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려나




Alban Grosdid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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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질에 맞먹을 정도의 빈도로 찾아듣는 앨범이 있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리앤 라 하바스의 데뷔 앨범 <Is your love big enough?>는 흡사 악기와도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조화롭고 다채로운 음악속에 스며들어 있는 근사한 앨범이다. 7월 9일에 릴리즈 됐으니 오늘로서 정규앨범 발매 4달을 맞은 따끈한 신인 아티스트다 (첫 EP <Lost & found>는 작년 10월에 나왔었다). 7세 부터 키보드를 만지기 시작해 11세에 첫곡을 썻다는 식의 흔해빠진 이야기로 시작되는 그녀의 음악 인생은 몇번의 백업보컬 작업과 봄베이 바이시클 클럽, 본 이베르 등의 투어를 거친 후 이번 정규작에 당도해서야 화려한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포크, 소울 종종은 재즈의 향취도 가득히 품고 있는 그녀의 데뷔앨범은 이미 각종 매체를 통해 호평을 받아왔다.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아티스트지만 영국의 권위있는 시상식인 머큐리 프라이즈에 노미네이션 됐을 만큼 뛰어난 완성도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수상작은 Alt - J 의 화끈한 앨범 <An awesome wave> 였다). 


앨범 커버만으로도 단박에 코린 베일리 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녀지만 정작 앨범을 들어보면 서로의 방향성이 꽤나 다르단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구분과 사운드의 결의 차이도 크지만  오로지 청자의 입장에서 이 둘을 바라보자면 뭔가 다른 식의 애정을 쏟고싶은 마음이 들어차게 만든다. 코린이 남몰래 까먹고 싶은 나만의 달달하고 포근한 초콜릿이라면 리앤의 경우는 삐뚤어진 상태로 은근슬쩍 선반에 올려놓고 누군가 먼저 알아채 주길 바라는 따끈한 신품의 이미지다. 그녀의 음악성은 아주 먼 곳까지 뻗어 나가 대다수의 리스너들의 귓가에 축복으로 자리잡을 것이 분명하기에 어서 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붙잡고 양쪽 귀에 이어폰을 나눠 끼고 싶다. 올 12월 24일 MTV 'crashes'에서 알리샤 키즈와 함께 무대에 선다니, 좋은 음악이 더 먼곳까지 울려퍼질 수 있을 것같다.  다양한 빛깔을 지닌 무시무시한 폭탄의 심지에 방금 막 불이 붙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올해 최고의 데뷔앨범이다. 좋은 소리들이니 꼭 한번 들어보시길. 


  








































훌륭한 곡들이 많지만 이상하게 자꾸 이 트랙에 손이 더 간다.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Au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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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그림이라기엔 뭔가 생소해

다행히도 그런 이질감이 정말 좋아. 뭔가가 꼬마 니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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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개들





영화를 이루고있는 초와 분들의 집합들 중 가장 독립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모임은 극의 도입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오프닝 크레딧 - 타이틀 시퀀스 파트일 것이다. <세븐> <파이트 클럽> <밀레니엄> 등의 작품에서, 이제 막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으며 압도적인 강렬함으로서 이야기의 문을 열어온 데이빗 핀쳐는 '타이틀 시퀀스'를 설명함에 있어 이와같은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 무슨 편견을 가지고 티켓의 값을 지불하였건 극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정보들은 순수한 연출자의 '알림'이 아닌 자본과 상업의 가이드 라인에 따른 보편적 홍보물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작품을 선택한 다양한 동기와 목적의 불특정 다수에게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에 앞서 순전히 감독의 시선으로서 새롭게 던져주는 영화 속 '트레일러' 내지 의도적인 편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타이틀 시퀀스란 것이다.  


물론 맨 위의 걸려있는 <저수지의 개들>과 같이 아주 심플한 효과와 독특한 컨셉만으로 가볍게 몸을 푸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 껄렁패들의 간지나는 슬로우 모션으로 상징되는 <저수지의 개들>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우에서 좌로 향해가는 팸 그리어의 모습을 따라가며 영화 전반의 서사를 압축하고 암시하는 듯한 <재키 브라운>의 귀여운 시선 역시 극과 도입부의 살결에 별다른 차이를 강조하지 않는 타란티노만의 방식이다. 조엘 슈마허가 <폴링다운> 에서 선보인 후덥지근한 강박적 시선이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포레스트 검프를 소개하는 살랑살랑한 봄바람같은 오프닝 시퀀스 모두 원테이크의 방식을 십분 활용해 작품의 방향성을 유난스럽지 않게 제시하는 근사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




하지만 앞서 언급한 데이빗 핀처의 경우처럼 (소셜 네트워크는 예외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크레딧 시퀀스만을 위해 별도의 전문가를 고용하는 경우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수효과 내지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해 보다 독립적으로 영화의 컨셉을 소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앞서 소개한 방법이든 후자의 방식이든 해당 작품에 적합한 선택을 했다면 별다른 카테고리의 구분없이 그 창의력과 미학적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즐겁게 그 세계에 빠져들면 그만인 것이다. 카일 쿠퍼나 솔 바스의 명성높은 크레딧 시퀀스 부터 이름 모를 누군가의 독창적인 작업에 이르기까지, 영화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감독과 크레딧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웹페이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Art of title 은 자신의 이름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한 공간이다. 고화질의 인상적 타이틀 시퀀스들을 비공개 동영상으로 올려놔 깔끔한 감상의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컨셉에 맞춰 각종 타이틀 시퀀스들을 헤쳐 모이게 만든 특별 영상들도 재미난 구경거리이다. 타이틀 시퀀스의 미학에 빠져든 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천상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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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눈

