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글은 수잔 손택의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 (1964)>에 실린 에세이,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 Flaming Creatures (1963)> (국내 번역판의 명칭은 불타는 족속들이었지만 국내영화제 상영당시 사용된 황홀한 피조물들로 수정하였다.)에 관한 지지와 분석이다. 본문의 택스트와 하위에 첨가된 영상들은 어쩌면 누군가에겐 다소 선정적이고 불쾌한 경험이 될 수도 있음을 고지하는 바이다. * 배경음악은 상위 검은바를 이용 (미미시스터즈 - 우주여행)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 이 근접 촬영한 흐물흐물한 성기, 거대한 젖가슴, 자위행위, 그리고 구강성교 장면에 내가 유일하게 유감스러운 점은, 이런 장면들 때문에 이 걸출한 영화를 그냥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게 됐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변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입에 올린다거나 변호까지 한다고 해서, 내가 이 영화를 실제보다 덜 괴이하다거나 덜 충격적인 영화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건 아니다. 공식적으로 <황홀한 피조물들>은 여자 두명과 그보다 훨씬 많은 남자들이 중고품 할인점에서나 팔만한 현란한 색상의 여성복을 입은 채 시종일관 시시덕거리고 어울려 춤추면서, 온갖 방탕한 장면과 성적광분, 로맨스, 흡혈귀 짓을 보여주는 영화다. - 여기에 몇 곡의 라틴가요 (시보니, 아마폴라) 로큰롤, 긁히는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 연주, 투우음악, 몇명의 남자들이 여장을 한 채 등장했던 '하트모양 립스틱' 이라는 기이한 신제품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중국노래, 떨리는 고성으로 이뤄진 합창곡, 가슴 큰 어느 여자를 집단 강간하는 장면이 유쾌하게 집단 성교로 바뀌는 장면에서 나온 비명소리등이 반주로 곁들여 진다. 

간단히 말해서 <황홀한 피조물들>은 괴이하며, 또 그럴 작정으로 만든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바로 그런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공교롭게도 <황홀한 피조물들>은 포르노가 아니다. 성적흥분을 일으키려는 명백한 의도와 내용을 지닌 장르를 포르노라고 정의한다면, 이 영화의 나체 장면이나 (직접적인 성교가 두드러지게 생략된) 온갖 성적장면의 묘사는 너무나 비애감에 차있으며, 너무나 천진난만해 음란하다고 보기 힘들다. 스미스의 성교 이미지는 감상적이거나 음탕하다기 보다는 어린아이 같고 재기발랄하다. 




<황홀한 피조물들>에 대해서 경찰 당국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않다. 스미스의 영화가 법정에서 목숨을걸고 싸워야만 하리라는 것도, 슬프긴 하지만 불가피한 현실일 것이다. 실망스러운 점은 성숙한 지식인과 예술가의 공동체가 이 영화에 대해 무관심이거나 신경질적 반응, 혹은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다는 점이다. 거의 유일한 지지자는 충직한 영화감독 동아리와 시인들, 그리고 젊은 '빌리지 사람들' 뿐이었다. <황홀한 피조물들> 은 아직 일종의 컬트, <영화문화>라는 잡지를 근간으로 하는 뉴 아메리카 시네마 그룹의 입상작 수준을 졸업하지 못했다. 


우리는 스미스의 영화를 비롯해 여타 수많은 새로운 작품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 거의 혼자 힘으로 꿋꿋이 영웅적으로 작업해온 조나스 메카스에게 감사해야하리라. 그렇지만, 메카스와 그의 동료들의 선언이 과장되고 때로는 실질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황홀한 피조물들>을 포함한 이 새로운 유파의 영화가 영화사상 전례없는 발전이 될 것이라는 메카스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 호전적인 태도는 <황홀한 피조물들>의 미덕을 이해하는데 불필요한 장애로 작용해 오히려 스미스에게 해가된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어느 특정한 전통, 즉 충격적인 시적 영화의 작지만 소중한 결실인 것이다. 이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브뉘엘의 <안달루시안의 개> 와 <황금시대>, 에이젠슈타인의 <파업> 일부, 토드 브라우닝의 <별종들> , 장루쉬의 <미친 지도자들> 프랑주의 <짐승의 피> 레니카의 <미로> 케니스 앵거의 작품들 <불꽃> <살아난 전갈> 노엘 뷔르쉬의 <사제수업> 등이 있다. 


