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점점 어른들의 매체가 아니라 아이들의 오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고통과 불행과 배려를 다루는 영화일 경우 때로 텔레비전의 SOS 프로그램처럼 관객의 감정을 착취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긴다. 거짓말 하지 않는 영화에만 흥미가 생긴다. 그게 중년의 가장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내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3,4번 정도 읽었던 책을 다시금 집어 봤다. 김영진의 <평론가 매혈기>는 사실 대단한 야심이나 거창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책은 아니다. 개인의 영화적 체험들을 키워드와 인물로 엮어 담담한 문체로 소개하고 있는 공간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개인으로서, 문화원 막내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해 몇십년간의 영화적 기억들을 성실히 관통하다 고다르의 존재감 앞에서 멈춰서서 마침표를 찍고있는 어느 평론가의 고백이자 매혈의 에세이다.


지극히 사적이고도 무던한 이 글들이 바로, 영화와 관련된 저서를 중 내가 가장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영화 서적들을 몇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학구적 접근, 주로 영화사나 장르적 탐구를 다루는 학술적 느낌이 강한 교재 정도랄까. 시나리오나 촬영을 비롯한 몇몇 세부 분야의 전문적 저서들도 이 곳에 포함될 것이다. 넓게 보면 특정 인물의 자서전이나 전기들도 포함될테고. 그리곤 영화를 중심부에 놓고 색다른 주제를 끌어와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여행, 미술, 음악, 인문, 철학에 관한 에세이들이 있다. 마지막으론 일기 내지 기록물의 형식으로 특별한 주제없이 영화와 개인의 우정과 사랑을 적어내린 리뷰-수필집들이 존재할 것이다. <평론가 매혈기>는 이 세번째 카테고리 내에서도 영화에 대한 애정의 순도가 가장 높은 책일 것이다. 이런류의 책들 중엔 짤막한 리뷰들의 단순한 모읍을 개인의 영화적 여정과 동일시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런 글들을 연이어 읽고 있자면 척추만 도려내진 느낌에 더해 산발적인 나열들을 보고있자면 현기증까지 나버릴 것만 같다. 또다른 한 측에 존재하는 거물급 평자의 숨이 막히는 사색과 재능없는 누군가의 시시콜콜한 잡담이 가득한 글들을 보고있자면 냉온탕의 극단성에 도통 흥미를 붙이기가 힘들어진다.


애정의 순도. 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직업인으로서의 현실감과 영화와 삶을 동반해온 자의 환상이 공존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해진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서 매혈이란 강한 단어를 빌려온 것만 봐도 알수 있듯이 본 저서에서 김영진씨는 영화의 2선에서 현역들을 바라봐온 평자의 고민에 일정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절대적 비중은 크지 않지만 독립된 섹션과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사이 사이에 숨어있는 그의 글쟁이로서의 고민은 <평론가 매혈기>란 서사에 드라마를 부여해준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든다. (실제로 이 책은 예술-영화 섹션이 아닌 에세이-수필 코너에 가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특별히 극성맞은 표현들은 눈에 띄진 않아도 천천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진정성있는 애정의 순도가 어느샌가 나를 적신다.


평자로서의 열등감과 한계, 인생과 비슷한 무게로 커져만가는 영화의 존재. 이들을 양축에 적절한 비율로 나눠가며 그간 지켜봐온 이야기를을 들려준다. 경험으로서의 1 부. 감독열전으로 꾸며진 2부. 전자는 씨네필 문화의 어느 순간에 관한 포착으로, 후자는 띄엄 띄엄 깊게 파고드는 영화적 교양으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본다. 


김영진은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다. 필름 2.0 시절의 그의 글들은 왠지모를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확한 분석으로 공감을 이끄는 그의 수수한 재주에 홀딱 반했던 적이 있다. 무심한듯 툭툭 내뱉는 문장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방이라곤 찾아볼수 없는 매끈하고 탄력넘치는 팔뚝이 눈앞에서 묵묵히 근력운동을 해나가는 이미지가 떠올랐었다. 책속에서 밝히고 있듯이 김영진 평론가는 헤밍웨이의 문장을 '깨끗한 문장의 매력' 이란 제목을 달고 언급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들을 내보내고 문을 닫고 불을 꺼보았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건 마치 조상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잠시 후에 나는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 하고 비를 맞으면서 호텔로 걸어 돌아왔다.