2012. 10. 27. 02:34 from I​nfluence/Private











새벽을 반짝이는 길고양이 눈

가로등 아래 쓰레기와 흔해빠진 지하 노래방

201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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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라면 서러운 영화광 김홍준. 한예종 교수이니 <장미빛 인생>의 감독이니 이런 저런 복잡한 타이틀을 다 무시하더라도, 영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만한 인물다. 그런 그가 영화음악 프로그램에 나와 매주 영화를 소개해 줬(었)다. 일상처럼 들러붙어 있기에 이따금씩 그 가치를 무시하기 쉽상인 라디오 전파 속 전문평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동진의 드넖은 취향적 스펙트럼에 주목해야 하며, 누군가는 분명 어디선가 임진모의 음성을 녹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주 김혜리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문화적 체험의 시야범위를 자문해본다면 분명 우리의 양식의 주머니는 그 전날보다 두둑해질 것이다. 허나 매일같이 꾸겨넣기에 그 소중함을 알아차리기 힘든 쌀밥마냥 난자리가 뵈기 전까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힘든가 보다


다행히도 온전히 붙잡아둔 자료가 있어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래의 음성들은 MBC 라디오 <이주연의 영화음악>속 코너 <고전 영화의 발견>이다. 스스로에게 '광'내지 '필'이란 꼬리를 달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을, 심지어 대부분은 보았을 작품들을 20 ~ 30분 가량 소개해 주는 시간이다. <모던 타임즈>를 시작으로 <그랑블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명작들을 꺼내들며 그에 얽힌 이야기와 보다 영화를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트리비아들을 슬슬 흘려주신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3년만 지나봐라, 의외로 영화에 대한 새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익함을 보증한다. 언젠가 멍하니 방바닥에 누워 시간만 때울 타이밍이 찾아온다면 꼭 한번씩 들어봤으면 한다.      





















찰리 채플린 - 모던 타임즈 (1936)





뤽 베송 - 그랑블루(1988)





빅터 플레밍 - 오즈의 마법사(1939)





스탠리 큐브릭 - 배리 린든 (1975)





아키 카우리스마키 -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1989)





리차드 레스터 - 하드 데이즈 나이트 (1964)





세르지오 레오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더 웨스트 (1968)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





샘 페킨파 - 관계의 종말 (1973)





하길종 - 바보들의 행진 (1975)





리를리 스콧 - 블레이드 러너 (1982)





스탠리 도넌 / 진 켈리 - 사랑은 비를 타고 (1952)





루이 말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1958)





임권택 - 서편제 (1993)




알프레드 히치콕 - 현기증 (1958)





장 콕토 - 미녀와 야수 (1946)





미야자키 하야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장국영 (1956 ~ 2003)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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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흔히 듣는 질문 '요즘 괜찮은 영화 뭐있어?' 그러나 얼마전 이 질문을 받아든 순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삼 자각했단듯이 머릿속으로 자답할 뿐이었다. 확실히 요즘엔 영화를 안보는구나. 이유없이 빠져든 대상이었기에 시들해진 지금에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대리만족이나 도피보단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스케치를 고민하는 시기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영화를 감상하는 일은 현실적인 상념의 과정속에 부자연스런 환상을 뿌리리라 근심하기 때문일까. 아예 안보진 않아도 확실히 이전보단 빈도가 준것만은 사실이며 자연스레 이곳에서 할 이야기거리도 부족해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주해 충동적으로 행한일이 있었다. 5년전 광화문의 어느 극장에서 나를 치유했줬던 영화를 스크린으로 다시금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이었다. <카모메 식당>은 영화를 대함에 있어 전환의 기점이 아닌 유보의 독려로서 잠시 모든것을 내려놓고 부담을 덜어내라는듯 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사실 영화를 공유하는 방식과 능력에 있어 많은 회의를 느끼는 요즘이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영화를 너무나 사랑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소개하는 방식과 핵심들을 보고있자면 수사를 위한 문장쌓기, 투명하고 직관적인 감상에 대한 흔해빠진 서술의 반복뿐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웹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의미없는 소문장들의 전시만을 위한 전시를 눈살찌푸리며 바라보면서도 정작 가이드로서의 고민보단 형식만을 메우기 위해 핵심과 진심을 챙기지못한 내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에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앞날에 펼쳐질 일상들에 대하여, 불안까진 아니여도 호기심어린 고양이 눈으로 생각들을 응시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고민과 문제들이 해결된 후에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취미인으로서의 봉사,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영화전문 블로거가 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당장에는 힘든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당장 이곳의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이전보다는 고른 호흡으로 허술한 생각보단 명확한 자료와 의미있는 진술에 초점을 맞춰보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진심' 말이다. 강박과 허식을 덜어낸 진심어린 나만의 공간. 생각과 경험을 정성스레 쌓고싶다.


