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이 (The way)

2012. 2. 18. 01:12 from Cinema/Mine












울수 있다는건 참 감사한 일이다. 제서야 슬그머니 어른이 되어감을 공감하게되는 요즘, 불시착의 공허함과 숙명적 불안 사이에서 가끔이나마 눈물흘릴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누군가 나를 바라볼때 비생산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하다 여길 수 있는 너무나 잦은 습관들. 영화와 술. 언어와 공상만으론 풀리지않을 현실의 고립타분한 매듭에, 안으로든 밖으로든 어느 방향이건 울음을 끌어내 다소간이나마 찰나의 일탈과 황홀한 느슨함을 경험토록 해주는 이들과의 만남이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욱 잦아지고 점점 진솔해져 가는것 같다. 운다. 운다는 것. 영화를 사랑하는 첫번째 이유를 요즘에서야 찾게된것 같다. 특히 어젯밤 나와 만나게된 이 작품은 내 마음속에 마르지 않을 추억과 인생살이의 근원적 원동력이란 이름으로 비처럼 흘러내려 평생을 고여있길 바라기에 이곳에 속삭이고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도 싶었다. 


사실 이 작품을 감상하며 간간한 맛의 눈물을 많이 흘린건 아니였다. 허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론 우리네 광활한 감정폭을 온전히 묘사해낼 순 없다고 믿는 이중의 하나로서 어젯밤의 나는, 마음속으로 또한 생각과 다짐의 어느 계곡속으로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 보냈다고 믿고싶으며 그 점에 대해 굉장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안으로 운다는건 지나치게 개인적인 표현일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감상과 경험에 있어 감동과 자극의 반응을 눈물로서 표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물방울의 흐름정도로 간단히 설명하기는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극장을 나서고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바라볼때 비록 눈시울은 촉촉할 뿐이지만 지나간 인생살이와 머나먼 가능성을 향해 장마빗마냥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후회와 시기란 이름의 눈물들은 도구적 신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생각과 행동들을 정화시켜 준다. 그 시립고 애틋한 몽롱함을 느낄때면 나는 안으로 울었노라... 라며 숨막히는 일상의 강박대기를 참아낼 활력과 위안을 얻는다.  



티나지 않을 흐느낌을 한참 토해내고 나면 해당 작품들의 중심에는 후회와 시기의 동경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The way> 는 이 두가지 감정선을 가지런히 엮어 나의 눈과 귀 속으로 화사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실 자신의 경험을 명확히 전달할만한 약간의 감상과 최소한의 정보전달만으로 영화에 대한 추천사로서 충분함을 절감하는 나 이지만 오늘 만큼은 이쁘고 온전한 형태의 기록으로서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어졌다.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인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서글픈 부모의 시선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최악의 비극을 통탄의 신파가 아닌 삶의 과정, 화합의 도구로서 넘겨내는 <The way>의 사정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겠다.




넉넉한 안과의사이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공허한 아버지이기도 한 탐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업무와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날 프랑스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아들인 대니얼이 어젯밤 사망했다는 소식. 소중한 이들을 몇번이고 떠나보낸 그이지만 핸드폰 하나 지니지 않은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예상치 못한 절망으로서 다가오게 된다. 아들의 시신을 데려오기 위해 곧장 프랑스로 향하게된 탐은 싸늘한 아들에게 다가가는 시간,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후 유품을 매만지는 시간, 그 잔인한 진공의 시간속에서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자유와 깨달음을 위해 그간 쌓아온 모든것을 뒤로한 채 여행길에 올랐던 대니얼의 뒷모습에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들과 겪게된 사소한 마찰, 그리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속마음. 죄스럽고 의아한 마음들은 그의 어깨에 아들의 가방을 둥여매게 만든다. 현지에서 대니얼을 화장시킨 탐은 가방속에 대니얼의 흔적을 간직한채 자신의 아들이 끝까지 밟아보려 했던 산티아고의 기나긴 순례길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중간 중간 대니얼의 흔적들을 순례길 이곳 저곳에 흩뿌리며 부자는 800km 의 대여정을 함께한다.  


생각해보면 영화를 아무리 많이보아도 눈이 매서워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The way>를 내 생의 영화로 당당히 들어올리는 이 과정에서도 완성도의 견고함에 대해선 보증을 설 수 없을것 같다. 어찌보면 상투적이고 보수적인 작품이란 생각마저 할 수도 있겠다. 이순을 훌쩍넘긴 노년의 자기반성과 화해의 여정.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야기와 인물들. 마치 산티아고의 순례길 곳곳에 대형 스피커들을 박아놓은듯이 끈질기게 흘러나오는 일생살이의 배경음들까지, 로드무비의 과욕과 가족을 바라보는 감독의 평이한 시선은 <The way>를 평작으로 끌어내렸다. 매체지향층의 공통적인 사회관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더 많은 영화인들이 가족을 그림에 있어서 대안을 이야기하며 전복적인 사고를 꾀하고있다. 물론 장르적 관습으로서의 뻣뻣한 가족관 묘사에는 반기를 드는 편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담아내고있는 비슷한 틀속의 나태한 가족관은 되려 클리쉐의 이름을 넘어 환상동화를 읽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The way> 가 부자간의 이해와 화합을 다루는 가족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The way> 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대니얼이란 인생의 회전문을 만난 탐의 다리저린 성장통이었다. 


