 수행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The third memory>를 통해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소유한 기억에 대한 궁금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작품은 영화와 현실을 왕복하며 우리에게 제시된 기억을 정리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1972년 존 요토비치는 애인의 성전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브루클린에서 은행강도를 감행한 다. 이후 그 이야기는 3년의 시간이 흘러 시드니 루멧 감독에 의해 <뜨거운 오후>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다. 피에르 위그는 실화와 영화의 1번째, 2번째 기억을 지나 출 소를 한 당시의 강도를 직접 데려와 같은 장소에서 3번째 기억을 이야기 하도록 한다. 2 개의 스크린을 이용해 좌측에는 알파치노가 분한 2번째 기억이 우측에는 실제 범인이 진술하는 3번째 기억이 동일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영화란 매체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진실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인 동시에 인간의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The third memory


우리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음을 듣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상당부분이 알 파치노의 애드립으로 촬영되었으며, 14시간의 서사는 124분으로 압축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많은 부분이 씻겨간 3번째 기억에 완전히 의지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며 무엇이 진실이며, 우리가 매체를 통해 진실을 전달받는 과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는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스꽝 스럽다. 결국 존 요토비치는 영화의 저작권을 통해 애인의 수술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외의 작품에서도 위그는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의 상이한 차원들을 구별 짓곤 한다.


<Dubbing>의 경우는 영화를 더빙하는 15인의 배우와 그들이 읊는 스크립트만을 보여주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영화란 경험이 단지 보는 행위만이 아님을 인지시켜주며, 97년에 제작한 <아틀란티크>의 경우는 하나의 영화를 서로 다른 캐스팅을 통해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작업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작업은 아니지만, 영화의 본질과 다양한 형태에 대한 질문으로서 그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Remake>는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이창>을 아마추어 배우를 대상으로 재연시키며 영화와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는 작품이다. 이는 현실의 인물을 스크린의 영화인물로 재현한 과정을 다시 재도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벽을 넘나들도록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L'ELLIPSE> 는 생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은 영화 속에서 무심코 흘러간 순간과 순간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작업이다. 빔 벤더스의 77년작 <미국인 친구>에서 배우 부르노 간즈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 생략되어 버린 갭을 20년이 흘러 동일한 배우를 불러와 같은 장소에서 기억을 회기 시킨다. 그의 작업은 이 처럼 영화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매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 대한 자기 반영적 사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위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히치콕의 영화를 예로 들며 자신이 그의 영화를 선택한 것은 수용적 차원의 문제라 말하였다. 즉 누구나 알고 있기에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매개적 성격. 그의 인터뷰를 통해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가들의 소재 선정에 대한 나의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Video quartet 


다음으론 가장 방대한 분량의 편집 작업을 통해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작가 크리스찬 마클레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파운드 푸티지’ 작업은 어마어마한 양을 다루고 있다. <텔레폰> <비디오 4중주> <시계>등의 작품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영화의 이미지를 편집해 영상적 흐름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소리이다. 그의 작업의 주안점은 ‘과연 보는 것을 들을 수 없는 것인가?’ 이다. 작가는 헐리웃의 영화를 기반으로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소재 선정은 역시 관람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3작품 모두 소리를 중심에 두고 각각의 화면을 연결 짓고 있다. 



Telephones


일단 <텔레폰>의 경우는 음성을 매체로 한 소통도구인 전 화기를 이용해 수많은 배우들이 서로 전화를 받고 끊는 행위를 반복하게 한다. ‘파운드 푸티지’ 작업에 있어 초기작에 해당하는 본 작품은 상호작용과 음성의 연결이라는 측면을 활용해 비교적 단순하게 이뤄진 작업이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작품은 보다 풍성해졌고 그 구성도 상당한 수준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디오 4중주>의 경우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와 영상의 실험인데, 각각 3m, 총 12m인 4개의 스크린을 이용해 17분 길이의 음악을 완성하였다. 각각의 영화 이미지를 차용해 소리를 중첩시키고 어긋나가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전반적인 흐름의 맥이 존재하고 있으며 불협화음과 우연적인 소리의 완성에 있어 기묘한 하모니를 완성시킨다. 특히 700여편의 작품을 이어붙인 실험이기에 그 압도감이 상당하다.



The clock


한발 더 나아가 마클레이는 4000여편 이상의 영화를 편집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시계>라는 작품으로서, 작품의 총 길이는 24시간이다. 헐리웃의 영화의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만을 뽑아 째깍 거리는 시계의 음성적 흐름에 맞춰 이미지를 따라가게 만든다. 미술관이 문을 닫은 후에도 마클레이의 시계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어느 미술관에서는 새벽까지 전시를 연속한 적이 있었는데 본 작품의 많은 시간대 중에서도 특히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의 편집은 굉장한 시각적 쾌락을 선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마클레이는 소리라는 중심 축을 따라 이미지를 겹겹이 쌓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그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며 단순히 응시만으로 일관하던 관람객들을 점차 자신의 세계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은 맥락없이 단절된 그의 영상을 무감각하게 만나게 되더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실체 앞에서 감탄과 경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위에 소개한 4인은 현재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작업에 있어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작가들이다. 앞으로 소개할 작가들은 대부분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하며 산발적으로 이와 같은 형식을 차용하는 이들이다. 켄다이스 브리츠의 <Soliloquy trilogy>는 헐리웃의 유명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잭 니콜슨, 샤론 스톤이 각각 <더티 해리> <이스트윅의 마녀들> <원초적 본능>에 나왔던 장면을 토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을 모두 날려버린 작업이다. 브리츠는 이 작업을 통해서 그들의 독백을 이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한다. 작가는 극단의 방식을 택하는데 주인공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만약 화면에 타인의 얼굴이 나오는 경우에는 아예 암전시키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철저한 독백의 연속에서 편집을 통한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을 시도하고 있다. 샤론 스톤과 이스트우드의 작품은 7분여이고 잭 니콜슨의 작품은 14분에 이른다. 이러한 과감한 생략을 통해 새로움을 뽑아내는 기법은 우리나라의 작가도 시도한 적이 있다. 임민욱 작가의 <희생>이 이와 비슷하게 극단적인 생략을 감행한 경우이다. 2시간이 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8분으로 줄인 작업이다. 작가 임의로 선정한 핵심을 중심으로 과도한 점프컷과 생략을 통해 본래의 서사와 주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작가는 예술과 인간 근원에 대한 사유와 질문에 연관된 대사들을 중심으로 긴 영화를 8분으로 만든다. 본래의 형태를 잘게 잘라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이러한 방식은 원작을 완전히 탈색하여 불안함만을 남기고 있다. 솔직히 이와 같은 작업이 제공하는 전달방식에 대한 의문이 큰 편이다. 단순히 생략만으로 이뤄진 작업이 원작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예술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크게 지닐지, 누군가에게는 의문으로 다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oliloquy - jack


