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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and Video art
 






1. 이야기를 시작하며...


조사를 진행해 나갈수록 애초의 발상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시물로서의 영상예술, 앞으로 주요하게 다루게 될 비디오(미디어)아트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과 몇 번의 우연한 만남만만을 상기하며 지레짐작식의 나태함으로 일관해온 내 스스로가 초래한 실수였다. 영상예술의 범위 내에 소속된 개별 요소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위치와 상호간 영향력의 관계에서 예술이란 공식석상의 끄트머리에 몸을 담그고 있는 (처음으로 숫자를 명받으며 그 후 나타난 8,9의 예술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는 7번째 늦둥이로서의) 영화의 존재를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초의 계획은 정지된 이미지에 생명을 부여해준 영화가,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아방가르드적 전복사고의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통해 혁명적 예술사고의 유연성을 가능케 해준 영화가,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통한 영상의 개인적 소유와의 교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도전정신과 만나 TV란 (부정적 늬앙스로서의) 매스 미디어를 향해 펼쳐온 극복과정의 결과물로서 걸어온 행보를 살펴보려는 것이었으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였으며 비디오(미디어)아트를 이해하는 단계에서 별 도움이 안 되는 초점 맞추기였다. (계속된 자료 조사를 통해 느낀 바지만)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이전 예술에 비해 보다 복합적인 결합물의 형태를 띄우고 있었다. 이 둘은 모든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폭발하는 지점에서 분명한 시작점을 획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물론이며, 도전적인 영화작가들의 영감과 정신을 저변에 깔고 현대미술,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플럭서스 운동 등의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유발된 영상의 용광로인 비디오(미디어)아트를 단순히 영화의 영향력에 얽매어 언급하는 건 본질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는 편협한 근시안적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 초 제출한 계획서에는 멜리에스로부터 촉발된 영상의 무한한 가능성이 숱한 기성극복의 사상과 도전적인 표현기법의 흐름과 만나 60년대 비디오 아트의 탄생까지, 그에 미친 영향력과 이 후 실험/언더그라운드 무비 등의 인상적 순간들을 회고하며 비디오 아트(미디어 아트)의 영상적 실험정신에 비견할만한 현대 영화작가들의 오늘 까지를 알아보고자 했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영화와 영상예술이란 구색을 위해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몇몇 비디오(미디어)아트 작품을 덧붙이고자 했었다.


목차는 완전히 뒤집어 졌다. 물론 여전히 이곳의 타이틀은 <영화와 영상예술>이다. 하나의 중심챕터를 이루던 영화 속의 실험적 표현은,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영화를 활용하는 이유 그리고 내 스스로 본 주제를 선정한 ‘왜 영화일까?’의 서문에서 그 발자국만 남겨놓고 과감히 삭제하고자 한다. 애초의 논지는 현대 미술관 곳곳에 베여있는 발전적인 실험정신과 그 반복의 과정에서 피어날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가능성의 교훈을 점점 망각해가고 있는 현대의 영화적 흐름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자 하였다. 과거에는 분명히 예술적 가치발산의 장이기도 했던 영화란 영역이 어쩜 이리도 다양성 소실에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상업성 핑계에만 매달려있는지, 그리고 관객들은 어찌 충돌과 실험의 역사가 현재 우리가 누리는 보편성의 씨앗임을 망각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무감각히 스스로의 활동반경을 좁혀나가는지 스스로 묻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가 예술내지 문화를 대면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디오(미디어) 아트에 대한 접근과정에서 보다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아트 작업과 영화 본연의 구조에 대한 탐색을 위해 공간성과 상호작용을 몸소 경험하는 실험적인 비디오 설치 작품들이었다. 영화의 장면을 차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은 ‘피쳐링 시네마(작년에 국내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사용한 명칭이나 외국에서도 이와 같이 명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사와 시간경과란 영화적 특성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창의적으로 충돌시키면서 지독한 익숙함을 이용해 기시감의 역발상을 유발하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고정적이며 한정적인 영화 관람의 범위가 암실을 벗어나 개개인의 소유에 까지 미치는 과정과 함께 비디오(미디어)아트의 시야확대가 이뤄지며 점차 그 수가 증가해 오고 있다. 단순히 편집을 이용해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에서부터 사운드와 공간을 활용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때때론 오마주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직접 세트를 짓고 새롭게 촬영을 하는 방식에 이르기 까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당 초 2,3 작품의 간략한 소개로 마치려했던 이 분야가 새로운 핵심 주제로서 부상하게 된 것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 창작물속에 내재된 잠재력에 대한 관심과 흥미 때문이다. 잠재력이란 표현은 본 분야가 내재한 힘과 영향력에 대한 기대이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이에 대한 관심 내지 시도가 여타 다른 장르에 비해 폭이 넓지 않으며, 더욱이나 현 한국예술계에선 그 시도가 미미한 수준이기에 끌어온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도록 하고, 아무런 존재이유 없이 자질구레 길기만 한 지금까지의 주제변경의 변은 앞으로 진행될 구성에 대한 보고를 끝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왜 영화인가’ 라는 선언이 아니라 ‘왜 영화일까?’ 라는 자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어찌하여 숱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영역에서도 이다지도 자그마한 공간에 깃발을 꽂았는지, 그리고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가들은 어찌하여 창작적인 촬영물이 아닌 참조의 방식으로서 남의 이야기를 빌어 작품을 구성했을지, 나름의 생각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반부는 영화를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들에겐 족보랄 것이 없어 깔끔히 구분 지을 울타리가 마땅치 않았다. 다소 자의적이고 산발적으로 이야기가 진행 될 것 같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된 부분과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스스로 정리해보며 앞으로 다가올 ‘파운드 푸티지’ 기반 혹은 영화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업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왜 영화일까?