슬슬 마무리다. <카모메 식당>을 감상한 후 여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블로그의 완결성을 위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나의 또다른 취미생활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영화 뿐 아니라 나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걸 좋아한다. 오히려 짧은 템포속에 기발한 사고들이 가득 들어찬 영상과 멜로디 속에서 영화 이상의 활력과 영감을 얻는 편이다. 그래서 내 맘 한켠 어딘가의 목 좋은 자리를 찾아 소박하게나마 나만의 <카모메 식당>을 오픈했다. 거창할 것 없이 그냥 이곳 블로그를 임시적으로 보수확장 하고자 한다. 현실적 여유가 완성되기 전까진 포스팅의 완결성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게시물들은 단지 제목과 대상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우연하게 발견한 어느 소담한 나무의 시원한 그늘처럼 종종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슬쩍 기대어 일상의 바쁜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만남이 되었으면 한다. 당초 끌고오던 진심에 대한 고민에 <카모메 식당>에서 배운 여유의 덕목을 살포시 올려본다. 그렇게 불안과 취향을 달래본다,


그래도 이 모든 생각들을 한편의 영화를 통해 결론지을 수 있었으니 영화는 내게 있어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이야기하는 방식의 절실함을 알려준 <그을린 사랑>. <차가운 열대어>를 통해 영혼강탈자의 영화적 매혹을 일러준 소노 시온 감독. 떠나가고 남은 것들의 소중한 눈물들 <굿바이 그레이스>와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실현가능한 범위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살냄새를 풍겨주며 내 맘속에 들어온 돈 루스 감독의 <해피 엔딩>. 최근에 내 마음을 움직인 몇편의 영화들을 기억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아래의 영상은 본문을 관통하는 정서의 핵심이다. 영화의 엔딩을 함부로 올려선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지만 많은 것들을 일러준 순간으로서 이 글과 맥을 함께하는 씬이기에 붙여봤다. 감상여부는 스스로 판단해서. 그런데 정말이지 훌륭한 마무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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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장르를 좋아한다. 극영화에 비해 표현의 상한선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에 여러모로 한정적인 제약이 따라붙긴 해도 현실과 일상의 결을 따라 걷다 마주하게 되는 감동과 자성의 울림 속에는 감히 극화된 이야기들은 따라잡기 힘든 넓고 진한 감정적 파장이 숨겨져 있기에, 굳이 커다란 환상이 없더라도 내 스스로를 꿈꾸고 울게 만드는 것 같다.


길을 걷거나 밥을 먹다가, 가끔씩 근례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유독 선명히 그려지는 상들은 누군가 진솔히 속삭여준 어느 이웃의 삶이었던 것 같디. 몇 년을 손꼽아 기다리다 개봉과 동시에 달려가 기대치 이상의 영화적 쾌감을 선사받았던 봉준호 감독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어느 신작보다도, 겨울의 낯선 하루. 생각 없이 극장 앞을 지나다 몇 안 되는 관객들과 함께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시간과 기억의 고민을 담고 있는 쿠바 발 엽서 한 장에 모든 기억과 그리움을 집중시키는 것을 보니, 확실히 다큐멘터리 장르에 마음이 쉬이 걸리는 것 같다.


지난 한 세기 낯선 땅에서 서로의 인생을 비춰가며 쿠바를 살아 낸 한인들의 인생과 사랑의 짤막한 기록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의 춤이란 제목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 주는 증거가 되지만, 송일곤 감독은 시간의 표면위에 포근한 나레이션을 흩뿌려 놓으며 기억의 대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모든 여행을 책임져준 이하나씨의 친절한 나레이션도 좋았지만, 불쑥 끼어들어 또 다른 차원의 기억 속으로 관객을 잡아끌며 다시금 시간의 춤이란 제목을 아련히 완성시켜 주는 장현성씨의 편지 낭독이야말로 가장 선명한 그리움 중 하나이다.


헤로니모 임이 보내는 첫 번째 러브레터. 상기나 향수 따위의 도구적 경험여부 정도는 큰 무리 없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순간의 기적이다. 쿠바의 리듬처럼 뜨겁고 애잔한 작품 전반의 흐름 속에서도 유독 아련히 봉곳 솟아난 기억이다.


그나저나 <시간의 춤> 이라는 제목, 생각할수록 좋다. 송일곤 감독의 새로운 초대, <시간의 숲> 속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나섰던 것 역시 순전히 제목이 풍기는 기억에 대한 믿음때문이었다. 쿠바 여행을 통해 이러말을 남겼다 '시간이 죽지 않는 삶은 멋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사랑한다면 시간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야쿠시마의 깊은 숲 속에선 '시간은 기억을 지우고, 기억은 시간을 만들어 낸다.' 고 했다. 앞으로 송감독의 시선은 어느 무대를 향하게 될까. 기회만 된다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그랬던 것처럼 박용우와 타카기 리나의 치유적 여정이 몇 번만 더 반복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아예 일상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우리 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되짚어 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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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조우, 필립 K. 딕과 스필버그의 만남 '원작과 영화에 관한 수다'