 

Soliloquy - clint


Soliloquy - sharon


이어 제니퍼 & 케빈 맥코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관계를 실험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인 <호러 체이스>의 경우 샘 레이미 감독의 영화 <이블 데드 2>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속 주인공이 실내를 이동하며 쫓기는 장면에서 착안해 자신들이 직접 브루클린에 세트를 지은 후 체이스 씬을 촬영한 후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절대 겹치지 않는 동선으로 영상이 계속적으로 반복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키스>에서는 <보디 히트>의 유명한 키스씬을 두 명의 배우를 섭외해 재연하게 한 후 <호러 체이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컴퓨터를 통해 불규칙하게 배열하여 불안한 영상을 제공한다. 이 두 작품에서 선보여지는 비선형적이고 분절적인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제니퍼 & 케빈 맥코이는 고다르 영화의 사운드를 배경으로 조각품을 이용해 새로운 씬을 구축한다든지 <스타트렉>이나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등의 작품을 이용해 단순한 ‘파운드 푸티지’ 차용을 넘어서 적극적인 오마주/모방의 방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Horror chase


The kiss


마이클 호아퀸 그레이의 <The blink>의 경우도 앞서 언급한 제니퍼 & 케빈 맥코이의 사례처럼 컴퓨터의 임의적인 편집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를 새롭게 배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레이는 그 기준점을 음악으로 놓고 있다. <Leaving on a jet plane>이라는 평화로운 팝송의 선율에 맞춰 레니 리펜스탈의 <올림피아> 속 장면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배열한다. 이는 앞서 소개한 <키스>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인데 음악의 적극적인 활용과 관람방식의 차이로 인해 더욱 신비한 최면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작품은 한 번에 한명의 관객만이 관람이 가능하다. 서로 다른 비율로 깜빡이는 두 개의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고 음악에 맞춰 양쪽 눈으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이다.


The blink


다음으론 동일한 주제로 한데 묶인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독특한 효과를 발하는 작품들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크리스토프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의 작품인 <크리스 탈> 과 올리버 피에치의 <꿈의 형태>가 그 것이다. <크리스탈>은 단순히 고전 영화 속 거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반복하는 단순한 태를 지녔지만 거울의 사전적 정의를 영상 으로 전이한 듯 한 영상의 집중도로 06년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최우수 단편 상을 받았다고 한다. 수백편의 고전에서 추출한 거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주인공을 해체하고 파편화 시키며 자아도취와 분열증, 사랑과 파괴등의 과정을 거쳐 인간의 수많은 감정선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한 구조 속에서 폭 넓은 감정을 표현핸는 이 14분 짜리 영상물은 이번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세계 곳곳의 ‘파운드 푸티지’ 기반 전시회에서 항상 목록에 올라있는 작품이었다. 올리버 피에치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꿈과 죽음, 자살과 마약등의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편집하는 작가이다. 그는 <꿈의 형태>에서 히치콕부터 린치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스릴러 서스펜스 호러 작가들의 꿈과 악몽을 차용하여 혼수상태부터 지각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메타포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단순하지만 설득력강한 작업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욕망을 영화에 투영해 지속적으로 발산하며 강력한 힘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시 모펫의 <마더> 역시 공통 요소의 집합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각종 영화에 등장한 엄마의 모습을 한데 모아 놓은 작품이라는 사실만 전해 들었을 뿐 정확한 구성이나 표현 기법은 확인 할 수 없었다.



Cosmic ray


이외에도 ‘파운드 푸티지’ 작업의 1세대 기수인 브루스 코너의 <Cosmic ray>와 49편의 느와르를 차용해 색감의 다변화 속에 인터렉티브 장치를 고안한 노재운 작가의<God4saken>등이 조사되었지만 실제 영상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브루스 코너의 <Cosmic ray>는 나체의 여성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는 필름에 미키 마우스, 전쟁 기록, 광고, 서부영화 등의 이미지를 묶어 레이 찰스의 흥겨운 노래 속으로 집어넣은 작품이다. 이는 대중문화와 전쟁 등의 선정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으로서 초기 ‘파운드 푸티지’ 기반 꼴라주 작업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시회를 통해 꼭 감상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노재운 작가의 경우는 동류 작가들이 선호하는 방식과는 다소 상이한 특징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인터렉티브 요소를 가미했다. 49편의 흑백 느와르 필름의 씬을 컷팅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색을 부여하고 관람객에게 49개의 색면을 제시하여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직접 작품이 전시된 형태를 관람하지 못하여 작가의 의도나 방향성은 쉽사리 추측이 되지 않는다.


Cosmic ray


‘파운드 푸티지’를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기성작가들에 대한 소개를 이어봤다. 여기까지 언급된 이들은 순수하게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이미지에 영감을 얻어 그들을 복제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이질적인 외형과 상이한 메시지를 뽑아내 왔다. 이들의 작업방식을 물리적 방식에 따라 나누면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째로는 <크리스탈> 이나 <시계>와 같은 방식으로 유사한 이미지를 중첩시켜 자신의 강박적인 집중력을 펼쳐보인 케이스이다. 공통적인 요소의 반복과 모든 씬들의 허리를 꿰뚫는 강렬한 주제의식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최면적 감상효과를 얻도록 유혹하는 작품들이였다. 임의의 가상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원본의 장면을 자르고 뒤집고 쪼개며 편집의 온 집중력을 쏟아 부은 경우이다. 


 

Kristall


<희생>과 <Soliloquy trilogy> 와 같이 큰 맥락을 잘게 나누어 결국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기이한 형태로 얻어내는 방식이다. 덜어내고 순서를 바꾸고 새롭게 이어 붙이며 관객의 역발상적 기시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 형태이다. 그리곤 <호러 체이스> 나 <The third memory> 와 같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관람객과 소통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본 작업은 순수한 ‘파운드 푸티지’ 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작품에 침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 방식보다 강한 어조로 설파하며 원작 본연의 매체적 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는 <24시간 싸이코>와 같이 시간을 조절하고 소리를 컨트롤 하는 방식으로 단순히 기술적 조건의 변형을 통해 특정 감각에 대한 통각을 자극하는 케이스가 있다. 이는 대부분 속도와 기억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공백에 대한 자문을 스스로 던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희생


물리적 작업 속성에 따른 편집/조합/재창조/변형 의 구분은 궁극적으로 세 가지 테마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Cosmic ray>와 <Sync> 연작들이 자극적인 영상의 재빠른 전환을 통해 우리에게 강렬히 전달한 바는 매체 자체에 대한 자기 반영적 암시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들은 영화를 비롯해 여타의 대중매체의 소비적,쾌락적 특성의 지나친 물질주의를 경고하며 스스로에게 자정할 수 있는 사고의 장을 열어 준다. 또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촉구하는 작품군들이 존재한다. <플래시 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더글라스 고든의 숱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와같은 테마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시간의 의미와 영화매체. 비디오(미디어)아트 매체가 지닌 시간의 속성을 반복적으로 환기 시켜준다. 다음으로는 <L'ellipse> 와 <Through a looking glass> 처럼 공간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들도 있다. 현존하는 공간을 새삼 상기 시키며 동시에 공간이 표할 수 있는 매체적 맥락을 복구와 참여의 작업을 통해 관람객에게 제시해준다.


