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bama shakes - Boys & Girls

2012. 11. 28. 00:12 from Listen




















































내가 노래를 하면 너는 놀랄거야. 깜짝 놀랄거야.


Artist : Alabama shakes

Album : Boys & Girls


Posted by Alan-Shore :










     




본래 음악이라는 것이 '아님 말구'의 정신이 흔쾌히 적용되는 분야이기에 가능한한 많은 수의 창구를 개방하고 싶다. 문화를 체험하고 컨텐츠를 수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많은 부분들이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낱장의 앨범 속지가 권력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단순히 정보를 획득하고 지식을 소유하는 식의 선점 행위가 근사한 취향을 완성할 순 없는 시대란 말이다. 물리적 컨텐츠로 범위가 한정되던 시기에는 발품과 귓동냥을 통해서 시야를 무조건적으로 확장하려 애썼다면, 창작과 매개의 장벽이 허물어진 현 시점에선 컨텐츠를 획득하는 포용성과 더불어 넘쳐나는 정보 사이에서 자신의 취향과 호기심을 최적의 효율을 통해 선별해내며 쓸모없는 시간의 낭비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시야의 축소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배양은 분명 동류의 문화를 향유하려는 소수집단간의 활발한 공유를 통해서만 멋지게 완성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는 모든 창구를 개방하려 한다. 


아마추어 취미'인'의 숙명은 문어발식 자습을 통한 취향의 확장이다. 찰리 채플린이란 상식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을때 대척점에 위치한 버스터 키튼의 존재를 알게 된다. 또한 세상의 모든 창작인은 취미전치주의의 과정을 겪었기에 작품 어딘가에는 그들을  한번에 엮을 수 있는 사조와 계보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누군가의 문단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비록 그 대상을 중점적으로 응시하지 않는 글이라도 스치듯 인지하게 되는 '무엇인가' 의 존재가 꾸준히 반복되었을때 비로소 우리는 취향의 폭을 조금 더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음악 싸이트가 있다.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이 응집된 공간 속에 추려진 선별 정보이다. 우리는 다양한 검색엔진을 통해 동일 컨텐츠를 제시하는 또 다른 취향인을 만나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빈번히 사용하는 유튜브의 경우도 소외된 카테고리로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우측에 펼쳐진 동류 컨텐츠의 신비로운 무한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공간은 통상의 웹페이지에 비해 몇배 높은 중력이 작용하는 곳이다). 그런식의 반복을 통해 알게 모르게 스쳐간 '존재'들이 먼 훗날 당신의 문화적 다양성을 지탱시켜줄 건전한 기반이 될 것이다. 




매달 150 곡 가량의 인디락 트랙을 묶어서 공유하는 곳이다. 깔끔하게 한달에 한번씩 인디락 카테고리 하의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곳이다. 토렌트와 직접 다운로드 링크를 통해 음악을 올려주고, 유튜브를 통한 스트림 감상도 가능하다. 골라먹는 재미가 가득한  indie rock playlist


위의 영상은 이번달 플레이 리스트에 포함된 나탈리 던의 'Araceli'다. 새로 올라온 리스트를 끄적거리다 우연히 듣게된 음악인데, 아직 데뷔 앨범도 나오지 않은 따끈한 신인이다. 내년 1월에 정규 앨범이 나온다고하니 꼭 기억해 둬야할 것 같다. 어쩜 이렇게 음성이 이쁠 수가 있는지.










Posted by Alan-Shore :

Moonassi 김대현

2012. 11. 27. 02:28 from I​nfluence/Artist


























































































Moonassi







Posted by Alan-Shore :

Marcelo Gomes

2012. 11. 27. 00:44 from I​nfluence/Artist



















































Marcelo Gomes







Posted by Alan-Shore :