여기 2054년의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10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60쪽이라는 좁다란 백지위에 그가 꿈꾸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간결하게 써내려갔고, 다른 이는 바로 50년 후인 근 미래의 모습을 145분이라는 시간동안 필름위에 찍어 내려갔다. 작가와 연출가로서 각각 세기의 천재라는 칭호를 받는 이 두 사람이 바라본 2054년의 모습은 비록 같은 인물들이 동일한 상황 속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너무나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제작될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흥행성을 가진 배우가 조우한다는 사실이 이슈화 되었지만, 그에 선행하여 두 명의 천재적 창조자의 조우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과연 이들의 조우는 성공적이었을까? 아니면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우선, 앞서 언급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 필립 K. 딕은 자신의 명성에 비해서 아직까지 스크린에 옮겨진 편수는 극히 적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지닌 그 중량감은 가히 위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SF장르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블레이드 러너>와 풀 버호벤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던 <토탈 리콜>까지 70년대 이후 부흥기를 맞은 SF영화계의 가장 걸출하고 무게감 있는 작품들은 모두 필립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 상실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사이보그를 통한 통찰과 기억의 상실을 매개로 한 통찰. 언제나 그는 우리 인간들의‘실존’과‘정체성’을 향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주었다. 이번에 언급할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블레이드 러너와 토탈 리콜의 시기적 중점에 존재하면서도 그들보다는 더딘 진화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간 그가 다루었던 정체성 문제에서 벗어나 약간 다른 시각으로 미래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현대문명의 발달로 인해 기술은 발달하게 되고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문제에 관한 딜레마를 다룬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영화 감상문에 있어 이토록 원작자의 설명이 길어 진건 이 영화를 논하는데 있어서 필립 K. 딕의 존재감은 스필버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2년,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극장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접했다. 나는 이 영화를 접한 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거친 화면과 강렬한 색체들이 어우러진 미래사회의 모습. 그리고 범죄 예방수사국이라는 매력적인 소재와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 볼만한 정치 사회적 메시지들, 물론 아직까지 감상주의와 가족주의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A.I. 이후 다소 거칠어진 스필버그의 모습이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파이트 클럽>과 <지구를 지켜라>에 더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과제를 통해 이 작품의 원작을 접하면서 약간의 실망감과 아쉬움이 남기 시작했다. 그만큼 필립 K. 딕이 구축해 놓은 세계관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화를 보며 다소 복잡한 전개라고 생각했던 스필버그의 세계관은 핵심을 놓친듯했고 짧은 단편소설보다 단순한 전개였다. 아니 그보다는 상업영화로서 편리한 길을 가기위해 포기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물론 극적 재미와 상업적 완성도는 스필버그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60페이지로 이뤄진 필립 K. 딕의 2054년은 전혀 흥미롭지는 않다.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반세기 이후의 재해석판은 충분한 재미와 친절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뺄 필요까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다수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에 대응하는 소수가 있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스필버그의 세계 속에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을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소설과 원작 모두 기계문명으로 인한 인간속박의 타당성에 관한 의문이나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관성과 딜레마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유무는 꽤나 큰 차이점을 가져다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예언가는 각각 다른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개의 보고서들이 하나의 사슬로 묶이면서 그간 진행되어온 앤더튼의 행보를 명쾌하게 해석해 주는 과정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자신의 명백함을 주장하려던 앤더튼은 3명의 예언자들이 보여준 다수와 필연적 소수의 존재를 감지하고, 누명을 벗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극이 진행될 수 록 자신의 의지로 바꿔보려던‘운명’이 역설적으로 고정되는 모습은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서로 얽혀버린 세 개의 리포트의 순차에 따른 주인공의 심적 변화와 주제에 다가가는 보다 효과적인 요소들로 작용한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이러한 복잡하고 매력적인 요소들을 거부하고, 단순한 음모론과 함정의 수준에서 모든 것들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소설의 말미를 장식하는 앤더튼과 워트워의 2페이지에 달하는 대화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존재했기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1956 VS 2002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것 이상으로 원작을 각색하는 작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몇 백 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축약하는 보통의 각색 작업과는 달리 단편 소설을 영화할 할 때에는 연출자의 해석과 세세한 곁가지들의 추가, 그리고 감독의 상상력이 살을 더하게 된다. 이 작품은 원작의 틀에서 여러 살들을 붙여나가기 보다는 모티브와 초반 설정만 차용했을 뿐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도하고 있다(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에서 소설과 영화의 설정이 전적으로 동일한 인물은 단 한사람도 없다. 영화의 주제를 향한 최종적인 목표는 같은 곳이지만 그들이 최종적인 목표치에 도달하기에 앞서 개개인들이 바라보는 단기적인 시야와 동기들은 소설과 영화간의 큰 격차가 있다. 주인공인 앤더튼의 외향에서부터 시작해서 극의 진행에 있어 등장하는 반대세력으로 설정된 인물까지, 모두가 상이하다. 그렇다면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1952년 필립 K. 딕이 창조한 세계와 2002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세계는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까?


역시 필립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주제 전달이다. 그리고 예언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패러독스를 현명하게 매력적인‘무기’로 전환시키는 과정 또한 작가의 상상력에 힘을 보태준다. 하지만 필립의 작품 속에 발견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야기만 있을 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모든 캐릭터들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에 대한 사연은 ‘운명’이요 그들을 향한 시련은‘과정’일 뿐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과 감정의 이입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다. 극 전반에 깔린 단조롭고 어두운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밋밋하게 만들어 버렸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래! 역시 스필버그는 대단해