5. 결론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업은 아직까지 그 영역이 넓진 않다. 하지만 확언하건대 점차 본 분야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시도가 이뤄질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은유적 존재로서 비디오(미디어) 아트가 진작 걸었어야 했던 길을 잠시 방황하며 잊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들어 작품의 물리적 개수의 증가와 함께 해당 컨셉만으로 전시회를 기획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 미국의 밀워키 아트 뮤지엄에서는 크리스찬 마클레이와 피에르 위그, 제니퍼 & 케빈 맥코이 등의 작품들을 모아 <CUT/film found object>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작년 강남구 신사동의 코리아나 미술관에서는 <피쳐링 시네마>라는 제목으로 치유로서의 은밀한 반복이란 부제와 함께 브루스 코너를 비롯한 대표 작가 10인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었다. 가깝게는 이번 달 네달란드 암스테르담의 EYE 에서는 <Found footage : cinema exposed> 라는 전시를 열어 <크리스탈> 등 ’파운드 푸티지‘ 분야의 대표작들을 소개 중에 있다.


Found footage : Cinema exposed 전시회장 준비장면


영화의 해체와 반복과 재창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작업. 나는 이러한 방식이 갖는 단단한 잠재력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즐거운 꼴라주 작업은 많은 방식을 통해 그 파급력을 점차 확대 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유된 자원으로 탄생하는 근원적 존재성으로 인해 이미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개척중에 있다. 개중에는 단순히 흥미위주의 시각적 충족을 지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체에 대한 반영적이며 비판적인 근본적 속성에 의해 각각의 작품들은 수용자로 하여금 의도치 않은 교훈과 즐거운 감각의 충족을 동시에 이루고 있다고 본다. 얼마 전 히치콕의 <이창>을 분리하고 조합해 자신만의 캠퍼스 속에 동시 다발적으로 영화의 시간들을 조합하는 작업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완성도나 품고 있는 함의에 있어 절대 기성작가의 논조와 어조에 눌리지 않는 강력함이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컨셉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파생되는, 흡사 놀이와 같은 상호 영향관계를 보며 본 분야가 인터넷 기반 바운더리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 본성의 흥미를 자극하는 ‘파운드 푸티지’ 기법은 여러 방식으로 대중매체로 자신의 존재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힙합 가수 카니예 웨스트는 마르코 브람빌라의 <문명> <진화> 연작에 큰 미적 심상과 감동을 받아 직접 그와의 협업을 통해 그와 동일한 컨셉으로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경우가 있다. 단순히 예술이 미술관 안에서 서식하는 독자적 의미의 오브제가 아니란 사실을 말해주는 케이스다.


 

Power


영화를 집어삼킨 비디오(미디어) 아트 들 옆에는 스스로가 영화가 되기를 욕망하며 영화와 영화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직접 촬영한 영상이나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해 새로운 방식으로서 실험적인 영화 상영을 시도하며 필름을 변형시키고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왜곡 시키거나 흡사 영화관과 동일한 구조의 작은 관람실을 만들어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영상물을 영화에 대체하는 작업등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와 빛과 암실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과 뜨거운 실험들이 행해지는 분야 역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업들과 함께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관계와 영향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향한 반영적, 지시적 실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이작 줄리언의 <The ten thousand waves>의 경우는 9개의 스크린의 압도적인 비주얼과 유명배우 장만옥의 캐스팅을 통해 단순히 영화의 그림자가 아닌 영화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시각적 경험으로서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기도 하고 있다.



Ten thousand waves


Looking for alfred



 

Upolar



Rear window timelapse


시간과 공간, 대중과 작가, 매체에 대한 자기 반영성과 자기 지시성 등 여러 가지 키워드를 떠올리며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업을 살펴보았다. 본 작품이 일반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위에서 다 언급한 것 같다. 나는 이 보고서를 마무리 지으며 딱 두 가지 만을 덧붙이고 싶다. 상호간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두 매체간의 관계를 바라보며 시도와 변형의 고민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발전적인 방향에 대한 답안을 보다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봤으면 하는 것. 그리고 이전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오브제 개념의 무한한 공유화와 상호작용의 시대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작품이란 놀이를 통해 피부 가까이 맞대가며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고 반성케 만들어 줄 수 있는 예술의 참되고 진솔한 의미를 보다 쉽고 부드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Life in a day


작년에 가장 인상적으로 감상한 영화가 있었다. 전 세계 인구가 동일한 하루의 자신을 각자의 카메라에 담아 한편의 영화로서 완성한 작은 지구본 <라이프 인 어 데이>. 서로가 서로의 인용이 되어 하나의 몸뚱이를 체워 나가는 과정. 난 이러한 작업이 지니고 있는 시도와 의미야 말로 앞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예술과 신매체의 새로운 얼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과 힌트를 가장 적절하게 제시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영상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며 서로의 영향력을 공유하며 큰 그림을 그려내는 작업들에 아낌없는 애정을 보낼 것이다.




- 27살

Posted by Alan-Shore :

영화 팜플렛 콜렉션

2012. 3. 3. 11:38 from Cinema/Mine






'목록을 작성해야지' 입으로만 중얼거리며 이래 저래 미루다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와 버렸다. 뒤바뀐 밤과 낮을 바로잡고자 24시간 이상을 무수면 상태로 버텨야할 상황에서 도저히 글자는 눈에 안들어오기에 공부는 때려치고 그간 미뤄온 숙원사업에 손을 대봤다.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감각 탓에 실용보단 이쁜것. 그리고 날 기분좋게 만드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보지도 않을, 그리고 이미 예전에 다 봐버린 비디오를 책장에 차곡 차곡 쌓아놓는 이유도 단지 넓직한 이미지가 이쁘기에, 그리고 가만히 보다보면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일게다. 아마 팜플렛을 챙겨온 것도 비슷한 이유에설게다. 중학생 시절 신문지의 영화광고를 오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극장에서 팜플렛을 꾸역 꾸역 챙겨오는 짓거리도 아마 그냥 이뻐서 그런걸 게다. 사실 그때만해도 영화에 대해선 별 아는바도 없을 뿐더러 친구들과 약속이 있지 않으면 극장도 안가던, 영화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이쁜 것들을 줏어 모으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이 생긴걸까. 여튼 우연히도 그 후 얼마 지나지않아 극장을 혼자 찾아가는 중학생이 된듯하다. 동기도 목표도 없기에, 수집 목록은 참으로 조잡하고 애매하다. 뭐 어차피 수집에서 만큼은 과유불급은 어불성설일 수 있으니 앞으로도 기준은 없을것 같다. 주기적으로 변덕치는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듬성 듬성 몇년의 시간들이 비어있다.