1999년에 발간됐던 <필름 컬쳐> vol.2 no.3  김성욱씨의 칼럼 <히치콕의 탄생과 영화의 죽음>






























시각성과 순수영화


히치콕은 어떻게 자신을 순전히 시각적 수단을 통해 표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고려한다. 그의 영화에서 형식은 단지 내용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용을 창조한다. 히치콕에게 있어서 감독의 능력은 대상을 사진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적 영상으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인물의 심리 묘사 또한 배우의 표정 연기보다는 카메라의 시각성을 통해 드러난다. <사보타주>에서 여자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대사나 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의 손, 눈, 다시 칼을 든 손, 그리고 나서 눈을 비추는 카메라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창>에서 보여지는 것은 밖을 관찰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진 작가, 그 사람이 보는 대상, 그리고 그의 반응이다. 히치콕이 꿈꾸는 것은 순수한 시각적 표현을 통해서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트뤼포가 지적하듯이 히치콕은 의혹, 질투, 욕망 그리고 부러움 등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즉 설명적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거의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그가 일종의 순수 영화에 몰두했던 것은 1920년대 몇 년 간 독일 베를린의 우파 UFA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서 히치콕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 특히 무르나우 영화에서의 신들린 듯한 카메라 운동에 매혹됐다. 로메르와 샤브롤이 지적하듯이 <살인>의 첫 장면에서 보여지는 긴 측면 트래블링 숏과 프레임, 조명, 무대 장식 들을 본질적인 몇 개의 선으로 처리하는 순수한 미장센은 독일 표현주의, 특히 무르나우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그는 많은 무성 영화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사운드의 도래와 더불어 무성 영화가 갖고 있던 자유로운 카메라 운동과 시각적 표현의 가능성이 종말을 고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이러한 카메라의 운동은 배우와 종종 갈등을 유발한다. 히치콕에게 있어서 인물은 행동하고 지각하고 경험할 수 있지만 그들을 한계짓고 결정짓는 관계를 드러낼 수는 없다. 인물들 간의 관계는 순수하게 카메라 운동을 통해서 보여진다. 그것은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특별한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며, 끝내는 우리 자신의 감성의 리듬에 따라 우리를 하나의 감정에서 또 다른 감정으로 이끌어 가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새>에서 새들의 습격 이후 보안관이 찾아와 미치와 대화하는 장면은 사건에 대한 정황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멜라니의 주관적인 시점 숏과 멜라니를 따라가는 카메라를 통해 어머니의 불안과 근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카메라의 사용은 프레임을 마치 일종의 격자판처럼 엄격한 틀로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서스펜스 혹은 정신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히치콕에게 있어 프레임은 모든 구성 요소들을 제한하는 태피스트리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엄격하고 제한적인 프레임의 사용은 종종 바쟁과 같은 리얼리즘적인 영화 비평가들에 의해 비판받는다. 하지만 히치콕의 혁신은 프레임의 엄격함을 통해 정신적인 관계들을 드러내는 데 있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그가 영향을 받은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기법에 기인한다. 그 당시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기법은 그 뿌리를 멜로드라마와 디킨스의 소설에 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맨섬의 사나이> (1929) 와 같은 초기 무성 멜로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히치콕적인 서스펜스의 원형은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에서 창안한 교차 편집을 통한 서스펜스의 구축과 유사하다. 그리피스는 이러한 기법을 디킨스의 소설에서 배웠다고 인정했다.


히치콕은 영화의 이야기 소재를 극적으로 구성하는 것 또는 극적인 상황을 가능한 한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있어서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세팅을 만들어 낸다. 사건은 <맨섬의 사나이>와 <새>에서처럼 인간을 고립시키는 섬에서 혹은 <로프>에서처럼 시공간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무대 공간에서 발생하거나, 심지어 <라이프 보트>에서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 보트 위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인간을 고립시키는 공간과 환경은 표현주의적인 무성 영화에서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영혼으로 물들어진 풍경 Landschaft mit seele' 과 유사하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표현주의적인 필치의 공간은 많은 부분 그의 영화를 건축적인 공간으로, 예를 들어 <현기증>의 경우 영화 초반부는 샌프란시스코의 도시 건축물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지고,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은 수세기가 지난 집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위로 카메라는 훑어 가고 또한 정지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18세기 스페인풍의 오래 된 수도원 건축물과 종탑은 주인공 스코티의 강박증, 즉 현기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서스펜스, 시네마 - 그라피, 그리고 기억