서로 간 봉합의 흔적마저 서서히 옅어져가는 현 예술계의 동향을 생각해본다. 지금 나의 시각에서는 양자 간 선후 관계나 영향력에 대한 이론적 서술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거니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부분이다. 고집스레 영화가 내려준 영상으로서의 단초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속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본 주제에 해당되는 비디오(미디어)아트 작품에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존재 가치를 통해 이유와 효과와 교훈을 깨닫고자 한다. 순전히 아마추어적인 입장에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나는 영화가 좋다. 그러하기에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이야기하면서도 애써 영화를 끌어당기는 것 이다. 통상적 흐름을 파괴하며 반서사의 기지아래 극단의 위치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영화 기반 비디오(미디어)아트 작업은 영화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불투명한 거울과 같다고 생각한다. 흐리고 뭉그러진 모습으로 자신을 비춰주지만 그 속의 본질은 분명 자기임을 인지하게 하기에, 스스로를 자세히 보려 애쓰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면 일상에선 깨닫지 못한 새로운 교훈을 자각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고 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영화의 이름앞에 불투명한 거울이 되어 발전적 방향으로 교훈을 제시한다고 보진 않는다. 단순히 영화 이미지를 차용할 뿐 온전히 비디오(미디어)아트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미적 심상을 고취시키는 선에서 끝나버리는 작품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The maybe...


지금부터 영화가 선택된 이유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의 이미지는 1995년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 전시됐던 코넬리아 파커의 <어쩌면>이란 작품을 찍은 사진이다. 유리관 안에서 한 여인이 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날 저 상태로 8시간을 잤다.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튀어 오른 것은 이 이미지였다. 이 작품이 내 뇌리에 정확히 박혀있을 수 있던 이유는 평온히 잠을 청하고 있는 저 여인의 이름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틸다 스윈튼. 하지만 단순히 그녀가 유명한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이라는 작품에 대한 강력한 각인효과가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영화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진한 인상을 심어주는 측면은 존재하겠지만 이는 단순 해프닝으로서의 구경거리를 넘어 그 저변에 깔린, 영화라는 존재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영향에 대한 견고함을 상기시켜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가 복잡히 얽힌 집중력. 작품 속에 영화가 개입하는 순간 관람객의 사고는 단순히 작가의 메시지 내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우리와 일생을 함께하며 모든 감각과 숱한 감정의 기억을 공유해온 영화란 존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직면한 대상에 대한 경험적 환기를 통해 개인적인 다양한 사고와 작가의 주제 표현을 뒤섞어 작품의 감동을 획득한다. 이러한 작용은 비단 영화 뿐 아니라 대부분의 매체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2002년 오마 페스트가 만든 <CNN Concatenated>를 떠올려보자. CNN의 아나운서와 캐스터들의 한 음절씩을 차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 이 작품에서 설파하는 표면적 단어의 나열은 굉장한 영향력을 지닌다. 이는 대중의 수용방식에 대한 비판인 동시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상기 시켜준다.


CNN Concatenated 


이러한 차용은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들어나게 해주는 친대중적 몰입도를 획득한다. 우리는 영화를 기반으로 완성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창작물을 대면하며 각자의 기억과 감각을 안고 완성된 이야기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 이다. 가장 쉽게 표현해 자신이 감상한 영화가 미술관 한켠에서 영사가 되고 있다. 그는 편견과 기대를 품고 호기심어린 발걸음을 떼게 될 것 이다. 우리의 삶 전반에 세포처럼 내제화 되어있는 영화라는 이름의 기억이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의 실험적인 표현과 주제전달의 좋은 미끼가 되어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대척점의 매력 또한 발생된다. 확신과 기억을 안고 다가선 관객에게 작가들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파괴의 미학으로서 영화에게 가학을 행한다. 관객의 망막에 닿는 이미지는 이미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에 혼란이 초래된다. 파괴의 미학인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품들이 선사하는 세계는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관을 초토화 시킨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동시적으로 활용하여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친대중적 몰입도와 함께 동시발생적으로 이는 양가적 감정으로서의 역기시감을 한데 섞어 환각적 배경을 구축하며 친숙한 초대와 붕괴적 선언을 이용해 강력한 파급력을 발생 시킨다.


The era of cinema


다음으론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옆에 제시된 작품은 21 미터 길이의 설치 비디오로 1890년대부터(정확히 1896년의 멜리에스의 영화) 현재까지의 작품을 시대사 별로 차례차례 이어붙이며 순차적으로 피사체를 움직인 <The era of cinema>이다. 중심인물이 시대를 통해 좌에서 우로 움직일 때 마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그를 좇는다. 이러한 행동적 유도는 영상으로서의 영화가 지닌 역사성과 대표성 그리고 시적영역에 있어서 영화가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위치를 말해준다. 각자의 영상 아래는 년도가 표기된다. 영화는 시적 구분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친숙히 설명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영상과 이미지를 보며 시간을 상기하고 구분한다. 매해 영화는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을 탄생시킨다. 단순한 스타의 표상이 됐건 작품적 경탄이 됐건, 영화는 우리의 옆에서 대표적 영상매체로서의 기억을 공유한다.


기록되어 영사되고 투영되는 방식은 어떻게든 시간성을 가지게 된다. 비디오(미디어)아트와 영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시간성’이란 숙명을 지닌다. 이러한 공통특성은 본 장르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 ‘시간’이란 주제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영화를 참조하는 이유는 시간을 품고 있는 방식에 있어 상호간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적 제약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화는 서사라는 틀을 배경삼아 고유의 영역 내지 특징으로서 이를 소유하며 직선적으로 시간을 표현한다. 이에 비해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의식적으로 서사를 회피하는 과정에서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며 순환적인 시간을 선택하며 동시성과 즉시성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른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의 대 시간 개념은 비디오(미디어)아트로 하여금 판이한 시간적 배경을 옮겨와 영화를 새롭게 정의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변환의 흥미를 느끼게끔 해주는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작품의 대부분은 시간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직선적 시간성과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파편적이고 순환적인 즉시적 시간성을 동시에 활용하며, 그 어느 소재보다 시간의 개념을 폭 넓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기에 많은 작가들이 영화를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마디로 영화를 활용한 비디오 (미디어)아트는 시간개념 활용에 유리한 뛰어난 시적 활용처라는 뜻이다.



