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들의 도시> <세븐 사이코패스> 의 마틴 맥도나 감독이 장편 데뷔전에 만들었던 중편작. 이후 만들어진 작품들과 동일한 세계관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가 상상하는 세상이란 아이러니와 비아냥 냉소가 넘실거리는 곳이 아닐까. 자연스레 후에 만들어진 장편들을 연상시키는 소품들과 <킬러들의 도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브렌든 글레슨의 태도, 주인공 양아치 소년의 말도안되는 캐릭터성은 <세븐 사이코패스>의 샘 록웰의 어릴적 모습같기도 하다. 영어권 대사이지만 특유의 억양탓에 영어자막과 함께 봐야 할것이다. 마틴 맥도나의 기묘한 세계관에 빠진 이들이라면 분명 봐야할 작품이다. 만일 이 감독에게 관심이 없다해도 한번쯤은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니 무시하지 마시길.

Posted by Alan-Shore :






세계 최초의 SF 영화인 동시 독창적인 영화기법과 신선한 내러티브의 제공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필견목록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1902년작 <달세계 여행>. 아마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찡그린 표정의 달을 가득 채워 정지시킨 한장의 스틸컷 정도는 익숙할 것이다. 영화 감독인 동시 마술사이기도 했던 그는, 이미지의 활동 속에서 창조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영상적 실험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이다. 도구적이고 물리적인 외형적 실험에 독창적인 상상력을 얹어 1902년, 그의 수많은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 <달세계 여행>을 완성시키게 된다. 당시 멜리에스는 자신의 영화를 판매할때 흑백버전과 컬러버전(Hand - Colored versions)을 동시에 제공했다고 한다. 영화가 세상에 공개된 후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달세계 여행>의 컬러버전은 그 자취를 감췄다가, 1993년에 와서야 새롭게 발견됐다고 한다. 하지만 필름의 상태는 심각하게 훼손이 되어 복원작업이 불가피했고, 그렇게 시작된 <달세계 여행> 컬러버전(Hand - Colored versions)의 복원은 프레임 바이 프레임 방식으로 1999년에 시작되어 2010년에 와서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발견 후 18년, 영화가 만들어진지 109년만인 2011년, 깐느영화제에서 복원버전은 상영되었고 프랑스의 일렉트로 그룹인 'Air'가 영화에 맞는 새로운 사운드트랙을 제작했다. 아래 영상은 우여곡절끝에 우리에게 돌아온 오래된 신품이다. 110년전의 영화, 인류의 영화적 호기심을 현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건 멜리에스와 같은 도전적인 몽상가들의 호기심 덕분일 것이다. 아직 <달세계 여행>을 보지 못했다면, 잠깐 짬을내어 14분간의 아름다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Posted by Alan-Shore :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 <바벨>, <비우티풀> 의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뜬금없이 단편 하나를 내놨다. L.A. 댄스 프로젝트인 'Moving parts'의 리허설에 초대 받은 후 연출을 결심했다니 분명 그들의 춤사위를 보며 큰 감명을 받은 것 같다. <Naran Ja> 란 타이틀의 이 12분 짜리 작품은 완벽하게 실험영화의 영역으로 편입돼있다. 어떤 느낌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찬찬히 뜯어봐도 1그램의 의도도 추측하기 힘든 난해함으로 가득하다. 초현실적인 구성과 심플한 연출, 도통 시대성을 파악하기 힘든 VHS 스타일의 거친 출력. 솔직히 말해서 맥주 몇잔을 걸친 상태에서 접했기에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지 맨 정신이었다면 뭔지 모를 찝찝함에 감상을 중도포기하고 말았을 것 같다. 이상한 기록물이 추가됐다. 그간의 연출 스타일과도 완전히 격리된 괴작이다. <바벨>의 황량한 사막 정도가 언뜻 떠올랐을 뿐. 이 경우에 꼭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춤이란 행위는 장르와 매체의 틀을 허물어 독보적인 진솔성을 담보해 주는 것 같다.