아무리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원작에 비해 단순화 시킨 상업적‘수’를 썼다 한들 이 작품을 논하는데 있어서 스필버그 감독이 들인 노력과 정성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등장하고 2년 후, 오우삼 감독 역시 필립 K. 딕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데 도전한다. 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스타일리쉬한 오우삼표 영화도 아니었으며, 어두운 미래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필립의 작품도 아니었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으로 남아버린 이 영화는 필립의 세계관을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따르는 많은 어려움들을 보여주는 예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2054년의 시각화는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E T>와 <쥬라기 공원>을 창조해낸 그의 상상력은 괜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사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범죄 예방 시스템을 제외하고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소품이나 표현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이 영화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미래사회의 모습들은 전적으로 스필버그에 의해 재창조된 것들이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동체인식 시스템에서부터 정찰용 스파이더와 창조적인 교통체계까지, 영화에서 쓰이는 특수효과는 그 어떤 작품들 보다 더 적절한 곳에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수효과에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기술력으로 포장된 이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기술력과 긴장감 넘치는 연출력이 충돌하며 빛을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원작 소설과는 달리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접할 수 있는 상업적인 재미를 충분히 만족시켜 준다. 필립 K. 딕이 창조한 미래사회의 모티브는 그대로 차용하면서 기술력과 거장의 수완을 적절히 혼합시킨 연출을 시도하며 표면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관객과 평단을 만족시킬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필버그가 창조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역시 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필립 K. 딕의 냉소적인 표현과는 달리 스필버그는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의 손길을 뻗으려 노력한다. 그것은 곧,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속에 매몰돼있던 캐릭터들을 조금 더 입체적이고 중점적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주인공인 앤더튼에게는 가족에 얽힌 과거를 부여하고, 원작에서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던 예언가에게는 극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매개로서 위치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지나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것들은 스필버그의 영화를 성립하는 중요한 요소들이긴 하지만, 필립 K. 딕이 창조한 어둠과 혼돈의 세계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설정들이었다. 스필버그의 연출은 오락영화로서 분명히 훌륭한 것이지만,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는 가족과 인간에 대한 지나친 애정은 작품의 무게를 떨어뜨리며 원작에 비해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한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필립 K. 딕의 투시력과 스필버그의 창의력 그리고 탐 크루즈의 흥행성이 조합된 영화라고 평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다소 아쉬운 부분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원작의 주제와 상업영화로서의 재미를 적절히 혼합한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두 거장의 조우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두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결국 원작과 영화는 필립 K. 딕의 비관과 스필버그의 낙관이라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대조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낙관과 비관 중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냐는 문제를 떠나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찰해볼만한 주제를 수많은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이 둘의 조우는 꽤나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00년 전에 존재했던 한 소설가의 메시지와 50년 전에 존재했던 한 감독의 손에 의해 깔끔하게 재단된 이 이야기는 2054년, 그 시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과연 앞으로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지, 그렇다면 두 거장들 중 누구의 예언이 적중하게 될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만남이며 경사로운 조우라고 할 수 있겠다.



SF의 틀 속에 스릴이 살아 숨쉬는 필름 느와르 '장르에 관한 잡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기본적으로 SF 영화의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영화와 장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SF 장르란 무엇일까?’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이고 사전적인 의미로서는 과학적 허구<Science Fiction>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인류사회의 허구들을 뜻하지만 그것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요, 과학적 근거를 바탕에 둔 채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는 이야기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임에도 장르에 대한 이해나 그 특성들을 자세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편이다. 아마도, 장르 영화들이 사용하는 일정한 틀들이 영화의 진행을 단순화 한다는 편견에‘장르 영화’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듯 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SF 장르에서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SF 영화의 분석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논리적으로 비교할 재주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SF 장르영화와 이 작품과의 연계성과 <마이너리티 리포트> 가 가진 매력을 생각해 보고 이 영화에서 SF 장르 외에도 찾아볼 수 있는 타 장르의 적용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SF 장르는 현재의 인류가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언뜻 보면 현실과 가장 동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장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SF 장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특성들을 가장 자유롭고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현실 반영적’ 장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계문명의 발전에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할 주제를 던져주고,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 속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등장시키며 우리 인류들의 사유를 한번쯤 진지하게 토론하게 하는 SF 장르는 가장 사회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SF 장르라는 말이 곧 어마어마한 제작비와 화려한 테크놀러지의 이용을 필요로 하기에 단순히 덩치만 큰 블록버스터 영화로 취급될 수도 있다. 주제의 전달 역시 중요하지만, 영화 역시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고 거대한 규모의 제작비가 투여되는 SF 장르에서는 오락성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의 존재와 미래사회의 경계등에 대한 진지한 주제들을 뛰어난 오락성의 박자에 맞추어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훌륭한 것도 없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디스토피아?


그렇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SF 장르의 기준에서 봤을 때 어떤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영화일까. 기본적으로 SF 영화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바로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가진 유토피아적 발상과 비관적인 시각으로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디스토피아의 구분이다. 전자는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인류문명의 모험과 도전이라는 테마를 자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과학기술의 ‘비약적인’발전에 따른 폐단을 보여준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인 필립 K. 딕은 언제나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의 기준으로 바라보았다. 비약적인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성파괴와 기계와의 대립구도. 흥미롭게도 SF 영화의 극단적인 양 축에 존재하는 두 명의 창조자는 하나의 작품에서 공존을 시도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시각을 유지하며 극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론은 ‘희망’과 ‘가족’이라는 테마로 극복하고 있다. 절망을 이야기 하면서도 가족의 사랑으로 이것들을 극복해 내려는 태도는 다소 의아하게 받아들여진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역시 SF 장르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선 이 장르는 시대를 반영하는 우화적 텍스트로서 SF의 기능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어리언>이나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외계의 존재를 표면적으로 등장시키면서 미국인들이 가진‘타’에 대한 경계와 극복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SF 영화는 현재의 가장 민감한 문제들을 초 현실이라는 틀을 사용하여 은유적이고 상업적으로 포장하곤 한다. 이 해석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9/11 테러 이후 테러범에 대한 경계를 위해 애국자법<USA PATRIOT>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9/11 이후 일반의 삶을 어느 정도 제한하며 테러방지에 대한 강압적 태도를 취하는 정책이다. 수백편의 판권을 소유한 그가 9/11 테러이후 가장 먼저 이 영화를 택한 것은 이러한 정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스필버그는 이 후에도 꾸준히 <우주전쟁>과 <뮌헨>을 만들어내며 9/11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속에 담긴, 스릴러와 느와르의 빛