Sync 연작


이미지는 언어에 종속되기에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영화는 언어를 탐하고 통상의 비디오(미디어)아트는 분명한 서사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발생한 차이이다. 하지만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영상영역에서 영화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영화 자체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란성 쌍둥이 같이 비슷한 유전자와 제각각의 외모를 지녔다. 언어를 탐하고 서사를 회피한다는 건 두 개의 영역이 차별성을 지니는 동시에 언어와 이야기란 경계선을 중심으로 서로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디오(미디어)아트는 결국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정된 서사의 파괴와 이미지 반복, 시간적 왜곡, 거울 이미지 등을 통해 표현된다.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는 숙명적 관계로서, 그 존재 자체가 서로에 대한 반사이며 반영이기에 작가들은 영화를 차용하며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분신에게 영상예술로서의 새로운 고민과 표현의 확장 단초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24 hr Psycho (iphoto re edit)


마지막으론 현 시점에서 영화의 이미지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유된 자원임을 강조하고 싶다. 창작에 있어 소통의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하고 절실해진 현 세대에서 창작품을 만드는 일은 단지 기성 작가의 고리타분한 업무가 아니다. 손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자. 더글라스 고든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의 초당 프레임 수를 조정해 아주 느린 속도로 영화를 재생하며 무려 24시간 동안 영화가 진행되도록 만든다. <24시간 싸이코>는 시간경험의 독특한 예를 보여주며 많은 관람객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 후 유튜브를 통해 많은 오마주격의 영상들이 올라오게 됐다. 그중에는 <24초 싸이코>와같이 시간개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데스크탑의 슬라이드쇼를 사용해 상반된 느낌의 음악과 자신만의 영상효과를 가미하며 전혀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 냈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현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소통과 참여의 장에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작업이 내제하고 있는 공유된 자원의 특성이 잘 어울림을 알려주는 경우라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영화란 매체 자체가 가진 친대중적 몰입도와 비디오 아트 특유의 파괴적 형식이 결합해 관람객의 기억과 감각을 쉽게 끌어당긴 후 전혀 새로운 지점으로 유인해 강렬한 주제의식을 전달 해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 상반된 시간적 속성의 경계를 오가며 여타의 비디오(미디어)아트 소재보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간에 대한 사고를 진지하고 효율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본 작업은 영화매체 그 자체에 대한 은유적인 집중으로서 반 영화적인 해체 작업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는 자기 지시성 내지 자기 반영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공유된 열린 자원으로서의 영화 이미지는 수많은 상호작용과 파급력을 이끌어 낼 수 있기에, 개인에게 기술적 도구가 충분히 지원 가능한 현 시대의 흐름에서 즐겁고 흥미로운 공유의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의미의 예술적 확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위의 4가지 주요 사유뿐 아니라 일상에 박힌 숱한 조각들을 임의로 골라 이쁘게 찢고 오려붙여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본 작업에 어찌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재밌는 일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이다. 본격적으로 작가들을 소개하기 전에 본 작업의 선조격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우선하고 싶다.



looking for alfred


3. 파운드 푸티지 필름


영상 창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과 궁리를 연속하고 있는 이 땅의 작가들의 사고 한켠에는 분명히 선대의 영화작가들이 호기심의 이름으로서 힘껏 끌어당겨온 경이로운 표현의 발견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파운드 푸티지’를 기반으로 영화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려는 작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빛과 암실, 그리고 작가와 관객의 관계를 통해 빛의 예술이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심상은 어떤 것일지 골똘히 몸소 실천해보는 여타의 작가들의 활동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탄생한 지도 벌써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구조적으로나 시대상으로나 영화시장의 영역 내에서 예전과 같은 도전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예외적 대우를 받는 극소수의 영화작가가 아니라면 영상언어로서 참신한 운을 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직관적인 투명성을 내포한 표현적 측면의 예술로서 영화를 반가이 맞아주지 않는 시대이지만 그간 영화가 남겨온 족적을 매만지며 영상예술로서의 영화를 고민하고 계승하고자하는 작가들이 근접 분야에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곳에선 본격적으로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를 소개하기에 앞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예술 창작물들의 실질적인 선례를 짚고 넘어가보고자 한다. 이는 특정 장르를 파생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지점에서 묵묵히 흘러온 여러 영향력들이 어느 우연한 시점에서 만나 한데 뭉쳐져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게 되는 오딧세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 장르의 직접적인 선조격인, 바로 윗세대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에 대한 이야기다.