세상의 모든 로드무비는 곧 성장영화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펼쳐진다. 일탈을 통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보고있자면 클리쉐의 적극적인 활용이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다. 일탈과 여행이란 단어를 바라본다. 인간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듣고 읽고있지만 저 단어들에 바라는 기대치는 독특한 목적성이 존재하리라 믿고 있다. 사랑과 함께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용감한 순간들. 항상 갈구하게되는 저 행위들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서 환상이자 그것은 곧 한차원을 뛰어넘어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 구역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인류가 일상에선 겪기힘든 예외의 순간들. 그곳에는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지피는 비슷한 굴곡과 비슷의 향기의 길들이 존재한다. <The way> 는 일탈과 성장의 평범한 환상들을 여행자들의 상상로를 따라 펼쳐낸다. 산티아고의 기나긴 순례길.       


 
전체적인 분위기와 태도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결정적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 남몰래 숨겨놓은 열망과 컴플렉스를 부추기고 위로해줄 만한 순간순간의 요소들이 필요하다. 극 초반 탐은 아들을 공항까지 바래다주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내 인생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내가 택한 인생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대니얼의 대답은 이 영화의 주제인 동시에 영화전반의 여정을 설득시켜주는 중요한 이야기다. '인생은 택하는게 아니에요, 아버지. 살아내는 거지' You don't choose a life, you live one. 일년전쯤 <시> 의 미자와 그녀를 그려낸 이창동 감독을 바라보며 나와 영화 사이가 친구이자 사제지간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 그것과 맞닿은 맥락에서 나는 탐과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감독에게 삶의 태도에 대한 긍정적인 가르침을 얻었다. 명확히 밝힐순 없지만 앞으로의 30여년을 살아낼 근원이자 그 이후의 삶과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에 관한 소중한 지표가 될것이다. 역시 운명에는 상황의 연이 필요한것 같다. 짧은 호흡이었지만 30여일간을 테두리 밖으로 나서며 새로운 땅을 걷고 새로운 곳의 공기를 마시는 일의 가치를 체감한 요즘, 어느 고집스런 노인의 하나하나의 발자욱들이 선명히 가슴속에 자국을 내는듯 하다. 


또하나의 사랑스런 습관은 탐이 기나긴 여정속에서 만나게된 세 여행자들의 존재와 그들끼리 나누는 마법같은 순간의 눈빛이다. 각기다른 국적과 각기다른 목적으로 산티아고에 오른 네명의 동반길은 그들 생의 딱 한번만 존재하는 황홀한 조합이자 마법같이 멈춰진 시간으로서 평생 그들의 기억속에서 머물것이다. 어찌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로망일 수 있겠지만 요즘의 상황에서는 이들의 옅지만 운명적인 우정에 짠한 동경이 남는다.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으로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할 낭만적인 그림이다. 요즘들어 우리네 만성적 불안에 공포와 혐오를 느끼고 있다. 점점 나이가 들 수록 한정적인 범위로 집중되어가는 인간관계에서 미묘한 고독을 느끼게 된다. 얼마전 기이한 경험을 했다. 몇년을 알고 지내온 이들과 함께한 자리, 너무나 당연하게 한가지 이야기에 목을 메고있는 기괴한 커뮤니케이션. 취직과 합격역시 분명히 생의 중요한 과업이지만, 서로의 불안감을 안정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무의미한 위로를 이끌어내는 못생긴 화법에 주변 모든것들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우리가 살아내는 이 사회의 환경속에선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힘든 저들의 일탈적인 생의 대화와 화합은 역시나 운명적인 궤를 함께하며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나는 <The way> 가 참 좋다. 이게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종합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것 같다. 지나치게 작품성에 대해 딱딱한 시선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한번쯤 좋은 경험으로서 동반해볼만한 여정이 아닐까 싶다. 시기적으로도 참 적절할때 만났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될것 같다. 영화를 관심있게 지켜본지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그 이유에 대해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가 가능한 때가 온것같아 더욱 기분이 좋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배우의 부족한 자질과 역량을 지적할 순 있어도 그들의 연기가 훌륭할 경우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없는것 같다. 평범한 관객의 형언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들은 진지했으며 또한 열정적으로 불탔으니. 참고적으로 영화관람의 독특한 재미가 될것같아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마틴쉰의 아들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본 작품의 연출과 아들역인 대니얼을 함께 맡았다. 이런 지극히도 사적인 관계를 알고보면 그들의 연기사이에 흐르는 독특한 기류 역시 추가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것 같다.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