그러나 히치콕의 영화가 자의적이고 정당화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영화적 논리로서 제시하는 서스펜스의 규칙 때문이다. 만일 히치콕의 엄격한 프레임과 카메라 운동, 그리고 정신적인 세팅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구성적인 측면에서 서스펜스는 이러한 감정을 지속하고 지연시키면서 관객을 영화 속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무고한 사람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뒤집어쓴다는 테마는 사건과 화면의 이중성을 통해 '둘'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짜여져 있다. <의혹의 그림자> 에서 두 주인공, 즉 살인자와 조카는 찰리라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이 둘의 만남은 무죄와 유죄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지워 버린다. <의혹은 전망차> 에서 브루노와 가이는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이혼을 거부하는 가이의 부인을 브루노가 살해했을 대, 그들은 둘로 분열된 한 인물이며 그만큼 가이의 무죄와 유죄 사이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로메르가 지적하듯이 히치콕적인 테마는 단지 무고한 자가 범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범죄를 교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죄가 없다고 보여지는 한 인물이 범죄자와의 접촉으로 해서 그의 범죄에 참여하게 된다. <나는 고백한다> 에서 무고한 신부는 범죄자인 집사로부터 고백을 통해 범죄를 선물받게 된다. <현기증>에서 스코티는 단지 매들린에 불쌍하게 현혹된 것만이 아니라 '거짓된 죄지음,' 다른 한편으로 거짓된 무고함으로 인해 범죄자가 된다. 매들린의 죽음에 대해 그가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민함과 현기증으로부터의 회복은 주디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는 결국 더 이상 무고한 가자 아니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관계들의 체계는 영화를 단지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독, 영화, 관객들의 세 항의 함수로서 나타나게 한다. 그의 영화 전체는 오직 추론을 보여 주는 것이며, 우리는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사건들에 대한 지각과 기억을 통해 행동 및 그것을 행한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관계들을 해석한다. <현기증> 이 순수한 서스펜스의 영화가 되는 것은 이 영화가 액션을 위한 동기를 더 이상 열정들 혹은 비극적인 도덕에서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은 더 이상 사건에 대한 행동적인 동기 부여를 하고 있지 않다. 스코티가 매들린의 차를 쫓아가는 구부러진 길들처럼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관계들을 재해석하고 추론할 뿐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행동, 지각, 감정에 대립해서 관계-이미지 혹은 정신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대중은 영화 속으로 들어와야만 하고 도 한편으로 그들의 반응이 영화의 통합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따라서 서스펜스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이러한 3항 관계에서 비롯된다.


히치콕은 <사이코>를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관객이 순수 영화에 의해 자극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증류된 순수 영화는 다른 한편으로 스타일적인 엄밀함 혹은 작가적 서명과도 같은 기하학적이고 동적인 형식을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히치콕의 영화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와 더불어 선적인 본성을 갖는 시네마-그라피가 된다. 이러한 선적인 본성은 <사이코>의 꺾어진 선들과 흑백 대비,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의 화살표와도 같은 좌표들, <현기증>에서 보여지는 나선으로 현상화된다. 로메르는 히치콕의 <현기증>을 <의혹은 전망차>에서 보여지는 직선과 원의 강박적인 현시와 비교하며 크레딧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나선의 형상을 설명한다. <현기증>에서 직선과 원은 세 번째 차원, 즉 심도의 매개에 의해 결합한다. 이러한 나선형은 스코티가 차 안에서 그려 보는 회로, 매들린의 목덜미에서 보여지는 머리 다발의 나선형, 그리고 스코티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를 종탑으로 이끄는 계단의 현기증적인 나선형으로 나타난다. 로메르는 이러한 나선형적인 소용돌이가 공간 안에서 여행하기보다는 일종의 시간 안에서의 여행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스코티는 단지 과거로의 탐사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거로의 나선형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원을 만들지만 그 고리는 결코 닫히지 않고 우리를 계속 회상으로 깊게 이끈다. 따라서 <현기증>의 건축학적인 공간들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근거는 시간에서의 방향 잃기의 인상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스코티의 능력 마비 상태(현기증)는 공간적인 장에서가 아니라, 시간적인 장에서 발생한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시간에 의해 구성되어 있고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미래로 향해 있는 예감이라기 보다는 과거로 향해 있는 회상 (기억 혹은 추억)과 관련된다. 따라서 <현기증>에서 보여지는 나선형의 나이테는 일종의 이미지-크리스탈을 보여 주는 것이다.