1895년 영화는 열차와 함께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후 멜리에스는 카메라의 일시적인 고장을 계기로 수많은 영화적 표현 기법의 힌트를 얻게 된다. 초창기 작가들은 표현의 다양화를 위해 몽타주, 서사, 장치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진행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 중에서도 본 장에서는 영화 내 시간과 공간을 구축하고 합성하는 몽타주 기법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부분을 조립한다는 의미의 몽타주는 필름의 단편을 조립해 영화적인 시공간을 창조하여 작품 내 현실을 구축하는 방식인데, 1920년대 소비에트에서 활발히 이론화된 본 기법이야 말로 영화의 조작과 변형을 기반으로 하는 ‘파운드 푸티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숙지해야할 개념이다. 파괴의 미학이라는 ‘파운드 푸티지’ 영상작업은 필름과 필름을 이어 서사와 공간의 구축하는 몽타주와 비교해 그 의도성만 다를 뿐 기본적 존재원리는 상당히 유사하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 은 영화가 탄생한 후 고작 7년 만에 첫 명함을 내밀게 된다. 지난 수업시간에 감상했던 에드윈 S. 포터의 1902년 작 <어느 미국인 소방수의 생애>는 최초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에디슨의 회사에서 일하던 포터는 어느 날 영화 저장소에서 자료를 찾다 소방서에서 찍은 다양한 촬영물을 본 후 영감을 얻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이 후 소련에서는 혁명 직 후 에스퍼 I. 슈브가 헌 필름 (Cast off film)을 이용해 1927년에 <레마노프왕조의 몰락>과 <위대한 길> 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 작품들은 초기의 대표적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흐름은 이어진다. 초현실주의 미술가 조셉 코넬은 파운드로 달아 판매하는 ‘헌’ 영화를 수집하여 20여개의 실험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대표작으로는 1936년에 제작된 <로즈 호바트>가 있는데 이는 로즈 호바트라는 여배우가 1931년작인 <보르네오의 동쪽>에서 출연한 장면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코넬은 그녀가 나오지 않는 장면과 액션장면에 삭제 및 재편집 등을 거쳤으며, 여기에 과학영화 등을 삽입하며 이야기의 연속성을 해체하였다. 19분 짜리 헐리웃 산 실험영화는 16프레임이라는 느린 속도와 다크 블루 필터의 사용, 삼바음악의 차용 등으로 전에 없던 독특한 의미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새 기준을 제시하게 된다. 1958년 브루스 코너가 연출한 <영화>라는 작품에서는 뉴스 릴과 과학영화, 포르노, 릴 필름 등을 앗상블라주 기법을 활용해 통합하며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한 차원 발전시키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켄 제이콥스의 1985년작 <퍼펙트 필름>과 레즐리 손튼의 1997년작 <올드 월디> 등의 대표작들이 주목을 끌으며 현대까지 그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는 스테파니 바버와 같은 작가가 가장 큰 주목을 끌고 있다.



Rose hobart (re edit)


전혜숙 교수는 대부분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들이 어떤 파운드 푸티지를 근거로 했는가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파운드 푸티지 필름’ 방식자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영화>와 <로즈 호바트>를 예로 들며 이들 작품은 자신 스스로가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되어있음을 애써 강조하며 영화의 구조 자체를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영 화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역설적인 작업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 특유의 혼란스럽고 낯선 지각적 교란은 비디오(미디어)아트 장르의 특성과 닮아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작업방식은 훗날 많은 비디오(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작을 통해 어떤 서사적 변화가 발생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조작되었는가에 집중하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작가들의 작업방식은 그대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예술 창작 작가들에게도 이어졌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매체인 영화를 해체하며 그가 지닌 조작의 힘과 리얼리티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4. 영화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가들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현대미술 관련 서적과 film, movie, cinema, found footage, video art, media art 등의 키워드를 조합해 닿을 수 있는 모든 웹페이지를 뒤져본 결과 총 21인의 작가가 만든 38편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영화 이미지를 토대로 새로운 재해석을 가한 작품이 30편이였고, 특정한 씬을 리메이크 하거나 영화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 작품은 8편이였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마르코 브람빌라 - Civilization, Evolution , Sync, Sync watch, Sync fight, Ritual compositon No.1, Flash back

피에르 위그 - Dubbing, Remake, The third memory, L'ellipse

더글라스 고든 - Through a looking glass, Deja vu, 24hr psycho

칸디스 브라이츠 - Soliloquy trilogy

크리스찬 마클레이 - Video quartet, Watch, Telephone

제니퍼 & 케빈 맥코이 - Horror chase, The kiss, Traffic series, Learning from las vegas

마이클 호아퀸 그레이 - The blink

요한 그리몽프로 - Looking for hitchcock, Double take

브루스 코너 - Cosmic ray

크리스토프 지라르데 & 마티아스 뮐러 - kristall

임민욱 - 희생

노재운 - God4saken

트레이시 모펫 - Mother

올리버 피에치 - The shape of things

Cinezoique - The era of cinema

안소니 맥콜 - Line describing a corn

구스타프 도이치 - a girl and a girl

벤 러셀 - The black and the white gods

자넷 카디프 & 조지 브루스 밀러 - The paradise institute

아이작 줄리언 - Ten thousand waves


직접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조사할 수 없는 주제이기에 위의 목록에 올라온 작품 중 12편 가량은 간단한 설명과 함께 몇몇 이미지만을 보는 수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26편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 올려놓은 영상을 보거나 관람객들이 어설프게 촬영한 짧은 기록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가 의도한 공간속으론 참여하지 못한 채 방한구석에서 상상을 가미해 써내려간 반쪽짜리 경험이지만 그간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작품들의 구성을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추후삽입 – 투명성이란 표현을 좋아한다. 철저한 비전문가로서 수잔 손택이 강력히 주장해온 예술 감상에 있어서의 직관적 투명성을 다년간 믿어오고 실천해온 사람으로서 각각의 작품에서 예리하게 의미와 장점을 추출해 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엉터리로 끼워맞춘 부분도 있으며 비평가의 생각에 기댄 부분 상당수 있다. 4장의 보고는 작품의 작동원리와 대략적인 지향점 정도에 초점을 맞춰 주시길 바란다.]


이번 주제선정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선사한 작가 마르코 브람빌라의 작품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전 미디어 아티스트 7인이 모여 만든 실험영화 <제한해제>를 국내의 한 영화제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7편의 작품 속에서도 유난히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본 작가가 연출한 1,2분 분량의 아주 짧은 단편 <Sync> 였다. 이는 남녀가 만나 성행위를 하는 순간을 영화와 각종 영상물에서 추출한 후 이를 이미지 단위로 뽑아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어지도록 배열하며 숨 쉴 틈 없는 드럼 비트 아래에 깔아놓은 작품이었다. 