 

기준도 없이 시작된 막 짓거리지만 자연스레 용솟음치는 괴상한 애착 정도는 생기긴했다. 일단 외국 영화들에 있어선 팜플렛의 호감 정도는 작품성과 비례하는것 같다. 좋은 작품, 혹은 내가 감명깊게 본 작품엔 너무나 평범한 애착이 간다. 근데 기묘한 점은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으로 적용된다는 거다. 정말 이상한 영화, 평단과 관객들에게 철저히 조롱받은 작품들을 갖고 있으면 묘한 뿌듯함이 생긴다. 물론 박찬욱과 봉준호 이창동의 영화는 너무나 빛나기에 흐물거리는 종이 한장도 소중히 모시고픈 맘이 든다. 몇몇 거장을 제한다면 한국영화 시장을 좀먹은 혹은 거대한 재앙으로 기록된 작품들에 호감이 간단거다. 이번에 정리하며 발견한 것이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팜플렛이 2개나 있는걸 보고 너무 즐거워졌다. 몇년전에 찍은 사진이지만 다시봐도 감동적이다. <까불지마> <구세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긴급조치 19호> <그녀를 모르면 간첩> <제니,주노> 오, 이 놀라운 면면을 보시라. 개인적으론 깐느 영화제 콜렉션 나열에 맞먹는 전율이다. 특히나 극장에서 관람한 긴급조치는 더욱 특별하다.  




 

이번에 목록을 정리하다보니 막연하기만 했던 팜플렛 수집에서 몇몇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첫째로 난생 처음보는 듯한 영화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이다. 국내극장에 걸렸으니 누구나 알법한 배우들이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시놉시스 한글자 마저떠오르지 않는 작품들이 많았다. 도대체 실베스터 스텔론의 <디 톡스>는 무슨영화였지. 이건또 뭐야 안젤리나 졸리와 클라이브 오웬이 나오는데 난생 첨보는 느낌이다. <머나먼 사랑>이라... 영화는 많이 안봐도 영화 정보를 읽어제끼는걸 좋아하기에 개봉작들은 거진 다 알고 있다 당연시 해왔는데, 확실히 한수 배웠다. 어쩌면 머리가 안좋은 것일 수도 있겟지만.



 


둘째는 앞으론 누군가에게 팜플렛을 선물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다. 대수롭지 않게 모아왔기에 대수롭지 않기에 친구들에게 주곤 했었는데, 예전 사진 속 팜플렛이 집에서 사라진걸 보니 묘하게 씁쓸한거다. 생각해보니 이건 다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선물로 주기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종이 쪼가리니 그냥 가만히 냅두는게 상책인것 같다. 뭐 죽어라 필요한것도 아니지만, 괜히 느껴지는 공허함이 있다. 별 생각없이 줏어왔어도 10년 가까운 시간이 쌓아준 정이려나. 셋째로는 앞으로 소규모 독립 상영관에 갈땐 꼭 가방을 챙겨야겠단거다. 멀티플렉스로 나설땐 이래 저래 다른 물건들도 살겸 읽을 책도 싸갈겸 작은 가방이라도 들고가니 팜플렛을 자연스레 챙겨오는데, 시간에 딱 맞춰 영화만 보고 후딱 나오는 독립 상영관에선 팜플렛을 잊는 경우가 많은것 같았다. 뭐 팜플렛이란게 메인스트림이건 인디건 시간 지나면 어차피 다 사라질 운명이지만 인디영화 쪽 팜플렛이 이쁜 것들이 더 많은것 같다. 이번에 정리하다보니 확실히 느꼇다. 어째 제작비는 비견도 안될 꼬맹이들이 이리도 이쁜 종이위에 그림을 찍어내는건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감성이 참 이쁘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감한것이 요즘엔 도통 팜플렛에 투자를 안하는것 같다. 거진 한쪽짜리 압축본에 기껏해야 접이식 구성이다. 캬, 새삼 느낀거지만 2000년대 초반만해도 뭔놈의 책같은 팜플렛도 많더라. 이거 흔한 광고지지만 해당 영화를 인상깊게 본 사람으로선 꽤 소중한 자료가 되는것 같다. 뭐 비단 분량의 문제 뿐 아니더라도 사각의 틀에서 가끔씩 벗어나는 깜찍함을 좀 발휘해줬음 좋겟다. 축구공 디자인을 빌려온 <소림축구> 팜플렛은 영화 만큼이나 유쾌했단 말이다. 펼치면 반지같이 생겨먹은 <반지의 제왕> 팜플렛은 지금봐도 신기하단 말이다. 토토로 모양에 맞춰 이쁘게 잘라놓은 요 귀여운 녀석좀 보란 말이다. 요즘엔 도통 이런 짓은 안하는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희극 조합인 에드가 라이트의 <뜨거운 녀석들>과 정신나간 <심슨 극장판> 팜플렛이다. 요렇게 달려 만코롬 조금만 신경 써줘도 참 좋은 선물이 될듯한데 말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도 달력 디자인인데 한장 뿐이라 아까워서 접지못하는게 아쉽구려. 


 

몇년 잊고 지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배우 이은주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까워 미칠것 같은 이은주씨. 유독 좋아하는 배우였기에 이래 저래 팜플렛도 챙겨놨었는데, 아쉽다 아쉬워. 조만간 시간이 나면 <안녕 UFO>를 한번 다시 봐야겠다. 내 기억으론 <번지점프를 하다>와 함께 이은주씨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담긴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적 비중을 따지면 <안녕 UFO>가 훨씬 높기에 이은주하면 자꾸만 이 작품이 생각난다. 다시봐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네. 




아... 본론이 지나치게 뒤로 가버렸다. 결국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수집한 자료들을 꾸준히 기록하기 위해 목록을 적어 봤단거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보단 개인적 기록 차원이라, 이 카테고리안에서 게시글은 이게 마지막이 될것이다. 페이지 상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며 혼자 성실히 기록해보고자 한다. 일단 한국영화를 제외한 작품들은 외화로 뭉쳐놨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국가간의 어느정도 구분은 가능하지만 그럴만큼 방대한 양은 아니기에...  