히치콕의 죽음, 고다르 그리고 이미지의 죽음


고다르는 히치콕의 이러한 특성을 영화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히틀러 혹은 나폴레옹 이상으로 실제로 세계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영화를 통해 갖고 있었다. 히치콕은 대중을 위해 이미지와 이미지들의 연쇄를 통해 영화가 여전히 예외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재발견하게 했다. 히치콕은, 고다르의 표현을 빌리면, <오명>에서 보여 주듯이 단지 열지어선 보르도 포도주병을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을 떨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곧 순수한 영화의 힘과 동일시된다.


우리는 <오명>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자넷 리가 베이츠 모텔로 왜 가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은 한 쌍의 스펙터클들 혹은 풍차를 기억할 것이다 --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들. 만일 당신이 <오명>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아마 포도주병들. 당신은 잉그리드 버그먼을 기억 못할 것이다. [반면] 당신이 그리피스 혹은 웰스, 혹은 에이젠슈테인 혹은 나(고다르)를 기억할 때, 평범한 대상들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히치콕을 통한 영화적 힘의 위력은 또한 그의 죽음을 영화사적인 사건으로 만들어 낸다. 1980년 4월 히치콕이 죽었을 때, 고다르는 <네 멋대로 뛰어라 Sauve qui peut (la vie)> (1979)를 갖고 칸을 방문했었다. 이 영화는 고다르에게 있어서 오랫동안의 공백을 깨고 다시 극영화로 돌아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히치콕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치콕의 죽음은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전을 표지한다. 내 생각에 우리는 시각성에 대한 의심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시각성의 쇠퇴로 정의되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시대는 시각성을 억압한다. 내가 느끼기에 지금은 내가 첫번재 영화를 만들 때처럼 여겨진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히치콕은 무성 영화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영상의 힘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재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영화를 카프라, 에이젠슈타인과 더불어 대중적인 예술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히치콕처럼 탄생만큼이나 죽음이 영화의 역사와 더불어 상징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영화의 탄생과 더불어 히치콕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차라리 젊은 나이에 죽어 간 무성 영화와 1980년의 히치콕의 죽음이다. 고다르의 말처럼 영화가 만일 인간의 생명과 유사한 나이를 갖고 있다면, 영화는 이제 그 수명을 다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려는 욕망을 재발견하고 영화의 역사를 기억하는 작업을, 이제 늦었지만 시작해야 한다.













Posted by Alan-Shore :




















요 몇년간 봤던 영화들 중 가장 사랑스럽고 독특한 개성으로 똘똘뭉친 작품은, 느닷없이 영국에서 날아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리차드 아요아데 감독의 데뷔작 <서브마린> 이었다. 2010년에 공개된 이 후 선댄스를 비롯한 이곳 저곳의 소박한 영화제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알리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특별한 이유없이 자꾸 시선이 가는 영화였다. 손을 맞잡은 올리버와 조다나가 무심히 정면을 응시하던 한장의 사진. 그 이미지만으로 충분했다. 분명 좋아하게 되리라 직감했었다.





특별할 것 없는 15세 소년 올리버 테이트의 귀여운 심연으로 빠져들게 만들며 흡사 '올리버 테이트 되기'와도 같은 신비한 탑승감을 선사해줬던 <서브마린>은 독창적인 톤과 근례엔 찾아보기 힘든 사적인 진솔함으로 관객에게 다가서며 영국판 웨스 앤더슨 무비란 기분좋은 별칭도 획득한 작품이다. 영화의 전체 무게감과 맞먹을 만한 매력적인 '남과 여'의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최소 향후 10년간은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와 <아멜리에>가 선점하고 있던 사랑스러운 커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의내려줄 만한 보물이기도 하다. 요즘까지도 툭하면 돌려보는 영화다.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머리를 말리며 돌려보곤 한다. 자세를 잡고 진지하게 감상하지 않아도 <서브마린>의 공기와 세계관이 소박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며 옆에서 돌아가고 있단 느낌에 큰 위안을 받는다. 자꾸 털어 넣는다고해서 더  좋아질건 없는걸 알면서도 흡사 본능처럼 끊임없이 손이 가는 레모나 가루의 마력과도 같달까나.