마르코 브람빌라는 <Sync>에 대응하는 반응물로 <Sync fight> 와 <Sync watch> 등의 작품을 만드는데 전자는 각종 영화 속 폭력적인 싸움 장면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각각 별도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토록 하였으며, 후자는 성행위와 폭력적인 싸움 장면에 맞춰 극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며 감동하고 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시각이 겨우 쫓을 만한 빠른 조각들의 연결로서 보여주고 있다.


Sync

Sync watch

전시회에서는 3개의 스크린을 설치하여 정신없이 쏟아지는 성과 폭력의 이미지들을 영화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관람하게 만들고 있다. 짧은 순간을 구성하기위해 수백편의 이미지들을 범람시키는 본 작품은 영상 속 움직임의 구성 원리를 새삼 느끼게끔 하는 동시 우스꽝스러운 관계형성을 통해 매체 자체에 대한 비판을 동반한다.



Flashback


Ritual composition No.1


Cvilization Evolution


Evolution



브람빌라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잘게 쪼개진 조각들이 이루는 큰 그림의 활력 넘치는 전달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Flash back>과 <RItual composition NO.1>의 경우 <Sync> 연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화면 속에 유사 속성의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배열하며 활동적인 이미지의 분절되고 연결되는 효과를 통해 각각의 주제를 잘 이야기 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브람빌라는 거대한 세계를 구성해 상징성을 지닌 이미지의 차용을 통해 주제를 전하기도 한다. <Civilization> 과 <Evolution>의 경우가 그러하다. 본 작품들은 종과 횡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미지를 연속하며 거대한 세계관을 이룬다. 문명과 진화의 타이틀에 적합한 수백편의 영화 속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하나의 웅장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지금껏 감상한 모든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본 작품들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지니게 된 상식과 기억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거대한 인공세계를 구축한다. 비디오(미디어) 아트 장르 뿐 아니라 영화와 뮤직비디오 장르에서도 활동하는 작가이며 아무래도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는 작가이다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상 싸이트에 공유되고 있어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24hr Psycho


다음으론 시간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 더글라스 고든에 대한 소개이다. 앞서 간략히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대표작인 <24hr psycho>는 극한의 슬로우 모션 기법을 사용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유례없는 시간적 경험을 경험토록 유도한다. 영화 <싸이코>의 유명한 욕실 살해 시퀀스는 본 작품에서 1시간 가량 지속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대면하면서 끊임없 이 기억과 또 다른 사고와 마주한다. 이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특유의 파괴적인 형식 실험인 동시에 현대적 의미의 지나친 쾌락의주적 편집에 대한 반발이며, 영화적 경험을 매개로 관람객에게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묻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더글라스 고든은 <Deja vu> 를 통해 헐리웃 스릴러 영화 <D.O.A>를 세 개의 스크린에 재생시키며 각각 초당 25,24,23 프레임의 설정으로서 살짝 씩 어긋나게 배치한다. 연속된 세 개의 이미지는 소량의 시간차로 조금씩의 차이를 보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환상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Through a looking glass


뿐만 아니라 <Through a looking glass> 라는 작품을 통해선 더욱 적극적으로 관람객들을 기억의 장소로 초대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한 장면인, 트래비스가 거울을 보며 읊는 "You talkin' to me?" 라는 대사를 듀얼 스크린을 이용해 각각 반대쪽 스크린에 재생 시킨다. 주인공이 내뱉는 이야기를 동일한 스크린에 펼쳐내며 관객을 그 속으로 밀어 넣는다. <24hr psycho>가 영화를 통해 시간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제시해본 실험이었다면 <Deja vu> 와 <Through a looking glass>는 영화적 경험을 기반으로 관람객의 기억과 감각을 향해 던지는 환상적인 체험이라 생각한다. 더글라스 고든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가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이다.


 

Taxi driver scene


피에르 위그는 보다 실험적인 방법으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엮어 낸다. 그는 <Dubbing>, <Remake>, <The third memory>, <L'ELLIPSE> 등의 작품을 통해 영화적 경험에 대한 실험을 수행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The third memory>를 통해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소유한 기억에 대한 궁금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작품은 영화와 현실을 왕복하며 우리에게 제시된 기억을 정리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1972년 존 요토비치는 애인의 성전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브루클린에서 은행강도를 감행한 다. 이후 그 이야기는 3년의 시간이 흘러 시드니 루멧 감독에 의해 <뜨거운 오후>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다. 피에르 위그는 실화와 영화의 1번째, 2번째 기억을 지나 출 소를 한 당시의 강도를 직접 데려와 같은 장소에서 3번째 기억을 이야기 하도록 한다. 2 개의 스크린을 이용해 좌측에는 알파치노가 분한 2번째 기억이 우측에는 실제 범인이 진술하는 3번째 기억이 동일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영화란 매체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진실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인 동시에 인간의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The third memory


우리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음을 듣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상당부분이 알 파치노의 애드립으로 촬영되었으며, 14시간의 서사는 124분으로 압축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많은 부분이 씻겨간 3번째 기억에 완전히 의지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며 무엇이 진실이며, 우리가 매체를 통해 진실을 전달받는 과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는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스꽝 스럽다. 결국 존 요토비치는 영화의 저작권을 통해 애인의 수술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외의 작품에서도 위그는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의 상이한 차원들을 구별 짓곤 한다.