지금부터 언급 할 이야기는 장르적 핵심과는 많이 빗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접하며 느낄 수 있었던 스릴러와 느와르의 맛에 대한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시간이 흘러갈 수 록 영화의 장르 역시 서로간의 공존을 선택하고 더욱 더 풍성한 볼거리와 새로운 주제 전달을 위해 다른 장르와의 배양을 시도한다. 원작에서는 미래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이 주를 이룬 단순한 SF 소설에 그쳤던 이 작품은 영화화 되고, 상업화 되면서 훌륭한 스릴러 영화의 구조와 느와르 영화의 빛깔을 첨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등장인물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캐릭터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액션 스릴러의 구조로 풀어나갔다. 여러 시퀀스에서 스릴러 장르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 앤더튼과 아가사가 범죄 예방 수사국의 추적을 따돌리는 시퀀스는 스릴러적 연출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예언과 추적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풍선이나 우산 등의 소도구들을 이용하여 관객에게 스릴을 안겨주는 이 시퀀스는 감독의 노련함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일전에 어디선가 읽기를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히치콕의 영화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명과 오해를 받는 한 남자가 진실을 향해 달려 나가는 모습이나 주인공과 경찰과의 관계 그리고 극의 진행과정에서 언뜻 엿보이는 영국식 냉소적 유머까지 이처럼 히치콕의 스타일과 비교된다는 점 자체가 이 영화가 스릴러로서도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또한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특히 촬영부분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는 2054년형 필름 느와르 느낌을 살리고 싶다고 이야기 할 만큼 필름 느와르는 이 영화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컨셉 이었다. 기계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딜레마를 안겨주는 이 영화는 기계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세상을 연출하고자 했다. 그러한 노력은 그간 스필버그 감독이 만들어왔던 그 어떤 영화와도 닮지 않은 냉정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가득한 영상을 만들어 냈다. 필름 느와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전반을 포괄하는 하나의 컨셉으로서 주제의 전달에 있어 적절한 분위기 형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당신들의 미래 <마이너리티 리포트>, '주제를 통해 바라본 영화와 문화의 연관성'


그렇다면 이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하고 싶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난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영화와 문화의 연계를 나타내는 5가지의 주제 중에서 이 영화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사회와 정치에 관한 분석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스필버그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들은 생략한 체 몇 가지의 교훈만을 남기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영화가 전해주는 여러 가지 메시지들이 존재하겠지만, 영화와 내가 접하는 위치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은‘나’라는 개인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우선시하기에 나에게 가장 와 닿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트뤼포 역시‘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당신의 우편함을 찾아봐라’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우선 이 작품은 원작소설에서 큰 비중을 두고 다루었던 개인과 체제 사이의 이데올로기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SF 장르의 타 영화들과 비교를 해본다면, <터미네이터>에서 보여 지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인류의 안락을 위해 발전시킨 기계문명에 의해 역설적으로 지배당하는 모습들이 비춰진다. 일반의 SF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던 인류의 지나친 문명진보적인 시각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들어난다. 하지만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2054년은 아직까지 그러한 문제들을 논의하기에는 이른 시기이다. '감기‘라는 질병도 이겨내지 못한 더딘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반의 SF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 보다는 우리사회의 통제권 내에 있는 시스템에 대한 역설에 관한 목소리가 더 높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2054년은 범죄 예방 시스템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점적으로 봐야할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의 주제‘란 바로 범죄 예방 시스템에 관련한 잡설들이다.


범죄 예방 시스템, 그 절대 권력에 대하여


우선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진행에 있어서, 범죄 예방 시스템이란 워싱턴이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서 일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전국화는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이루어질 사항이었으며, 극중에서 다루는 시기적 상황은 투표 시행 이전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현재 워싱턴에서 시행중인 이 제도는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한 하나의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범죄 예방 시스템은‘정의’라는 목표를 위해 국민들의 생활권을 지나치게 침해하고 권리를 박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은 앤더튼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한 아파트를 부감샷으로 훑어 옮겨가는 씬 이다. 이 장면에서 워싱턴의 시민들은 부부싸움을 하는 도중에도, 심지어 성행위를 하는 도중에도 정찰용 스파이더의 동체인식 검사에 일상적인 반응으로 응하고 있다. 이러한 사생활 침해에도 국민들이 범죄 예방 수사국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목숨에 대한 보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인권침해를 암묵적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나타난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을 갖게끔 하는 새로운‘권력’에 의해 암묵적으로 통치당하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권침해에 관한 문제들을 전제하며, 그 이상의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범죄 예방 수사국의 감사 임명을 받은 워트워는 수사국을 직접 접하고야 그곳의 시스템과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연방수사국의 대표로 감사 임무를 맡은 이가 이곳의 시스템에 대해 그제 서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범죄 예방 수사국의 폐쇄성과 정치적 권력에 있어서의 타 기관의 우위를 보여준다. 살인의 예방이라는‘사회정의’를 등에 업고 국민과 사회의 법 위를 휘젓고 다니는 범죄 예방 수사국은 하나의 거대한 권력으로서 사회적으로는 인권에 대한 경시와 정치적으로는 암묵적인 통치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명을 구하기에 그러한 자격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인명은 재천이거늘...