 

 
[ㄱ]
까칠한 그녀의 달콤한 연애비법 (2) /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 공기인형 (3) / 공작부인 / 그랜토리노 / 겟 스마트 / 권태 / 007 카지노 로얄 / 굿 셰퍼트 (2) / 고스트 라이더 / 고 / 검우강호 (3) / 가디언의 전설 (2)

[ㄴ] 
나이트 메어 (2) / 나는 비와 함께 간다 (3) / 넘버 23 (3) / 나비효과 / 나루토 - 질풍전 / 뉴 폴리스 스토리 / 나오코 / 나인 / 뉴욕, 아이러브 유 / 나비부인 / 노크 / 님스 아일랜드 /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 닌자 거북이 /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 내일의 기억 / 눈물이 주룩 주룩 / 나인야드 2 / 늑대의 후예들 / 노트북 / 노스페이스 / 넥스트 / 닌자 어쌔신 (2) / 노라없는 5일 (5) / 노다메 칸다빌레 

[ㄷ]
디스 이즈 잇 / 디어존 / 데이브레이커스 (3) / 데자뷰 / 대단한 유혹 / 디 톡스 / 데스워터 / 더 클럽 (3) / 드림업 / 더 리더 / 드래그 미 투 헬 / 드림걸즈 (3) / 더블타겟 / 데스노트 : L / 더 퀸 / 드리븐 / 데스티네이션 / 뜨거운 녀석들 (2) / 더 레슬러 /드래곤볼 에볼루션 / 대부 (10) / 디센트 2 / 드래곤 길들이기 (4) - 2종 / 더 코브 / 더 로드 (2) / 도쿄타워 / 돈 조바니 (3) / 대부2 (10) / 더 콘서트 (2) / 데블 (5) / 

[ㄹ] 
로빈후드 (2) / 러블리 본즈 (2) / 러브송 / 릴로 & 스티치 / 렌트 / 룸바 / 라르고 윈치 / 링 2 / 로나의 침묵 / 록키 발보아 / 레밍 / 러시아워 2 / 로렌조의 밤 / 러브 & 트러블 / 람보 4 / 라스트 에어벤더 / 로마에서 생긴일 (2) / 레터스 투 줄리엣 (2) / 레지던트 이블 4 (2) / 렛미인(US) / 레드 (2) 

[ㅁ] 
메신저 / 미스포터 / 몬스터 주식회사 / 머스킷티어 / 모스맨 / 마터스 (3) / 말로노체 / 맘마미아 / 메디엄 / 10,000 BC / 매뉴얼 오브 러브 / 밀크 (2) / 미션 클레오파트라 / 밀리언즈 / 마하 2.6 / 머나먼 사랑 / 미트 페어런츠 / 모짜르트와 고래 / 미치고 싶을 때 / 묵공 /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 마이너리티 리포트 / 모래와 안개의 집 / 명탐정코난 - 천공의 난파선 / 마법사의 제자 / 미, 투 (2) / 모범시민 /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몬스터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마루 밑 아리에티 (2) 

 

 [ㅂ]

블러디 발렌타인 / 부기맨 / 브레이크 업 - 이별후에 (2) / 발렌타인 데이 / 배드 컴패니 / 바벨 / 블랙 (2) / 바스터즈 (5) / 베이직 /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 박물관이 살아있다 2 / 블룸형제 사기단 / 브라더 베어 /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 배트맨 비긴즈 (2) / 밴티지 포인트 (2) / 번 애프터 리딩 / 블레이드 2 / 블랙아웃 / 분노의 질주 / 비밀의 숲 - 테라비시아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열정과 애정 / 블랙북 (3) / 비독 / 바닐라 스카이 (2) / 블러드 (5) / 블라인드 사이드 / 브라더스 (3)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4) / 블러디 다이아몬드 / 뷰티풀 마인드 

[ㅅ]
시간여행자의 아내 / 써로게이트 / 선샤인 (2) / 슈렉 3 (3) - 2종 / 슈렉 2 / 소림축구 / 사랑은 너무 복잡해 / 시리어스맨 (2)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 쇼피숄의 마지막 날들 / 소피의 연애매뉴얼 / 썸머워즈 / 스콜피온킹 / 솔로이스트 / 씬시티 / 숏버스 / 쇼퍼홀릭 / 식코 / 사랑을 부르는 파리 / 쉘위 키스 / 스파이더맨 / 스파이더맨 2 / 스파이더맨 3 (3) - 2종 / 사랑보다 황금 / 4.4.4 / 13 자메티 / 쉘 위 댄스 (US) / 스위트 노멤버 /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 쉬즈 더 맨 / 심슨가족 더 무비 (3) / 스파이 게임 / 쇼타임 / 상성 / 스텔스 / 선라이즈 선셋 / 스쿠비두 / 스피릿 / 사랑해 파리 / 스모킹 에이스 / 300 (2) / 신주쿠 사건 (3) / 스텝업 2 / 스쿠프 / 섹스 앤더 씨티 2 (2) / 싱글맨 (5) / 솔트 / 스텝업 3D / 셔터 아일랜드 (2) / 셜록홈즈 / 새드 베케이션 /  쏘우 3D / 스카이 크롤러 (5) 

[ㅇ]
오프사이드 / 유령작가 / 일루셔니스트 / 이웃집 토토로 / 이터널 선샤인 / 위핏 (2)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 / 인빅터스 (2) / 인디 에어 (5) / 예언자 (5) / 용호문 / 20세기 소년 / 인 블룸 (2) / 11:14 / 이글아이 / 아이스 에이지 3 / 업 / 어바웃 어 보이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3) / 여름의 조각들 / REC / 인크레더블 헐크 (2) / 애니 레보비츠 (2) / A.I /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게임 / 에코 / 오션스 일레븐 / 오션스 13 (2) / 오퍼나지 / 워 / 언페이스풀 / 우작 (3) / 6번째 날 / 22 블렛 / 어바웃 러브 / 인디스 러브 (2) / 왓 라이즈 비니스 / 알리 / S다이어리 / 아포칼립토 / 아틀란티스 / 알리바이 / 아들 (2) - 2종 / A - 특공대 / 영아담 / 아메리칸 파이 2 / 익사일 / 원티드 / 아메리칸 스윗하트 / 엔젤 아이즈 /  우리, 사랑일까? / 우주전쟁 (3) / 아주르와 아스마르 / 어톤먼트 / 이노센스 / 엣지 오브 다크니스 / 오션스 /익스펜더블 / 일라이 / 아이언맨 2 (2) / 엘라의 계곡 / 웰컴 (2) / 아바타 (2) / 에로스 / 에비에이터 /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슬립 (3) / 아메리칸 

 

[ㅈ]
지구 / 지.아이.조 (2) / 제 9중대 /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 주노 (3) / 점퍼 / 집결호 (2) / 적벽대전 - 거대한 전쟁의 시작 / 자토이치 / 저스트 라이크 헤븐 / 진주만 / G - 포스 (2) / 제노바 (2) 

[ㅊ] 
착신아리 2 / 착신아리 / 치킨런 / 찰리 바틀렛 (2) /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 코치 (2) / 천사와 악마 