<Dubbing>의 경우는 영화를 더빙하는 15인의 배우와 그들이 읊는 스크립트만을 보여주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영화란 경험이 단지 보는 행위만이 아님을 인지시켜주며, 97년에 제작한 <아틀란티크>의 경우는 하나의 영화를 서로 다른 캐스팅을 통해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작업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작업은 아니지만, 영화의 본질과 다양한 형태에 대한 질문으로서 그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Remake>는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이창>을 아마추어 배우를 대상으로 재연시키며 영화와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는 작품이다. 이는 현실의 인물을 스크린의 영화인물로 재현한 과정을 다시 재도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벽을 넘나들도록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L'ELLIPSE> 는 생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은 영화 속에서 무심코 흘러간 순간과 순간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작업이다. 빔 벤더스의 77년작 <미국인 친구>에서 배우 부르노 간즈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 생략되어 버린 갭을 20년이 흘러 동일한 배우를 불러와 같은 장소에서 기억을 회기 시킨다. 그의 작업은 이 처럼 영화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매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 대한 자기 반영적 사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위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히치콕의 영화를 예로 들며 자신이 그의 영화를 선택한 것은 수용적 차원의 문제라 말하였다. 즉 누구나 알고 있기에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매개적 성격. 그의 인터뷰를 통해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가들의 소재 선정에 대한 나의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Video quartet 


다음으론 가장 방대한 분량의 편집 작업을 통해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작가 크리스찬 마클레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파운드 푸티지’ 작업은 어마어마한 양을 다루고 있다. <텔레폰> <비디오 4중주> <시계>등의 작품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영화의 이미지를 편집해 영상적 흐름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소리이다. 그의 작업의 주안점은 ‘과연 보는 것을 들을 수 없는 것인가?’ 이다. 작가는 헐리웃의 영화를 기반으로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소재 선정은 역시 관람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3작품 모두 소리를 중심에 두고 각각의 화면을 연결 짓고 있다. 



Telephones


일단 <텔레폰>의 경우는 음성을 매체로 한 소통도구인 전 화기를 이용해 수많은 배우들이 서로 전화를 받고 끊는 행위를 반복하게 한다. ‘파운드 푸티지’ 작업에 있어 초기작에 해당하는 본 작품은 상호작용과 음성의 연결이라는 측면을 활용해 비교적 단순하게 이뤄진 작업이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작품은 보다 풍성해졌고 그 구성도 상당한 수준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디오 4중주>의 경우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와 영상의 실험인데, 각각 3m, 총 12m인 4개의 스크린을 이용해 17분 길이의 음악을 완성하였다. 각각의 영화 이미지를 차용해 소리를 중첩시키고 어긋나가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전반적인 흐름의 맥이 존재하고 있으며 불협화음과 우연적인 소리의 완성에 있어 기묘한 하모니를 완성시킨다. 특히 700여편의 작품을 이어붙인 실험이기에 그 압도감이 상당하다.



The clock


한발 더 나아가 마클레이는 4000여편 이상의 영화를 편집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시계>라는 작품으로서, 작품의 총 길이는 24시간이다. 헐리웃의 영화의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만을 뽑아 째깍 거리는 시계의 음성적 흐름에 맞춰 이미지를 따라가게 만든다. 미술관이 문을 닫은 후에도 마클레이의 시계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어느 미술관에서는 새벽까지 전시를 연속한 적이 있었는데 본 작품의 많은 시간대 중에서도 특히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의 편집은 굉장한 시각적 쾌락을 선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마클레이는 소리라는 중심 축을 따라 이미지를 겹겹이 쌓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그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며 단순히 응시만으로 일관하던 관람객들을 점차 자신의 세계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은 맥락없이 단절된 그의 영상을 무감각하게 만나게 되더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실체 앞에서 감탄과 경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위에 소개한 4인은 현재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작업에 있어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작가들이다. 앞으로 소개할 작가들은 대부분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하며 산발적으로 이와 같은 형식을 차용하는 이들이다. 켄다이스 브리츠의 <Soliloquy trilogy>는 헐리웃의 유명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잭 니콜슨, 샤론 스톤이 각각 <더티 해리> <이스트윅의 마녀들> <원초적 본능>에 나왔던 장면을 토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을 모두 날려버린 작업이다. 브리츠는 이 작업을 통해서 그들의 독백을 이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한다. 작가는 극단의 방식을 택하는데 주인공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만약 화면에 타인의 얼굴이 나오는 경우에는 아예 암전시키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철저한 독백의 연속에서 편집을 통한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을 시도하고 있다. 샤론 스톤과 이스트우드의 작품은 7분여이고 잭 니콜슨의 작품은 14분에 이른다. 이러한 과감한 생략을 통해 새로움을 뽑아내는 기법은 우리나라의 작가도 시도한 적이 있다. 임민욱 작가의 <희생>이 이와 비슷하게 극단적인 생략을 감행한 경우이다. 2시간이 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8분으로 줄인 작업이다. 작가 임의로 선정한 핵심을 중심으로 과도한 점프컷과 생략을 통해 본래의 서사와 주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작가는 예술과 인간 근원에 대한 사유와 질문에 연관된 대사들을 중심으로 긴 영화를 8분으로 만든다. 본래의 형태를 잘게 잘라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이러한 방식은 원작을 완전히 탈색하여 불안함만을 남기고 있다. 솔직히 이와 같은 작업이 제공하는 전달방식에 대한 의문이 큰 편이다. 단순히 생략만으로 이뤄진 작업이 원작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예술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크게 지닐지, 누군가에게는 의문으로 다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oliloquy - jack


 

Soliloquy - clint


Soliloquy - sharon


이어 제니퍼 & 케빈 맥코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관계를 실험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인 <호러 체이스>의 경우 샘 레이미 감독의 영화 <이블 데드 2>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속 주인공이 실내를 이동하며 쫓기는 장면에서 착안해 자신들이 직접 브루클린에 세트를 지은 후 체이스 씬을 촬영한 후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절대 겹치지 않는 동선으로 영상이 계속적으로 반복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키스>에서는 <보디 히트>의 유명한 키스씬을 두 명의 배우를 섭외해 재연하게 한 후 <호러 체이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컴퓨터를 통해 불규칙하게 배열하여 불안한 영상을 제공한다. 이 두 작품에서 선보여지는 비선형적이고 분절적인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제니퍼 & 케빈 맥코이는 고다르 영화의 사운드를 배경으로 조각품을 이용해 새로운 씬을 구축한다든지 <스타트렉>이나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등의 작품을 이용해 단순한 ‘파운드 푸티지’ 차용을 넘어서 적극적인 오마주/모방의 방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Horror chase