이토록 소중한 작품을 연출한 재주꾼의 두번째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어찌 이 소식을 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국 시트콤 <아이티 크라우드>의 모스로 얼굴을 알린 그는 아직까진 연출보단 연기자의 비중이 더 크다. 올해 벤 스틸러와 빈스 본 등의 코미디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The watch>에 출연했지만 작품 자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배우로서 헐리웃 상업영화에 안착하는 일엔 헛발을 딛은 것 같다. 대신 2013년에 공개될 그의 두번째 영화 <The double>은 영국에 적을 둔 작품이긴해도 '제시 아이젠버그'와 '미아 와시코우스카' 등을 주연 캐릭터로 캐스팅하며 리차드 아요아데 월드의 세계적 확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Joe Dunthorne 의 동명소설 <서브마린>을 각색해 데뷔전을 치른 그는 이번에도 소설책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 작가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 ! 리차드는 러시아 대문호의 초기작(1846년에 만들어진 2번째 소설)을 기반으로 정신분열과 도플갱어에 관한 어두운 코디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것이라곤 원작의 존재, 런던에서 진행된 촬영, 간단한 컨셉, 몇줄의 인터뷰 그리곤 따끈한 두장의 사진이 전부다. <서브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리차드가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로 촬영됐다고 한다. 이번에 공동 각색에 참여한 이는 하모니 코린의 형제인 아비 코린. 아직까지 IMDB에 공개된 시놉시스는 달랑 한줄이 전부다.


A comedy centered on a man who is driven insane by the appearance of his doppleganger.


아직 영화의 정식 시놉을 접하진 못했으니 원작의 스토리를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예상하는 수 밖에 없겠다. 1846년에 완성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골랴드킨은 승진을 꿈꾸는 평범한 관리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인지 그의 미래는 암담해 보인다. 절망에 빠진 골랴드킨은 그것이 어떤 음모와 관련된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에게 극도의 모멸감을 불러 일으킨 사건 이후 그는 거리에서 또 다른 골랴드킨과 마주친다. 그들은 처음에는 서로 종속관계를 유지하지만, 이 관계는 점차 경쟁자로, 적으로 발전한다. 제2의 골랴드킨은 원조 골랴드킨이 근무하는 동일 관청에서 직책을 얻게 되고, 원조가 실패한 승진의 기회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처럼 보인다.



정신분열 내지 도플갱어로 압축되는 스토리의 외형에 제시 아이젠버그와 리차드 아요아데의 인터뷰를 더해 보자. 지난 5월에 시작된 촬영은 진작 완료되었고 현재는 어느정도 작품의 편집까진 완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 속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대부분의 배경을 세트로 만들어 도시 전체를 완성했다고 한다. 거기다 도플갱어란 컨셉에 맞게 기본적인 특수효과도 가미되니 확실히 이번 영화에선 자본의 덩치가 불어난듯 싶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장르에 대한 이야기인데 코미디와 호러가 반복적으로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아이러닉한 컨셉에 맞춘 블랙 코미디의 구조에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로 가득한 공포영화의 어두운 톤이 배경이 깔린다고 한다. 인터뷰를 읽다보니 원작의 1846년을 현대적으로 각색함에 있어 그 배경을 평범한 현대 런던이 아닌 독특하고 침울한 별도의 공간으로 상정해 이야기를 꾸며나갈 것 처럼 보인다.    


 



위의 이미지는 몇일전에 처음으로 공개된 <The double>의 스틸샷이다. 미아 와시코우스카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무기력한 본체를 연기하고 있는 듯한 제시 아이젠버그의 캐릭터는 슬쩍 훔쳐볼 수 있다. 반가운 것은 두번째 사진에서 제시 옆에 서있는 배우 노아 테일러. 그러니깐 그는 <서브마린>에서 주인공 올리버 테이트의 심약한 아버지를 연기했던 배우이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데뷔작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상당수가 이번 신작에도 참여한다고 한다. 매력적인 그녀 야스민 페이지 (조다나)도 함께 한다. 단지 익숙한 배우의 출연이 반가운게 아니다. 독창적인 데뷔전을 치른 감독들이 헐리웃으로 넘어가 메가폰을 잡곤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았던, 그 괴상한 코스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즐거운거다. 자국 시장에서 규모만 조금 키워 자신의 색을 그대로 유지해갈 수 있단게 얼마나 기쁜일인지, <타인의 삶>을 만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이상한 헐리웃 데뷔작 <투어리스트>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았었나.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더라도 유지가능한 색과 신선한 가능성만 보여줄 수 있다면 괜찮은거다.  모든 단서를 긁어모은 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겹쳐질만한 영화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에드가 라이트의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를 기다리던 설렘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리고 이 영화는 과연 한국의 스크린에 걸릴 수 있을까. <서브마린>은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결국 DVD를 살 수 없었다. 그의 두번째 영화를 기다리며 <서브마린>의 트레일러를 한번더 플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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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 러프컷