모든 물음에 있어 기본적으로 밝혀야 할 문제는 범죄 예방 시스템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것이다. 극중에서 앤더튼은 워트워를 향해 테이블 끝으로 공을 굴려 보낸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을 워트워는 잡아낸다. 이 장면에서 앤더튼은 범죄 예방 시스템의 확신을 보여준다. ‘당신이 공을 잡은 이유는 공이 땅으로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고, 당신이 그 공을 잡음으로서 공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해자가 어차피 유발할 살인에 대해 사전에 차단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물체를 비교한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발적 살인을 행하려는 이에게 실행 이전에 다가가 범죄를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범죄 예정자들이 ‘살의’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 사람을 범죄자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는 감정적으로 살인을 시작했음에도 아직 물리적으로는 이행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다면 범행 직전에 검거된 이들을 어떻게 살인자와 같은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사회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예언’과 기술적 조합이라는 인력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아니 도전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이자 자연에 대한 무모한 도전인 것이다. 인간이 규정한 시스템으로 다른 인간을 옭아매는 이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사회적인 법과 윤리의 틀에서 많은 것들이 어긋난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기존에 자신들의 사회적 약속으로 만들어낸 법체계를 무시하는 모순적인 처사라고 생각한다.


※ 여 담

【 지금까지 이 부족한 글을 정성스레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장 분량에 맞추려다가 제가 워낙에 좋아하는 영화이기에 쓸데없는 말들이 이리 저리 붙어 길어졌습니다. 그 쓸데없는 말들 하나하나가 전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향한 저의 애정이라 생각하니 지우기는 안타깝더군요. 저 역시 작게나마 미래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는 공무원 지망생입니다.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기에 이번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시나리오 작가분의 강의를 듣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밝히기를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작품을 좋아함에도 이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는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국내의 여러 평론가들의 글들을 접하고 이 영화에 대한 사사로운 자료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고 깨달은 내용들이 다소 저의 영화 감상문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평론가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제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명쾌한 표현들을 읽어나가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감상문에 쓰인 글들이 다소 영화 평론가들의 논지와 유사한 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1살




Posted by Alan-Shore :



디아스포라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했던 것은 어느 감독과의 대담자리였다. 그의 이름은 ‘장률’. 대륙과 반도의 어느 중간지점 쯤 위치하고 있는 감독의 작품 속에는 중국변방 지역에서 삼륜차를 끌며 김치를 파는 조선족의 모습과 두만강을 경계로 우정을 나누게 된 조선족 소년과 함경도 북한 소년의 관계를 통해, 움직여야만 했던 혹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불안과 한계의 경계 속에서 삶을 위해 삶을 이어가는 대다수의 수동적 디아스포라의 모습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사실 영화를 본 이후에도 이 작품들을 통한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었다. 영화의 감상이 끝난 후 가지게 된 감독과의 대담자리에서 그가 뱉어낸 이야기를 접한 순간 단순히 서울을 기점으로 안과 밖의 경계인식을 해오던 내 머릿속 지도의 개념이 한층 확대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중국말로 생각을 한 후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 영화들은 정작 중국 땅에서는 단 한 차례도 소개 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막연히 기묘한 경험으로서 접하게 된 이러한 이야기들이 문화인류학 수업을 통해 민족과 상상의 공동체의 이해를 거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과 인식들에 당도하는 순간 디아스포라에 대한 심상이 보다 강렬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많은 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져가는 요즘, <Touch of spice> 속에 담긴 경계와 소비의 함의파악을 통하여 2011년의 대한민국, 영원한 정착과 일관성이란 곧 무의미한 환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이곳에서 오늘을 살아가야만 하는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그간의 수업을 통해 듣고 느낀 바를 토대로 다시금 떠올려 보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이권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다퉈온 과정 속에서 역사서의 문장들이 채워져 왔으리라 믿고 있다. 특히 디아스포라 같이 독특한 개념의 집단들은 갈등의 시계추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서 파생된다고 본다. 만약 키프로스내의 그리스-터키 간 분쟁이 없었다면 파니스는 이스탄불의 어느 향료가게에서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사이메와의 추억을 통해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작은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자신은 존재조차 모르는 어느 경계지대의 이권다툼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인생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로 문화와 정치의 이동과 마찰 속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근대국가의 개념이 명확해진 이후, 특히 집단 간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본격화 되면서 점화되기 시작하여 글로벌화의 추세 속에서 보다 빠른 속도로 다양화되며 하나의 단어로서는 규정짓기 힘든 복잡성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큰 맥락에서 나누어 파악해 본다면 각자의 원점에 위치하고 있는 뿌리를 향해 정신적으로 품고 있는 향수와 애착의 정도가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니스의 기억과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본 영화의 구성은 독특하게도 유년기와 중년기를 통해 각각의 특성들을 보여줌으로써 한 개인의 순간순간들을 넓게 펼쳐내어 1-2세대의 태도와 존재성의 차이를 한 몸속에 담고 있다. 그 결과 억압의 객체로서의 다수적 측면과 선택의 주체로서의 소수적 측면을 파니스의 인생여정을 통해 보여주며 디아스포라가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주연장신청 기각과 추방명령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본격화 된다. 파니스의 가족은 그리스의 혈통을 지니고 있음에도 터키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경계인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터키에선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에선 터키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일상은 여러 방면을 통해 강요를 받기 시작한다. 파니스의 성장과정 속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강요이다. 학교와 경찰서에서 파니스의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듣는 이야기는 그리스 언어와 역사에 대한 강조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런 조언을 구하기 전에 파니스 부모에게 던진 ‘터키를 떠나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죠?‘라는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어린 학생에 대한 교육적 차원의 훈계가 아니라 민족과 민족 간의 갈등 속에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상대를 구별 짓고 혈족적인 굴레 속에서 타자를 배격하는 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위 문단에서 언급한 차별을 전제로 한 폭력적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요리와 파니스의 관계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직접적인 정치 사회적 묘사 없이 일상의 영향력을 통해 구성원으로서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룬 작품인 만큼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매개삼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 많은것 같았다. 유년시절 파니스가 음식을 만드는 행위는 부모와의 사소한 마찰로서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고 있다. 물론 향료로서 세상을 묘사하는 영화이기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요소이지만 나는 그 과정속에서 파니스를 향한 부모와 세상의 시선과 태도를 바라보며 디아스포라와 같은 숙명적 소수자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틀에서 벗어낫다‘ 판단되는 것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자신만의 삐뚤어진 자를 들이대어 기준을 설정하고 올바르기를 강요하는 태도, 바로 그와 같이 다름에 대한 인정없이 강요와 평준화를 요구하는 폭력적인 시선. 파니스와 부모 사이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바라보며 굵직한 상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 생의 최악의 5초를 회상하며 서글피 눈물 흘리던 파니스의 아버지가 대변하는 이민족의 서러움만큼이나 디아스포라에 대한 한 운명을 잘 표현해주는 듯 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본 작품의 중심에는 항상 맛에 대한 기억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동하며 그때마다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서 바꿀 수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있다' 라는 가정일 뿐 무조건 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는 현재의 시스템과 문화를 구축시켜 왔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에피타이저 - 메인디시 - 디저트의 소제목으로서 <Touch of spice> 속 파니스의 기억들은 명확하게 나누어진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을 이전과 이어주며 사회적 차별의 시선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스탄불의 그것과 맥을 함게하게 해주는 것은 계피를 비롯한 여러 향신료 및 맛에 관한 소비적 태도이다.