[ㅋ]
컴 아웃 파이팅 / 클로이 / 코코샤넬 (2) / 킬러들의 도시 /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 (4) / 킹덤 오브 헤븐 / 킹콩 / 킨제이 보고서 / 콘스탄틴 / 킹아더 / 콜래트럴 데미지 / 코치카터 / 키스 오브 드래곤 / 캐쉬백 / 클릭 / 콜래트럴 / 캣츠 앤 독스 / 크레이지 (2) / 킥애스 (10) / 크리스마스 캐롤 / 클린 / 

[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 트로이 / 트리플 X 2 / 트랜스 포머 (4) /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 터미네이터 - 미래 전쟁의 시작 (2) / 타인의 삶 (3) / 트와일라잇 - 뉴문 / 트와일라잇 - 이클립스 / 택시 4 (2) / 툼레이더 / 타이탄 / 

[ㅍ]
팬도럼 / 포스 카인드 / 프롬 파리 위드 러브 / 퍼펙트 겟어웨이 / 퍼블릭 에너미 / 플라이트 플랜 / 펠햄 123 / 피터팬 / 페이첵 / 포비든 킹덤 / 팩토리 걸 / 퍼햅스 러브 / 프라임 러브 / 프린세스 다이어리 (2) / 페인티드 베일 /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3) / 패밀리맨 / 펭귄 / 프릭스 / 페르시아의 왕자 / 폴리와 함께 / 포스트맨 블루스 / 프로포즈 데이 / 퍼니게임 / 파라노말 액티비티 2 / (2)

[ㅎ]
한니발 라이징 / 하치 이야기 (2) /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히든 / 황시 / 해리포터와 불의 잔 / 황후화 / 행복을 찾아서 / 해피 플라이트 (4) /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 훌라걸스 / 하나와 앨리스 / 하이 크라임 / 혹성탈출 / 황야의 마니투 / 히노키오 / 향수 / 하트의 전쟁 / 허트로커 (4) /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  

 



[ㄱ]
그랑프리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 / 경계도시 2 (3) / 구세주 / 까불지마 / 국가대표 (2) / 고고 70 / 꽃섬 / 그림자 살인 / 과거는 낯선 나라다 / 김씨 표류기 (2) / 거북이 달린다 (4) - 2종 / 극장전 / 결혼은 미친 짓이다 / 그녀를 모르면 간첩 / 긴급조치 19호 / 거미숲 / 고양이를 부탁해 / 간큰가족 (2) / 경의선 (4) / 귀여워 / 가문의 영광 / 강력 3반 / 검은집 (3) - 2종 / 꽃피는 봄이 오면 / 고사 2 / 광식이 동생 광태 (2) / 공공의 적 / 공공의 적 2 / 극락도 살인 사건 (2) / 그 놈 목소리 / 그 놈은 멋있었다 / 그때 그사람들 

[ㄴ]
남극일기 / 내 남자의 로맨스 / 날아라 허동구 / 나는 행복합니다 (3)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2) / 눈부신 날에 (2) / 내부순환선 / 나탈리 (2) / 나두야 간다 / 내 머리속의 지우개 / 나무없는 산 (2)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 2종 / 내사랑 싸가지 / 노랑머리 2 / 내 깡패같은 애인 (2) / 녹색의자 

[ㄷ] 
동해물과 백두산이 / 돌려차기 / 두번째 사랑 / 달마야 놀자 / 달마야 서울가자 / 댄서의 순정 / 두사부일체 / DMZ 비무장지대 / 다섯은 너무많아 (2) / 달콤한 인생 (2) / 된장 (3) / 돌이킬 수 없는  



[ㄹ] 
라이터를 켜라

[ㅁ]
맨발의 청춘 / 모던보이 /미워도 다시한번 / 못말리는 결혼 / 마이 뉴 파트너 / 마지막 밥상 / 무림 여대생 / 마더 (2) / 목포는 항구다 / 무영검 / 밀양 (2) / 무사 / 무적자

[ㅂ] 
바람의 파이터 / 부산 / 비몽 / 브로큰 플라워 / 불신지옥 (2) / 뷰티풀 선데이 (2) / 바람의 전설 / 범죄의 재구성 / 바보 / 보트 / 빙우 / 복면달호 / 방자전 (4) - 2종 / 박쥐 (3) / 바람피기 좋은날 / 베스트 셀러 / 반가운 살인자 / B형 남자친구 / 백야행 (2) / 빈집 / 박수칠 때 떠나라 / 봄날은 간다 / 불량남녀 / 부당거래 (5)  

 

[ㅅ] 
10억 / 시크릿 / 4교시 추리영역 / 쏜다 / 쓰리 (2) / 실종 / 생활의 발견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 / 싸울아비 (2) / 수  / 썸 / 시 (6) / 소름 / 시간의 춤 / 심야의 FM / 소와 함께 여행하는법 

[ㅇ] 
이장과 군수 / 의형제 (2) / 용서받지 못한자 / 요가학원 / 엽기적인 그녀 / 아프리카 / 오래된 정원 / 여행자 / 원스 어폰 어 타임 / 6년째 연애중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 워낭소리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2009 로스트 메모리즈 / 영화는 영화다 / 아라한 장풍 대작전 / 아는 여자 / 우리학교 (3) / 연애소설 / 예스터데이 / 이것이 법이다 / 이대근, 이댁은 / 악마를 보앗다 (5) / 이끼 / 와니와 준하 /  울랄라 시스터즈 / 용서는 없다 / 여배우들 (2) / 어떤 방문 (2) / 아이언팜 (2) / 연애의 목적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안녕 ! 유에프오 / 웰컴 투 동막골 (2) / 연애 / 우아한 세계 / 어쿠스틱 

[ㅈ] 
작전 /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 캐릭터별 포스터 추가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제니,주노 / 조폭 마누라 / 주홍글씨 (2) / 전설의 고향 / 작은연못 / 집행자 (2) / 좋지 아니한가 (2) / 전우치 (2) / 작업의 정석 

[ㅊ] 
청담보살 / 채식주의자 / 차우 (2) - 2종 / 추격자 (2) / 친절한 금자씨 / 천년학 (2) / 참을 수 없는 (3) / 초능력자 (2) 

 

 
[ㅋ]
킹콩을 들다 / 크로싱 / 케이티 / 퀴즈왕 (5)

[ㅌ]
토끼와 리저드 / 투 가이즈 / 트럭 / 태극기 휘날리며 (2)

[ㅍ] 
파송송 계란탁 / 평행이론 / 패밀리 / 펜트 하우스 코끼리 / 파주 (2) / 파란 자전거 (2) / 폐가 (2) / 파괴된 사나이 / 페스티발 (5)

[ㅎ]
하녀 / 하늘과 바다 / 호우시절 / 후아유 / 해운대 (4) - 2종 / 허밍 / 히말라야 (2) / 흑수선 / 황진이 / 흡혈형사 나도열 / 화산고 / 혈의 누 (2) / 효자동 이발사 / 해결사 