The kiss


마이클 호아퀸 그레이의 <The blink>의 경우도 앞서 언급한 제니퍼 & 케빈 맥코이의 사례처럼 컴퓨터의 임의적인 편집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를 새롭게 배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레이는 그 기준점을 음악으로 놓고 있다. <Leaving on a jet plane>이라는 평화로운 팝송의 선율에 맞춰 레니 리펜스탈의 <올림피아> 속 장면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배열한다. 이는 앞서 소개한 <키스>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인데 음악의 적극적인 활용과 관람방식의 차이로 인해 더욱 신비한 최면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작품은 한 번에 한명의 관객만이 관람이 가능하다. 서로 다른 비율로 깜빡이는 두 개의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고 음악에 맞춰 양쪽 눈으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이다.


The blink


다음으론 동일한 주제로 한데 묶인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독특한 효과를 발하는 작품들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크리스토프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의 작품인 <크리스 탈> 과 올리버 피에치의 <꿈의 형태>가 그 것이다. <크리스탈>은 단순히 고전 영화 속 거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반복하는 단순한 태를 지녔지만 거울의 사전적 정의를 영상 으로 전이한 듯 한 영상의 집중도로 06년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최우수 단편 상을 받았다고 한다. 수백편의 고전에서 추출한 거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주인공을 해체하고 파편화 시키며 자아도취와 분열증, 사랑과 파괴등의 과정을 거쳐 인간의 수많은 감정선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한 구조 속에서 폭 넓은 감정을 표현핸는 이 14분 짜리 영상물은 이번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세계 곳곳의 ‘파운드 푸티지’ 기반 전시회에서 항상 목록에 올라있는 작품이었다. 올리버 피에치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꿈과 죽음, 자살과 마약등의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편집하는 작가이다. 그는 <꿈의 형태>에서 히치콕부터 린치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스릴러 서스펜스 호러 작가들의 꿈과 악몽을 차용하여 혼수상태부터 지각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메타포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단순하지만 설득력강한 작업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욕망을 영화에 투영해 지속적으로 발산하며 강력한 힘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시 모펫의 <마더> 역시 공통 요소의 집합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각종 영화에 등장한 엄마의 모습을 한데 모아 놓은 작품이라는 사실만 전해 들었을 뿐 정확한 구성이나 표현 기법은 확인 할 수 없었다.



Cosmic ray


이외에도 ‘파운드 푸티지’ 작업의 1세대 기수인 브루스 코너의 <Cosmic ray>와 49편의 느와르를 차용해 색감의 다변화 속에 인터렉티브 장치를 고안한 노재운 작가의<God4saken>등이 조사되었지만 실제 영상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브루스 코너의 <Cosmic ray>는 나체의 여성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는 필름에 미키 마우스, 전쟁 기록, 광고, 서부영화 등의 이미지를 묶어 레이 찰스의 흥겨운 노래 속으로 집어넣은 작품이다. 이는 대중문화와 전쟁 등의 선정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으로서 초기 ‘파운드 푸티지’ 기반 꼴라주 작업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시회를 통해 꼭 감상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노재운 작가의 경우는 동류 작가들이 선호하는 방식과는 다소 상이한 특징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인터렉티브 요소를 가미했다. 49편의 흑백 느와르 필름의 씬을 컷팅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색을 부여하고 관람객에게 49개의 색면을 제시하여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직접 작품이 전시된 형태를 관람하지 못하여 작가의 의도나 방향성은 쉽사리 추측이 되지 않는다.


Cosmic ray


‘파운드 푸티지’를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기성작가들에 대한 소개를 이어봤다. 여기까지 언급된 이들은 순수하게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이미지에 영감을 얻어 그들을 복제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이질적인 외형과 상이한 메시지를 뽑아내 왔다. 이들의 작업방식을 물리적 방식에 따라 나누면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째로는 <크리스탈> 이나 <시계>와 같은 방식으로 유사한 이미지를 중첩시켜 자신의 강박적인 집중력을 펼쳐보인 케이스이다. 공통적인 요소의 반복과 모든 씬들의 허리를 꿰뚫는 강렬한 주제의식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최면적 감상효과를 얻도록 유혹하는 작품들이였다. 임의의 가상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원본의 장면을 자르고 뒤집고 쪼개며 편집의 온 집중력을 쏟아 부은 경우이다. 


 

Kristall


<희생>과 <Soliloquy trilogy> 와 같이 큰 맥락을 잘게 나누어 결국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기이한 형태로 얻어내는 방식이다. 덜어내고 순서를 바꾸고 새롭게 이어 붙이며 관객의 역발상적 기시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 형태이다. 그리곤 <호러 체이스> 나 <The third memory> 와 같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관람객과 소통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본 작업은 순수한 ‘파운드 푸티지’ 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작품에 침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 방식보다 강한 어조로 설파하며 원작 본연의 매체적 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는 <24시간 싸이코>와 같이 시간을 조절하고 소리를 컨트롤 하는 방식으로 단순히 기술적 조건의 변형을 통해 특정 감각에 대한 통각을 자극하는 케이스가 있다. 이는 대부분 속도와 기억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공백에 대한 자문을 스스로 던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희생


물리적 작업 속성에 따른 편집/조합/재창조/변형 의 구분은 궁극적으로 세 가지 테마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Cosmic ray>와 <Sync> 연작들이 자극적인 영상의 재빠른 전환을 통해 우리에게 강렬히 전달한 바는 매체 자체에 대한 자기 반영적 암시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들은 영화를 비롯해 여타의 대중매체의 소비적,쾌락적 특성의 지나친 물질주의를 경고하며 스스로에게 자정할 수 있는 사고의 장을 열어 준다. 또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촉구하는 작품군들이 존재한다. <플래시 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더글라스 고든의 숱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와같은 테마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시간의 의미와 영화매체. 비디오(미디어)아트 매체가 지닌 시간의 속성을 반복적으로 환기 시켜준다. 다음으로는 <L'ellipse> 와 <Through a looking glass> 처럼 공간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들도 있다. 현존하는 공간을 새삼 상기 시키며 동시에 공간이 표할 수 있는 매체적 맥락을 복구와 참여의 작업을 통해 관람객에게 제시해준다.