Posted by Alan-Shore :

작품성만을 따져본다면 결코 추천해줄만한 다큐는 아니다. 하지만 유럽, 거기다 존재 자체가 낯선 오스트리아 감독의 모습을 이만큼 자세히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우리는 수상 실적과 위대한 작품들의 잔영만으로 그들을 추측할 뿐이다. 여기 미카엘(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적 일상에 바짝 따라붙어 기록해낸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2005년작 <24 Realities per Second>. 작품에 대해 기대가 아닌 호기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감상해보시길.  











Posted by Alan-Shore :



다큐멘터리 장르를 좋아한다. 극영화에 비해 표현의 상한선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에 여러모로 한정적인 제약이 따라붙긴 해도 현실과 일상의 결을 따라 걷다 마주하게 되는 감동과 자성의 울림 속에는 감히 극화된 이야기들은 따라잡기 힘든 넓고 진한 감정적 파장이 숨겨져 있기에, 굳이 커다란 환상이 없더라도 내 스스로를 꿈꾸고 울게 만드는 것 같다.


길을 걷거나 밥을 먹다가, 가끔씩 근례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유독 선명히 그려지는 상들은 누군가 진솔히 속삭여준 어느 이웃의 삶이었던 것 같디. 몇 년을 손꼽아 기다리다 개봉과 동시에 달려가 기대치 이상의 영화적 쾌감을 선사받았던 봉준호 감독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어느 신작보다도, 겨울의 낯선 하루. 생각 없이 극장 앞을 지나다 몇 안 되는 관객들과 함께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시간과 기억의 고민을 담고 있는 쿠바 발 엽서 한 장에 모든 기억과 그리움을 집중시키는 것을 보니, 확실히 다큐멘터리 장르에 마음이 쉬이 걸리는 것 같다.


지난 한 세기 낯선 땅에서 서로의 인생을 비춰가며 쿠바를 살아 낸 한인들의 인생과 사랑의 짤막한 기록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의 춤이란 제목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 주는 증거가 되지만, 송일곤 감독은 시간의 표면위에 포근한 나레이션을 흩뿌려 놓으며 기억의 대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모든 여행을 책임져준 이하나씨의 친절한 나레이션도 좋았지만, 불쑥 끼어들어 또 다른 차원의 기억 속으로 관객을 잡아끌며 다시금 시간의 춤이란 제목을 아련히 완성시켜 주는 장현성씨의 편지 낭독이야말로 가장 선명한 그리움 중 하나이다.


헤로니모 임이 보내는 첫 번째 러브레터. 상기나 향수 따위의 도구적 경험여부 정도는 큰 무리 없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순간의 기적이다. 쿠바의 리듬처럼 뜨겁고 애잔한 작품 전반의 흐름 속에서도 유독 아련히 봉곳 솟아난 기억이다.


그나저나 <시간의 춤> 이라는 제목, 생각할수록 좋다. 송일곤 감독의 새로운 초대, <시간의 숲> 속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나섰던 것 역시 순전히 제목이 풍기는 기억에 대한 믿음때문이었다. 쿠바 여행을 통해 이러말을 남겼다 '시간이 죽지 않는 삶은 멋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사랑한다면 시간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야쿠시마의 깊은 숲 속에선 '시간은 기억을 지우고, 기억은 시간을 만들어 낸다.' 고 했다. 앞으로 송감독의 시선은 어느 무대를 향하게 될까. 기회만 된다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그랬던 것처럼 박용우와 타카기 리나의 치유적 여정이 몇 번만 더 반복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아예 일상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우리 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되짚어 보거나...   



Posted by Alan-Shore :









삼합의 안정감을 선호한다. 자신들의 몸을 포개어 서로의 근거와 예증이 되어주는 어느 세가지 것들의 만남. 한가지 컨텐츠를 단단히 구축해낼 자신감도 없기에 이와같이 내 부족함을 기획에 기대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경계와 제한이 존재치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으면한다. 비록 사소한 단서가 되더라도 차곡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화적 감흥이란 이름으로 머릿속에 오래토록 축적되어가는 '순간'과 '사건'의 이야기들이 미련의 여지로서 굳어지기전에 스케치 정도를 기록하고자 한다. 블로그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갖고 슬며시 권태의 길로 접어드려는 찰나 본 카테고리의 글들이 새로운 활력과 동력으로서 유일한 취미생활이 수면아래로 가라앉지않게 날 잡아줬으면 한다.     