[ETC] 
3인의 거장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 / 아르노 데플레생 / 미카엘 하네케) / 씨네필의 향연 (2005.04.15~ 05.01) / 2009년 6월 단편 상상극장 / 2009 빛나는 선택 (오이시맨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 보트) 

 

[Note]
형사 - Duelist 

[Post card]

천국의 속삭임 / 스폰지 하우스 - 일본 인디 필름 페스티벌 / 서핑업 / 친절한 금자씨 / 스폰지 to 스폰지 2006 / 브레이크 업 - 이별 후에 / 더 로드 / 씬시티 / 아임 낫 데어 / 흑수선 / 13구역 / 블레이드 2 / 샴 / 두사부일체 / 홍상수 감독전 / 마리 이야기 / 열혈남아 / 윈드토커 / 커튼 레이저 / 나도 모르게 (2) / 쇼킹 패밀리 /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 아비정전 / 천하장사 마돈나 / 주먹이 운다 / 페어러브 

개인적으론 엽서나 작은 책자 따위의 기념품들을 좋아한다. 근데 요즘은 어째 이상하리만큼 홍보용 엽서는 만들지 않는 눈치다.

 

나름의 맥을 찾아 같이 놓고 사진찍는 일은 나같이 혼자노는 일을 즐기는 이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소모행위다. 과거형이 됐지만 정말 좋아했던 탐 크루즈의 작품들. 저 <바닐라 스카이> 팜플렛은 정식 팜플렛이 아니라 방한시 나눠줬던 싸인지다. 탐이 아닌 페넬로페에게 싸인을 받았는데 도저히 못찾겠더라. 뒤적 뒤적 팜플렛을 만지다보니 영화에 얽힌 옛추억도 스멀스멀 올라오긴 하는구나. 아, 탐 크루즈 참 잘생겼었지. 사랑하는 배우 디카프리오와 사랑하는 여성 전지현의 영화들도 나름의 추억과 소소한 소중함이 담겨있다. 맨 아래에 있는 <이터널 선샤인> <봄날은 간다> 팜플렛은 내가 젤 사랑하는 팜플렛 들이다. 특히 영화를 편애하는건 아니지만 전자는 비율이 후자는 재질이 맘에 든다. 물론 영화 자체도 좋아하긴 하지. 그리고 금자씨 팜플렛은 쫌 더 이쁘게 만들 수 있을것 같은데, 에이.

 

여기서부턴 이야기해보자면 나름의 추억과 설명거리들이 많지만 도저히 귀찮아서 못할것 같다. 그래도 몇몇 작품은 찝어서 이야기 해보자면, <하나와 앨리스>는 수능시험을 마치고 집에 들러 가방만 내팽개치고 바로 극장으로 가서 봤던 영화다. 앨리스. 이 캐릭터는 내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 한때 참 좋아했었다. 그리고 수 많은 팜플렛중 가장 쓸쓸한 느낌이 나는게 바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일게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던 느낌이 떠오른다. 저 팜플렛만 보면. 한마디로 참 불쌍한 팜플렛이다.


 

대미는 최초의 팜플렛으로 장식해야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집에 굴러 들어온 최초의 팜플렛이다. 그만큼 때도 자국도 많다. 생각해보니 영화를 안봤네. 참 좋아하는 감독이긴한데 이런 장르는 진짜 못 만들것 같아서 안본것 같다.




이렇게 몇년간 미뤄오던 작업을 마쳤다. 역시 엄청나게 소모적인 짓거리였다. 와 요즘엔 뭔 짓을 해도 허무하네. 뭐, 언젠가는 좋은 기억으로 , 좋은 자료로 남겠지. 그렇게 믿어야지 뭐. 그럴린 없겠지만 저장하기를 눌렀을때 에러가 난다면 미쳐버릴것 같다. 진심으로. 


Posted by Alan-Shore :

더 웨이 (The way)

2012. 2. 18. 01:12 from Cinema/Mine












울수 있다는건 참 감사한 일이다. 제서야 슬그머니 어른이 되어감을 공감하게되는 요즘, 불시착의 공허함과 숙명적 불안 사이에서 가끔이나마 눈물흘릴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누군가 나를 바라볼때 비생산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하다 여길 수 있는 너무나 잦은 습관들. 영화와 술. 언어와 공상만으론 풀리지않을 현실의 고립타분한 매듭에, 안으로든 밖으로든 어느 방향이건 울음을 끌어내 다소간이나마 찰나의 일탈과 황홀한 느슨함을 경험토록 해주는 이들과의 만남이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욱 잦아지고 점점 진솔해져 가는것 같다. 운다. 운다는 것. 영화를 사랑하는 첫번째 이유를 요즘에서야 찾게된것 같다. 특히 어젯밤 나와 만나게된 이 작품은 내 마음속에 마르지 않을 추억과 인생살이의 근원적 원동력이란 이름으로 비처럼 흘러내려 평생을 고여있길 바라기에 이곳에 속삭이고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도 싶었다. 


사실 이 작품을 감상하며 간간한 맛의 눈물을 많이 흘린건 아니였다. 허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론 우리네 광활한 감정폭을 온전히 묘사해낼 순 없다고 믿는 이중의 하나로서 어젯밤의 나는, 마음속으로 또한 생각과 다짐의 어느 계곡속으로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 보냈다고 믿고싶으며 그 점에 대해 굉장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안으로 운다는건 지나치게 개인적인 표현일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감상과 경험에 있어 감동과 자극의 반응을 눈물로서 표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물방울의 흐름정도로 간단히 설명하기는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극장을 나서고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바라볼때 비록 눈시울은 촉촉할 뿐이지만 지나간 인생살이와 머나먼 가능성을 향해 장마빗마냥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후회와 시기란 이름의 눈물들은 도구적 신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생각과 행동들을 정화시켜 준다. 그 시립고 애틋한 몽롱함을 느낄때면 나는 안으로 울었노라... 라며 숨막히는 일상의 강박대기를 참아낼 활력과 위안을 얻는다.  



티나지 않을 흐느낌을 한참 토해내고 나면 해당 작품들의 중심에는 후회와 시기의 동경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The way> 는 이 두가지 감정선을 가지런히 엮어 나의 눈과 귀 속으로 화사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실 자신의 경험을 명확히 전달할만한 약간의 감상과 최소한의 정보전달만으로 영화에 대한 추천사로서 충분함을 절감하는 나 이지만 오늘 만큼은 이쁘고 온전한 형태의 기록으로서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어졌다.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인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서글픈 부모의 시선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최악의 비극을 통탄의 신파가 아닌 삶의 과정, 화합의 도구로서 넘겨내는 <The way>의 사정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겠다.




