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_그저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화장>이라는 작품은 아내가 죽은 후 화장을 하기까지 삼일장을 치르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내의 장례식이 사흘간 진행되고, 여기에 추은주가 방문합니다. 그 사흘간의 이야기 중 한 갈래는 뇌종양 판정을 받은 아내가 수술을 받은 다음 죽어가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추은주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녀가 떠나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런 구성만으로 이야기한다면 전통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축제>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안성기씨가 주인공이었는데, 하지만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명랑하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중간에 동화가 끼어들고 있습니다. <화장>은 현대의 장례식을 다루면서 무겁고 어둡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장례식에 관한 감정이랄까, 둘 사이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임권택_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기서는 내가 바라보는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중년의 나이랄까, 그러니까 <축제>를 찍을 때는 그 영화를 찍었던 감독인 나를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때를 바라보면, 그 나이에는 죽음을 치장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화장>을 찍고 있는 지금은 그런 치장이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무것도 생각하는 것이 없어요. 이젠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죽음에 대해서. 여기서는 그런 시선으로 장례식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은 죽음 앞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음을 보는 <축제> 때의 감독의 정신적 죽음관이 거기에 있었다면 지금은 내 나이 여든살이 되면서 바라보는 죽음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여기에 이렇게 심어놓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씨네 21 '<화장>에 대해 정성일이 묻고 임권택이 답하다 中'


임권택 - 축제, 1996 (한국영상자료원 영상)



떠나보내는 동시 남겨지게 되는 순간, 장례와 닿아있는 이야기들은 나의 주된 관심사다. <화장>은 20여년 전 만들어진 <축제>의 죽음과 사뭇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두 편의 이야기는 비슷한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기고 있다. 같은 감독과 배우가 만나 펼쳐낸 이야기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는지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감독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배우는 지금의 자신을 기다려온다. 접점에 선 두 예술가의 시선과 표정을 떠올려보니 또 한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비슷한 시간적 무대를 갖추고 있지만 이들은 너무나 다른 영화다. <축제>의 마지막은 종종 일상의 사건 속에서 펼쳐지곤 한다. 가장 좋아하는 엔딩씬 중 하나이기에 그때마다 난 기분이 좋았다. 비단 그것은 죽음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당연한 불행이 서로의 대화 속에서 아슴푸레 회복되는 느낌이 좋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죽음의 이미지는 '호상'으로 얼버무려지는 막연한 개념 정도이기에 '이상' 내지 '환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절차로서의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 떠난 이와 남은 자의 마지막 시간을 꾸미는, 가장 밝고도 허망한 <축제>의 풍경은 감정과의 거리감이 유지된 의식(儀式)으로서의 죽음. 타인의 불운 대한 지나친 감정 몰입이 무감각한 결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나는 비극의 작은 희망이라도 비추질 기미가 보이면 타인을 향해 <축제>의 미소를 짓는 듯하다.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하기에 난 의식적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작품 전반에 깔린 정서를 사회성의 태도로 자주 참고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화장>의 경우 모든 것들로 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비극의 동반석에 올라타야 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과 나의 불완전함이 한 몸이 되어 모든걸 앗아갈 그 때에 불현듯 떠오를 감정의 저장소같은 느낌이다. 이 역시 <축제>와 마찬가지로 내 생명의 끝은 아니다. 타인은 내가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품고있는 죄책감과 무기력함의 정서는, 최소한 진심으로 슬퍼질 나의 감정 영역 내에서 작동하게 될 어떤 미래와 너무나 닮아 있다. 얼마전 사소한 일이 있었다. 심지어 우연에 가까운 현장이었다. 난 당시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라 내내 멍했었다. <화장>에 대한 몸의 반응이 그나마 이와 비슷했다. 역시 이 영화도 불행과 비극이 삶에 침투하는 순간 떠오를 것이다. 물론 내 주변의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볼 때 <축제>도 <화장>도 떠오르질 않길 바란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경우라면 전자이길.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연출작이 좋은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쉽게 잊혀질 만큼 엉성한 목적과 안일한 태도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싶다. 주체적 창작의 지대가 희박해진 이 곳에서 여든의 감독과 예순의 배우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설득력있게 들려줬다. 간만에 반가운 경험이다. 



 



로저 에버트 사후 개최된 Eberfest에서 틸다 스윈튼은 먼저 떠나간 로저를 위해 1000여명의 관객들과 함께 배리 화이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축제>와 함께 한묶음으로 기록된 사적인 기억이다. 아래의 영상은 2009년 Pedro Pires가 연출한 단편 <Danse macabre> 이다. 이 영상이 <화장>과 묶일지는 미지수지만 최근 몇 달간 겪은 것 중 '최후'에 관한 이미지로 기록될 두 편이기에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화장>에는 임권택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초현실적 환영이 등장한다. 그 덕분에 지극히 정직한 임권택의 화면과 이 실험적인 단편이 내 기억에서 같이 남겨지게 될지도.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