이익추구를 우선시하는 경제적 논리 하에서 지역, 민족 간의 경계의 벽을 가장 쉽게 드나들 수 있기에 상업적 측면은 점점 보편화되며 세계화에 있어 담장 무너뜨리기의 대표적인 측면으로 부각되고 있다. 자신을 구성하는 소비패턴을 통해 정체성과 차별점을 둔다는 것. 그리고 이익집단의 정책에 따라 전 세계의 인류들이 비슷한 방식과 유사한 과정으로 이를 경험한다는 것. 얼핏 보면 한 가지 맥락으로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소비의 단면적 특징의 일부일 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또 다른 경우의 수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디아스포라 같이 자신의 뿌리 밖으로 소수인원들이 튕겨져 나갔을 경우 이와 같은 소비의 특성은 앞서 언급한 보편화의 대척점에서 자신들만의 특수한 문화를 유지해나가는 방어적 장치로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 전반에 이와 같은 특징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가장 확실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은 파니스의 삼촌과 그리스 약혼녀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피상적으로 대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그들은 조리법을 논하면서도 각자의 차이를 분명히 들어내고 있다. “우린 음식에 뭘 숨기지 않아 ! ” “시집 오려면 숨기는 법도 배우세요.” 그렇게 파니스 가족의 소비방식은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디아스포라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 비자발적이고 억압된 숙명적 상황.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계위치를 이용해 다양성으로서 인생을 살아내는 상황. 그리고 시대의 상황에 따라 모두를 묶기도, 각자를 묶기도 하는 소비패턴의 상반된 모습들. 본 영화 속에서는 위에 언급된 바들이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서 디아스포라와 사회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 의거해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입장에서는 역시나 파니스의 중년기에 더 많은 시선이 가게 되었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걷는 그의 주변부의 상황과 모습들을 보며 현재적 의미로서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몇몇 가지 눈에 띄는 사항들이 필름 너머의 현실 속 상상력을 자극해 주었다. 고향땅으로 돌아와 그들과 그리스어도 터키어도 아닌 영어로서 소통하는 파니스의 모습. 터키의 대학에서 별다른 제한 없이 교수직을 맡게 되는 모습. 수업시간을 통해 들은 선택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지닌 디아스포라의 모습들. 그들의 특성들이 분명하게 들어난 장면들이었지만 나는 영화 속에는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은 쓸쓸함이 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제 아무리 자신의 능력과 기회를 통해 억압적 상황을 탈피해 주체적으로 선택권을 지니게 된 이들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폭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뿌리에서 뽑혀진 이들의 의식과 정서 속에 남겨진 불안함과 공허함이 파니스의 표정 속에서 얼핏얼핏 느껴졌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점점 다양한 형태로서 확장될 것이다. 일년 후 내가 살고 있을 장소가 꼭 대한민국일 것 이라 장담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낳은 자식들이 결혼상대로 외국인을 데리고 올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화된 사회 속에서 언제든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직장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지금 그러한 곳에 살고 있다. 장과 단을 따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올바른 파악과 이해라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현재가 완성되기 까지 지나온 발자취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의 실수담과 무용담들. 짧은 강의와 한편의 영화였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고 정리해본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정체된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 앞으로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다름에 대한 편견적 우를 범하지 않도록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 같다. 파니스는 샤메이와 이스탄불의 거리를 거닐며 짧게 중얼거린다. ‘다들 달콤한 걸 들고 다녀...’ 많은 것들은 변하고 우리의 생각 또한 많은 그것들과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 26살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