넉넉한 안과의사이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공허한 아버지이기도 한 탐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업무와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날 프랑스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아들인 대니얼이 어젯밤 사망했다는 소식. 소중한 이들을 몇번이고 떠나보낸 그이지만 핸드폰 하나 지니지 않은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예상치 못한 절망으로서 다가오게 된다. 아들의 시신을 데려오기 위해 곧장 프랑스로 향하게된 탐은 싸늘한 아들에게 다가가는 시간,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후 유품을 매만지는 시간, 그 잔인한 진공의 시간속에서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자유와 깨달음을 위해 그간 쌓아온 모든것을 뒤로한 채 여행길에 올랐던 대니얼의 뒷모습에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들과 겪게된 사소한 마찰, 그리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속마음. 죄스럽고 의아한 마음들은 그의 어깨에 아들의 가방을 둥여매게 만든다. 현지에서 대니얼을 화장시킨 탐은 가방속에 대니얼의 흔적을 간직한채 자신의 아들이 끝까지 밟아보려 했던 산티아고의 기나긴 순례길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중간 중간 대니얼의 흔적들을 순례길 이곳 저곳에 흩뿌리며 부자는 800km 의 대여정을 함께한다.  


생각해보면 영화를 아무리 많이보아도 눈이 매서워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The way>를 내 생의 영화로 당당히 들어올리는 이 과정에서도 완성도의 견고함에 대해선 보증을 설 수 없을것 같다. 어찌보면 상투적이고 보수적인 작품이란 생각마저 할 수도 있겠다. 이순을 훌쩍넘긴 노년의 자기반성과 화해의 여정.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야기와 인물들. 마치 산티아고의 순례길 곳곳에 대형 스피커들을 박아놓은듯이 끈질기게 흘러나오는 일생살이의 배경음들까지, 로드무비의 과욕과 가족을 바라보는 감독의 평이한 시선은 <The way>를 평작으로 끌어내렸다. 매체지향층의 공통적인 사회관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더 많은 영화인들이 가족을 그림에 있어서 대안을 이야기하며 전복적인 사고를 꾀하고있다. 물론 장르적 관습으로서의 뻣뻣한 가족관 묘사에는 반기를 드는 편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담아내고있는 비슷한 틀속의 나태한 가족관은 되려 클리쉐의 이름을 넘어 환상동화를 읽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The way> 가 부자간의 이해와 화합을 다루는 가족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The way> 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대니얼이란 인생의 회전문을 만난 탐의 다리저린 성장통이었다. 


세상의 모든 로드무비는 곧 성장영화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펼쳐진다. 일탈을 통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보고있자면 클리쉐의 적극적인 활용이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다. 일탈과 여행이란 단어를 바라본다. 인간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듣고 읽고있지만 저 단어들에 바라는 기대치는 독특한 목적성이 존재하리라 믿고 있다. 사랑과 함께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용감한 순간들. 항상 갈구하게되는 저 행위들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서 환상이자 그것은 곧 한차원을 뛰어넘어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 구역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인류가 일상에선 겪기힘든 예외의 순간들. 그곳에는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지피는 비슷한 굴곡과 비슷의 향기의 길들이 존재한다. <The way> 는 일탈과 성장의 평범한 환상들을 여행자들의 상상로를 따라 펼쳐낸다. 산티아고의 기나긴 순례길.       


 
전체적인 분위기와 태도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결정적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 남몰래 숨겨놓은 열망과 컴플렉스를 부추기고 위로해줄 만한 순간순간의 요소들이 필요하다. 극 초반 탐은 아들을 공항까지 바래다주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내 인생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내가 택한 인생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대니얼의 대답은 이 영화의 주제인 동시에 영화전반의 여정을 설득시켜주는 중요한 이야기다. '인생은 택하는게 아니에요, 아버지. 살아내는 거지' You don't choose a life, you live one. 일년전쯤 <시> 의 미자와 그녀를 그려낸 이창동 감독을 바라보며 나와 영화 사이가 친구이자 사제지간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 그것과 맞닿은 맥락에서 나는 탐과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감독에게 삶의 태도에 대한 긍정적인 가르침을 얻었다. 명확히 밝힐순 없지만 앞으로의 30여년을 살아낼 근원이자 그 이후의 삶과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에 관한 소중한 지표가 될것이다. 역시 운명에는 상황의 연이 필요한것 같다. 짧은 호흡이었지만 30여일간을 테두리 밖으로 나서며 새로운 땅을 걷고 새로운 곳의 공기를 마시는 일의 가치를 체감한 요즘, 어느 고집스런 노인의 하나하나의 발자욱들이 선명히 가슴속에 자국을 내는듯 하다. 


또하나의 사랑스런 습관은 탐이 기나긴 여정속에서 만나게된 세 여행자들의 존재와 그들끼리 나누는 마법같은 순간의 눈빛이다. 각기다른 국적과 각기다른 목적으로 산티아고에 오른 네명의 동반길은 그들 생의 딱 한번만 존재하는 황홀한 조합이자 마법같이 멈춰진 시간으로서 평생 그들의 기억속에서 머물것이다. 어찌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로망일 수 있겠지만 요즘의 상황에서는 이들의 옅지만 운명적인 우정에 짠한 동경이 남는다.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으로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할 낭만적인 그림이다. 요즘들어 우리네 만성적 불안에 공포와 혐오를 느끼고 있다. 점점 나이가 들 수록 한정적인 범위로 집중되어가는 인간관계에서 미묘한 고독을 느끼게 된다. 얼마전 기이한 경험을 했다. 몇년을 알고 지내온 이들과 함께한 자리, 너무나 당연하게 한가지 이야기에 목을 메고있는 기괴한 커뮤니케이션. 취직과 합격역시 분명히 생의 중요한 과업이지만, 서로의 불안감을 안정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무의미한 위로를 이끌어내는 못생긴 화법에 주변 모든것들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우리가 살아내는 이 사회의 환경속에선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힘든 저들의 일탈적인 생의 대화와 화합은 역시나 운명적인 궤를 함께하며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나는 <The way> 가 참 좋다. 이게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종합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것 같다. 지나치게 작품성에 대해 딱딱한 시선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한번쯤 좋은 경험으로서 동반해볼만한 여정이 아닐까 싶다. 시기적으로도 참 적절할때 만났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될것 같다. 영화를 관심있게 지켜본지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그 이유에 대해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가 가능한 때가 온것같아 더욱 기분이 좋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배우의 부족한 자질과 역량을 지적할 순 있어도 그들의 연기가 훌륭할 경우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없는것 같다. 평범한 관객의 형언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들은 진지했으며 또한 열정적으로 불탔으니. 참고적으로 영화관람의 독특한 재미가 될것같아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마틴쉰의 아들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본 작품의 연출과 아들역인 대니얼을 함께 맡았다. 이런 지극히도 사적인 관계를 알고보면 그들의 연기사이에 흐르는 독특한 기류 역시 추가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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