' 비를 맞으면서 호텔로 걸어 돌아왔다.' 바로 이것이다. 헤밍웨이 소설의 매력은. 철이 들어 수 많은 문장가와 사상가의 책을 접하고 감동과 좌절을 거듭한 지금도, 나는 곧잘 낡은 헤밍웨이 소설책을 꺼내 몇 줄 읽는다. 깨끗한 문장의 매력은 그런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헤밍웨이에게서 받은 그 문장의 매력을, 난 김영진의 글로부터 느낄수 있다. 매체 특성상 기고를 위한 칼럼과 문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순 없겠지만, 정말이지 나는 김영진의 담백하고 논지를 흩트리지 않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평론가 매혈기> 속 이창동 감독을 다룬 부분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이창동 감독의 정체성을 깔끔하게 포장한 느낌이 든다.  



영화감독으로서 명성이 높아졌지만 명성의 진정성에 시큰둥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자신의 영화가 감동적이라고 누군가 말해도 그는 크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응대할 것이다. '눈물은 그저 생리적 작용일 뿐이에요. 그게 감동이라고 하면 감동이겠지만 영화관 밖에 나와 잊어버리는 눈물은 의미가 없어요' <오아시스>의 개봉을 앞두고 만났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관습적인 감동을 원하는 관객의 심장을 노리는 자객이었다.


그의 영화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위악적인 표현의 산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게 진지함의 열렬한 표현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고뇌와 좌절과 상실을 알아야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정공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창동의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차츰차츰 그의 예술가적 성숙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물로 나타날 것이다. 삶과 영화의 정직성을 등가로 놓는 그의 근본주의자로서의 태도는 관전자들을 늘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장력과 통찰력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는 평론가와 독자의 궁합이다. 세상의 모든 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기울일 수도 없다. 결국 중요한건 자신과 비슷한 취향과 사고를 지닌 대표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도 김영진 평론가는 신뢰가 가는 존재다. 러프컷을 연재할 당시 느낀 것인데, 특정 영화를 향한 과도한 찬사에 드는 소박한 반기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운의 소외작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응원에서 상당부분 본인과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는 1선에서 활발하게 비평활동을 하며 별점을 던지는 입장이 아니기에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시선의 평론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뿌듯한 구석이 있다. 





스크린 위의 노출을 보고 흥분하는 것보다 스크린에 모자이크로 가려진 것들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 더 위험하다. 스크린을 통해 느끼는 욕망은 근본적으로 결핍된 욕망이다. 나는 스크린 위의 여성을 욕망하지만 스크린 위의 여성은 나를 욕망하지 않는다. 스크린을 통한 동일시는 잠시 동안 백일몽에 젖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백일몽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면, 때로는 그 백일몽에서 우리가 벌건 대낮에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본다면, 스크린 바깥의 우리 삶은 더울 환해질 것이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스크린에서 관능을, 진실을 접할 기회를 주지 않는 억압된 문명이다. 문명이라는 가치 아래 금욕을 강제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나는 우리 사회에 좀더 많은 외설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더 세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풀어 헤치는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눈치 보지 않고 대부분의 장면이 전신 나체로 채워져 있는 그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인간의 나체를 보는걸 두려워 하는 사람에게는, 왠지 불감증의 가련한 증세가 풍긴다. 그 불감증은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분간할줄 모르고 추한 것에서 진실을 볼줄 모르는 사회의 모든 고상한 척하는 도덕률이, 사실 권력의 우산 아래 조종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박물관 구석에 전시된 우아한 나체상보다는 밝은 대낮에 공공연히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나체를 보고 싶다. 아니, 그 전에 모자이크로 가리지 않은 온전한 나체를 스크린에서 보고 싶다. 




언제나 찬반론의 중심에서 찬사와 비난을 배불리 드시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열렬히 응원하는 일인으로서 금자씨에 대한 김영진의 호의는 왠지모르게 고마운 느낌이 든다. <친절한 금자씨> DVD 의 2 CD 코멘터리는 김영진 평론가가 홀로 등장해 금자씨의 미덕과 가치를 설명해주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들어봤으면 좋겠다. 