세점을 잇는 첫번째 이야기는 춤추는 그대들의 모습이다. 사실 영상을 편집해놓은건 4월 경이었다. 당시의 주 목적은 오마주의 어느 단면에 대한 흥미거리였다. 장 뤽 고다르의 64년이 할 하틀리의 92년에게 그리고 94년의 타란티노에게, 최종적으로는 2009년의 정성일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영상을 한두번 돌려볼 수록 최초에 선물받은 뮤지컬씬의 달콤한 감흥이 확연히 줄어듬을 느끼게 되었다. 왜 일까? 매일매일은 과장이지만 이따금씩 3명의 젊은이들이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즐기는 순간의 군무들을 떠올리며 고민해봤다.


두달사이 몇권의 책을 훑으며 몇번이고 마주치게된 이름이 있었다. 진켈리, 그리고 그 중에서도 <파리의 미국인>. 뮤지컬 장르의 분명한 역사이자 보물같은 순간인 본 작품의 모습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보니 극단의 위치에서 색다른 뮤지컬씬을 연출해낸 세 작품들의 단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야기를 빌려온다. 「 나는 항상 영화속의 뮤지컬 신들을 좋아했다. 특히 '뮤지컬 장르가 아닌 영화' 속의 뮤지컬 신을 더욱 좋아했으며, 고다르 영화 속의 뮤지컬 신을 가장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선 갑자기 뮤지컬 장면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 신은 매우 매혹적이다.그리고 뮤지컬 장르에 속하는 영화가 아니기때문에, 뮤지컬 신을 삽입하려면 영화의 흐름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 점이 영화를 더욱 달콤하게 만든다. 」


어느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에 읽게된 '돌발적 뮤지컬신'에 관한 타란티노의 이야기는 독자적 편집에 의해 훼손되어버린 이들의 매력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청춘과 불안의 어느 접점에서 튀어오르는 그대들의 몸짓은 <시카고>의 화려함이나 <렌트>의 열정마냥 작은 틀안에 가두어 각자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감정과 이야기를 쫓는 방식에 있어 논리적 서사보단 춤이라는, 인간의 육체로 표현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으로서 직접적인 교감을 시도하는 뮤지컬 장르를 갑작스레 끼워넣는 방식은 가장 충격적이며 언제까지나 젊음의 이름으로서 기억될만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걸까, 무의식중에도 이같은 매혹을 어느정도 느끼게된건지 통상의 뮤지컬 신과는 분명히 다른 편집점을 새겨넣긴 했었다. 율동의 시작점이 아니라 최소한의 단서를 선행한 후 출발하는 이들의 춤. <국외자들>에선 군무에 앞서 이들의 성격과 관계에 대한 단서를 주고 싶었던걸까. <심플맨>에서는 그 외침을 보여주고 싶었던걸까, <카페 느와르>에선 컬러의 무대로 진입한 순간 영수의 어중간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던걸까. 어떤 동기에서건 갑작스런 침입의 최소한의 흔적은 남긴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오마주의 흥미로 시작된 관심이 사소하나 나름 의미있는 발견으로 마무리된 본 포스팅의 이야기들. 세명의 남녀가 추는 세개의 경, 본 기획의 첫번째 이야기로 어울릴듯 하다.





 






 






 



2001년 정성일은 김홍준과의 대담자리에서 <국외자들>의 카페 뮤지컬신을 최상의 뮤지컬로 손꼽은 바 있었다. 고다르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최상의 뮤지컬은 분명하다던 그 이야기. 새삼 떠오른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에서 잭 래빗 슬림 댄스 컨테스트 역시 이들과 분명한 접점이 있는 모습이긴하나, 영화광의 지독한 욕심은 한 신속에 고작 한편의 작품에게 구애할 순 없었는지 너무나 많은 인용과 오마주가 있었기에 별도의 케이스로 떼어놨다. 




 
 








- 26살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