2012. 11. 25. 00:29 from Cinema/Connection



요즘은 영화에 관한 글들을 잘 읽진 않지만 몇 해 전만해도 꽤나 착실하게 주간지의 비평을 찾아보던 사람이었다. 지금보다 매체도 더 많았고 그만큼의 선택의 폭도 넓었던 시절, 난 영화를 이야기하는 글쟁이들 중에서도 김영진의 비평이 가장 멋지게 느껴졌었다. 깔끔한 문장과 줏대있는 시선이 부러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필름 2.0'의 말미 코너 <러프컷>에 큰 동경을 느꼈고 이 글들을 다 읽으면 나 역시 이처럼 멀끔한 글을 쓸 수 있게되지 않을까 ... 라는 말도 안되는 환상을 품곤 매주 그의 글들을 정독 했었다. 허나 항시 자신들이 다루던 영화의 모습과도 같이 '필름 2.0'은 어느날 홀현히 사라져 버렸다. 잡지가 사라지면서 그간의 칼럼과 기사를 보관해오던 웹페이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상한 의무감이 들었다. 말도 안되는 책무를 껴안고 제 목숨을 내던져가며 이름모를 공주의 목숨을 위해 무작정 모험길에 오르던 어느 동화 속 멍청한 왕자들 마냥 대한민국 웹페이지에 산재해 있는 <러프컷>의 조각들을 모두 모아야만 한다는 다짐을 하게됐었다. 105개의 칼럼과 2개의 인터뷰. 총 107 개의 포스팅으로 꾸며진 김영진의 <러프컷> 블로그는 그렇게 완성됐고, 글들을 한 곳에 모은지 거진 2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새삼 기억이 떠올라 이렇게 링크를 걸어본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저 블로그를 개설한 아이디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저기서 멈춰짐이 숙명과도 같은 모음집에 불과하니 아이디를 기억해낼 필요도 없겠지. 김영진의 글. <러프컷>.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찬찬히 살펴보도록 해보자.  


Rough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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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 <바벨>, <비우티풀> 의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뜬금없이 단편 하나를 내놨다. L.A. 댄스 프로젝트인 'Moving parts'의 리허설에 초대 받은 후 연출을 결심했다니 분명 그들의 춤사위를 보며 큰 감명을 받은 것 같다. <Naran Ja> 란 타이틀의 이 12분 짜리 작품은 완벽하게 실험영화의 영역으로 편입돼있다. 어떤 느낌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찬찬히 뜯어봐도 1그램의 의도도 추측하기 힘든 난해함으로 가득하다. 초현실적인 구성과 심플한 연출, 도통 시대성을 파악하기 힘든 VHS 스타일의 거친 출력. 솔직히 말해서 맥주 몇잔을 걸친 상태에서 접했기에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지 맨 정신이었다면 뭔지 모를 찝찝함에 감상을 중도포기하고 말았을 것 같다. 이상한 기록물이 추가됐다. 그간의 연출 스타일과도 완전히 격리된 괴작이다. <바벨>의 황량한 사막 정도가 언뜻 떠올랐을 뿐. 이 경우에 꼭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춤이란 행위는 장르와 매체의 틀을 허물어 독보적인 진솔성을 담보해 주는 것 같다.








Posted by Alan-Shore :

이번 가을

2012. 11. 24. 18:13 from I​nfluence/Private













                          































무엇을 보았느냐.

어떤 것을 느꼈느냐.

아무것도 없었구나.

가을만큼이나 희미허네.

