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zz on a summer's day (1959)

2014. 1. 16. 14:14 from Cinema/Mine




Jazz on a summer's day 는 1958년에 열린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전경을 담아놓은 다큐필름이다. 앞문장에 쓰인 '전경'과 '다큐 필름'의 순수한 의미에 이보다 근접한 작품이 또 존재하려나. 지역의 풍경과 그 곳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근사한 추억이 펼쳐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가 전해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작자나 전수자의 첨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의미로서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본 작품의 가치로도 연결되는데, '재즈'라는 주제적 흐름 마저 눌러버리며 시대상의 생생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담아내는데 노력하고 있다. 카메라의 포커스 역시 무대와 관중을 양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와같은 선택을 했다는건 이래저래 놀라운 사실이다. 50년대 후반의 미국의 풍경. 그러니깐 <백 투더 퓨처>에서 마티 맥플라이가 뛰어든 시대로 부터 고작 3년여가 흐른 시점이다. 난 당시의 이미지에 큰 동경을 느끼는 편이다. 물론 60년대 이전 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다양한 종의 기록물에서 읽을 수 있는 모호한 단정함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류의 흥분을 느낀다. 반세기 가량의 세월의 텀에서 큰 흥미를 느낀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락영화인 <백 투더 퓨처>에 가장 근접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쳐다보고 있자니 재즈고 나발이고, 그들의 패션과 표정 하나 하나에 탄성이 터져나온다. 50년대를 기록하는 필름의 색상 역시 환상적이니, 더이상 무슨 형언이 필요하겠나. 거칠게 갈아놓은 듯한 색상의 따스함들.

 

 영화는 낮을 기록하는 소소한 전반부와 밤을 수놓는 후반부의 화려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루이 암스트통 역시 어둠이 깔린 페스티벌의 절정기에 위치해 있다. 난 그럼에도 전반부에 펼쳐지는 카메라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밤이 찾아오고 재즈계의 큰 스타들이 스며드니 카메라는 (기술적, 대중도의 차이로인해) 자연스레 무대에 고정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난 이 작품의 참맛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색에 관한 관찰이라고 생각하기에 찬란한 햇살 아래 개성있는 조연을 자처한 객석의 생동감이 가득한 그들의 낮이 더 좋다. 코나의 노래를 인용하자면, 객석의 낮은 무대의 밤보다 아름답다. 라고나 할까. 영화가 끝나면 페스티벌을 떠나보내는 어느 일군을 포착하며 하나하나 스탭롤을 올려 보인다. 작품에 대한 편견이 부른 착각일까. 카메라 감독, 음향, 조명, 음악 ... 각종 스택들의 이름은 보았지만 감독의 이름을 읽지 못한것 같다. 뭐 착각이라도 좋다. 이렇게 객관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다큐를 감상한 후 그런 착각을 했다는건 꽤 괜찮은 일이니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굉장한 혼란을 느낄때가 있다. 현실과 진실에 포커스를 맞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시선을 필터링 한 후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케이스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정작 그 작품을 통해 해당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입장에선 훅 맥이 풀려버릴만한 일이다. 송일곤이 만든 시간의 다큐와 <Jazz on a summer's day>가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건 이런 이유에서 일거다.


백 투더 퓨처 1편에서 마티 맥플라이는 자신의 부모님을 이어준 후 무대에 올라 척 배리의 노래를 부른다. 저메키스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역사에 관한 농은 여기서도 이어진다. 마티의 무대를 수화기 넘어 척 배리에게 들려주는 씬. 백 투더 퓨처의 시점으로 부터 3년이 흐른 본 작품의 무대 위에서 척 배리는 마티 맥플라이 처럼 한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기타를 연주한다. 그냥 혼자서 낄낄 거린 순간이기에 기록하고 싶었다.  


9/10


가장 즐거운 무대는 아니타 오데이의 순간들이었다.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