<올드보이>의 성공 이후에 대단한 화제 속에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윤리학의 복합성을 탐구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상당수 관객이 별로 이 영화의 주제에 만족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영화는 '천벌 받을 짓을 한 천하의 몹쓸 몸이라해도 그에게 복수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고 묻는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너무 인위적이며 절대적인 악에 대한 희생자들의 분노는 그 소시민들이 실은 우리와 다를게 없다는 감정 이입을 잠시 끌어내지만 결정적 상황에서 사람을 과연 어떻게 죽일 것이냐를 놓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 공포영화의 괴물 살인마처럼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조명에 비쳐진 그들은 막 현실을 떠난 유령같은 존재들로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는 우리가 누구나 악이라고 여기는 존재에 대해 섣불리 단죄도, 청산도, 용서도 하지 못한 이 시대의 불우를 스크린에 옮기고 있다. 그것은 백선생을 꼭 정치적 메타포로 읽어내지 않더라도,  여하튼 이 시대를 살며 뭔가 가위 눌린 답답함을 느끼는 우리의 체증에 대해 따듯한 위로 같은걸 건내는 것이다.


...


많은 이들이 <친절한 금자씨>의 도발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릴때마다 즐겁다. 관객을 들었다가 놨다 하는 박찬욱의 재능을 이 장면을 통해 느끼기 때문이다. 금자가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귀가한다. 골목에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다. 금자를 연모하는 연하의 남자가 금자를 따라 오며 가볍게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른다. 빨간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금자의 뒤에서 남자는 남일해의 흘러간 유행가 <빨간구두 아가씨>를 부른다. 공포영화 같은 불김함과 시적인 서정이 경쾌하게 결합된 이 장면의 톤은 언어화 할 수 없는 금자의 삶, 또 그녀와 비슷한 운명에 처한 이 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농담같은 것이다. 그녀는 걷는다. 눈 오는 길을, 구두소리를 내며, 뒤돌아 보지 않고 걷는다. 손에는 자신이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그녀는 그것을 그녀의 딸과 함께 먹을 것이다. 딸은 골목길에서 금자를 기다리고 있다. 두 모녀는 이윽고 만난다. 그리고 케이크를 먹는다. 그녀는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먹고 정화를 다짐할 것이다. 여전히 화면 배경에는 눈이 소복소복 내린다. 가느다랗게 희망 비슷한 여운을 남겨 놓고서.











저서와 동명의 타이틀을 단 평론가 매혈기 파트에서는 평생의 영화적 체험을 책 속에 차곡차곡 채워넣은 이 작업에 대한 소박한 주문을 적어넣고 있다.  김영진과 위화. 신기하리 만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위화란 작가도 다시금 떠올랐기에 오늘 도서관에 들려 그의 수필 한권을 빌려왔다. 천안문 사건의 6월 4일을 5월 35일로 부를 수 밖에 없는 그 땅 위에서 소신껏 던져보는 중국에 관한 보고서인듯 하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예술 관련 서적들만 보다 우연히 기분좋은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 갔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으며 취향을 확장하는 일에 흥미가 점점 커진다. 다음은 또 어느 구멍으로 빠져들지. 여튼 마지막으로 김영진의 문장을 남기며 <평론가 매혈기>에 관한 짧은 기록을 끝내도록 하겠다. 





병에 걸려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들을 찾아가는 길에 중년의 허삼관은 아들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여러번 피를 판다. 그것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들게 피를 판 극적인 경험이었다. 육체는 지쳐가고 있는데 생존은 더 절박해지는 것이다. 말년에 허삼관은 문득 자기 자신을 위해서 피를 팔고 싶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피를 판 돈으로 홍주와 볶은 돼지간을 먹고싶다는 생각에 병원을 갔다가 새파랗게 젊은 남자에게 조롱을 당한다. 허삼관의 늙은 피는 이미 죽은 피가 많이 섞여 있어서 가구 칠하는데나 쓸수 있을 거라고, 허삼관은 절망하지만 사실 그는 피를 팔 이유가 없다. 피를 팔지 않고도 홍주와 돼지간을 사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것이 힘들게 산 그의 인생에서 얻은 유일하고도 굉장한 보상이다.


영화를 보고 그 느낌과 감동을 글로 써서 먹고사는 평론가에게는 결국 영화가 남는 것이다. 좋아하고 지지했던 영화들이 담아낸 삶의 자취가 몸에 베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볶은 돼지간이나 홍주 보다는 몇 권의 책과 영화가 남아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