Posted by Alan-Shore :






희안한 공통점이다. 여기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두편의 뮤직 비디오가 있다. 뷔욕의 'Mutual Core'와 R.E.M.의 'Blue'. 각각 2011년에 발매된 <Biophilia> 와 <Collapse into Now> 에 수록됐던 곡들이다. 그러니 작년에 발매된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이제서야 정식 공개된 것이다. 물론 저마다의 사정은 있다. 그리고 그 사정에 대한 배경 또한 비슷한 구석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홍보를 위한 연출가의 영입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 필연적인 인연이 닿아 완성된, 작품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 내지 애정의 상징이 느껴진다. 일단 뷔욕의 'Mutual Core' 뮤직비디오 공개는 완전 생뚱맞은 일처럼 보이진 않는다. 5일 전에 릴리즈된 뷔욕의 리믹스 앨범 <Bastards>에 'Mutual Core'의 리믹스 트랙 2곡이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 앨범은 그간 공개됐던 정규 7집 <Biophilia>의 리믹스 트랙들을 맨디 파넬의 리마스터링을 통해 한 곳으로 모은 것이라고 한다. 


matthew herbert's teutonic plates mix



These New Puritans Remix featuring Solomon Islands Song




리믹스 앨범이 나왔다해도 이번 뮤직비디오는 정규트랙 버전에 맞게 제작된 것이니 경과의 텀을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Mutual Core' 뮤비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 사유를 파헤쳐 본다면 앤드류 토마스 홍이란 이름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는 Delphic 의 'Doubt'를 연출한 뮤직비디오 연출가이자 기괴하고 아름다운 단편 <SOLIPSIST>를 탄생시킨 사나이다. 기사를 통해 접한 전언이나 작품의 공통성을 추려봤을 때 이번 뮤직비디오는 앤드류의 <SOLIPSIST>가 뷔욕에게 강렬한 자극을 전해준 결과 탄생된 결과물이라 판단된다. LA MoCA 의 관장 제프리 다이치의 주선에 의해 마련된 기회이지만, 그러한 배경을 떠나 순전히 작품에만 집중해 본다면 참신한 예술가의 영감이 위대한 뮤지션에게 신선한 자극을 미친 유쾌한 케이스라 여겨진다. 뷔욕의 뮤직비디오를 보기 전에, 신체변형의 아찔함과 유기적인 관계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앤드류 토마스 홍의 단편 <SOLIPSIST>를 감상해 보자.  






사실 뷔욕의 음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작년에도 이 앨범을 처음 듣곤 약간의 흥미로움만 발견했을 뿐 이내 목록에서 밀어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뮤직비디오 만큼은 평생을 두고 씹고 뜨고 맛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각적인 판단에 익숙해진 영상세대로서 시각자료와 함께한 첫만남의 긍정적 편견은 숱하게 경험해왔지만 이런 방식으로 영상물의 후광이 음악에 대한 시선을 역전시킨 경험은 얼마 없었다. 비록 일년이 경과한 트랙이지만, 이 뮤직비디오 만큼은 2012년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불안한 아름다움이란 양가감정을 이보다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아래 영상은 <Mutual Core>의 뮤직비디오다. 그리고 그 아래에 첨부된건 유튜브 리플을 통해 완성된, 본 뮤직비디오에 대한 앤드류 토마스 홍의 QnA 영상이다. 
















R.E.M. 의 'Blue'는 연출자의 이름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이번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이는 배우 제임스 프랭코다. <127 시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필모의 빛나는 한 순간을 장식했던 그가 이번 작품을 연출했다. 솔직히 말해서 'Blue' 의 뮤직비디오는 큰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UCLA, 뉴욕영화학교 학사에 이어 예일에서 박사과정을 진행중인 수재형 배우인 그는 창작에도 끊임없는 욕구를 펼치고 있다. 몇편의 단편과 <브로큰 타워>나 <살> 같은 장편을 통해 꾸준하게 연출경력을 쌓아가곤 있지만 그 재능에 대해선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다. <세러더이 나이트 라이브> 다큐멘터리의 연출에서 부터  <스프링 브레이커스>를 통해 하모니 코린과의 콜라보를 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엄청난 스펙트럼의 취향인인건 분명한듯 싶다. 제임스 프랭코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구스 반 산트의 <아이다호> 를 재건하며 리버 피닉스에게 존경을 표한 <My own private river>가 아닐까. 가장 평가가 좋은 작품이기도 하고 형식적인 측면에선 비디오 아트의 영역에 편입될만한 신선함이 느껴졌다. 여기 얼마전 공개된 R.E.M. 의 'Blue' 뮤직비디오가 있다. 미국 내에선 제임스 프랭코의 연출보단 린제이 로한의 출연에 더 주목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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