5. 결론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업은 아직까지 그 영역이 넓진 않다. 하지만 확언하건대 점차 본 분야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시도가 이뤄질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은유적 존재로서 비디오(미디어) 아트가 진작 걸었어야 했던 길을 잠시 방황하며 잊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들어 작품의 물리적 개수의 증가와 함께 해당 컨셉만으로 전시회를 기획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 미국의 밀워키 아트 뮤지엄에서는 크리스찬 마클레이와 피에르 위그, 제니퍼 & 케빈 맥코이 등의 작품들을 모아 <CUT/film found object>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작년 강남구 신사동의 코리아나 미술관에서는 <피쳐링 시네마>라는 제목으로 치유로서의 은밀한 반복이란 부제와 함께 브루스 코너를 비롯한 대표 작가 10인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었다. 가깝게는 이번 달 네달란드 암스테르담의 EYE 에서는 <Found footage : cinema exposed> 라는 전시를 열어 <크리스탈> 등 ’파운드 푸티지‘ 분야의 대표작들을 소개 중에 있다.


Found footage : Cinema exposed 전시회장 준비장면


영화의 해체와 반복과 재창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작업. 나는 이러한 방식이 갖는 단단한 잠재력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즐거운 꼴라주 작업은 많은 방식을 통해 그 파급력을 점차 확대 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유된 자원으로 탄생하는 근원적 존재성으로 인해 이미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개척중에 있다. 개중에는 단순히 흥미위주의 시각적 충족을 지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체에 대한 반영적이며 비판적인 근본적 속성에 의해 각각의 작품들은 수용자로 하여금 의도치 않은 교훈과 즐거운 감각의 충족을 동시에 이루고 있다고 본다. 얼마 전 히치콕의 <이창>을 분리하고 조합해 자신만의 캠퍼스 속에 동시 다발적으로 영화의 시간들을 조합하는 작업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완성도나 품고 있는 함의에 있어 절대 기성작가의 논조와 어조에 눌리지 않는 강력함이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컨셉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파생되는, 흡사 놀이와 같은 상호 영향관계를 보며 본 분야가 인터넷 기반 바운더리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 본성의 흥미를 자극하는 ‘파운드 푸티지’ 기법은 여러 방식으로 대중매체로 자신의 존재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힙합 가수 카니예 웨스트는 마르코 브람빌라의 <문명> <진화> 연작에 큰 미적 심상과 감동을 받아 직접 그와의 협업을 통해 그와 동일한 컨셉으로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경우가 있다. 단순히 예술이 미술관 안에서 서식하는 독자적 의미의 오브제가 아니란 사실을 말해주는 케이스다.


 

Power


영화를 집어삼킨 비디오(미디어) 아트 들 옆에는 스스로가 영화가 되기를 욕망하며 영화와 영화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직접 촬영한 영상이나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해 새로운 방식으로서 실험적인 영화 상영을 시도하며 필름을 변형시키고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왜곡 시키거나 흡사 영화관과 동일한 구조의 작은 관람실을 만들어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영상물을 영화에 대체하는 작업등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와 빛과 암실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과 뜨거운 실험들이 행해지는 분야 역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업들과 함께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관계와 영향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향한 반영적, 지시적 실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이작 줄리언의 <The ten thousand waves>의 경우는 9개의 스크린의 압도적인 비주얼과 유명배우 장만옥의 캐스팅을 통해 단순히 영화의 그림자가 아닌 영화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시각적 경험으로서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기도 하고 있다.



Ten thousand waves


Looking for alfred



 

Upolar



Rear window timelapse


시간과 공간, 대중과 작가, 매체에 대한 자기 반영성과 자기 지시성 등 여러 가지 키워드를 떠올리며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업을 살펴보았다. 본 작품이 일반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위에서 다 언급한 것 같다. 나는 이 보고서를 마무리 지으며 딱 두 가지 만을 덧붙이고 싶다. 상호간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두 매체간의 관계를 바라보며 시도와 변형의 고민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발전적인 방향에 대한 답안을 보다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봤으면 하는 것. 그리고 이전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오브제 개념의 무한한 공유화와 상호작용의 시대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작품이란 놀이를 통해 피부 가까이 맞대가며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고 반성케 만들어 줄 수 있는 예술의 참되고 진솔한 의미를 보다 쉽고 부드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Life in a day


작년에 가장 인상적으로 감상한 영화가 있었다. 전 세계 인구가 동일한 하루의 자신을 각자의 카메라에 담아 한편의 영화로서 완성한 작은 지구본 <라이프 인 어 데이>. 서로가 서로의 인용이 되어 하나의 몸뚱이를 체워 나가는 과정. 난 이러한 작업이 지니고 있는 시도와 의미야 말로 앞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예술과 신매체의 새로운 얼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과 힌트를 가장 적절하게 제시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영상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며 서로의 영향력을 공유하며 큰 그림을 그려내는 작업들에 아낌없는 애정을 보낼 것이다.




- 27살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