미국의 초기 아방가르드 감독들 (마야 데렌, 제임스 브러튼, 캐니스 앵거)은 상당히 치밀한 기법을 연구한 단편영화로 돌아섰다. 아주 저예산으로 작업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이 만든 영화의 색체와 카메라 촬영술, 연기, 이미지와 음향 합성은 전문적 기량을 최대한으로 살린 것이었다. 미국 영화계에 등장한 두가지의 새로운 아방가르드 스타일 가운데 하나 (그레고리 마코폴로스나 스텐 브래키지 보다는 잭 스미스나 론 라이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는 고의적으로 조잡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새로운 조류들 - 수작과 졸작, 태작 모두 - 은 부아가 치밀 정도로 영화기법의 모든 요소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투박함을 보여준다. 이는 매우 현대적인, 매우 미국적인 태도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미국만큼 구태의연한 유럽적 낭만주의가 긴 수명을 유지하는 곳도 없다. 깔끔하고 꼼꼼한 기법이 즉흥성과 진실성, 직접성을 방해한다는 믿음은 다른 어느 곳보다 미국에서 강력하게 살아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일반적인 기법이 대부분 이 신념을 표명하고 있다. (기법에 반대하는 것조차 기법이 필요하다) 


음악의 경우, 이제는 우연성을 활용한 작곡뿐만 아니라 연주도 행해지고 있으며, 새로운 음의 재료를 찾고 기존의 악기들을 절단하는 식의 새로운 방법까지 등장했다. 회화와 조각의 경우에는 일회용품이나 기존의 잡동사니들을 재료로 이용하는 방법, 일부러 부서지기 쉬운 작품 (한번 쓰고 버리기) 을 만드는 방법, '해프닝' 같은 방법이 있다. 나름대로 <황홀한 피조물들>도 일관성과 기술적 완성도라는 예술작품을 둘러싼 속물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캠프적인 미학을 응축하고 있는 이 전무후무한 이단적인 작품은 도착적이며 비순응적인 정의불가능한 성의 주체들의 사육제를 극화하며, 저속하면서도 또한 극한적으로 숭고한 그러나 표면만이 존재하는 실낙원의 인물들을 재연한다. 아마 모든 캠프적 영화들은, 요컨대 <핑크 플라멩고>에서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까지, <황홀한 피조물들>에 진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황홀한 피조물들>의 (내가 세어본 바에 의하면) 일곱 시퀀스는 서로 확연히 구분될 분만 아니라 이야기도, 줄거리도, 마땅한 순서도 없다. 일련의 대목에서는 정말로 과도한 노출을 의도한 것이 아닌가 의심도 하게 된다. 그 어떤 장면도 그보다 더 길거나 짧지 않은 바로 그 길이로 만들어야 했다는 이유를 납득시켜주지 못한다. 쇼트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맞춰지지 않았다. 머리 부분이 잘려 나온다거나 아무 연관 없는 인물들이 장면 끝머리에 불쑥 등장하는 식이다. 카메라는 대부분 손으로 들고 찍었고, 영상이 자주 떨린다. (이런 방법이 완전히 효과를 거둔,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의도된 부분은 집단 성교를 찍은 장면이다)

그러나 <황홀한 피조물들>이 보여주는 아마추어적인 기법은, 최근의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보는 이를 짜증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스미스가 시각적으로 감칠맛 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매순간 볼거리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 영상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즐거운 전율과 아름다움이 있다. 강력한 영상이 쓸모있는 영상 때문에 그 효과가 떨어지는 순간에 조차, 혹은 좀더 다듬어 졌더라면 더 좋았을 장면에서 조차 그렇다. 

오늘날에는 기교에 대한 무관심이 휑뎅그렁함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신중한 계획에 반감을 드러내는 현대예술은 흔히 미학적 금욕주의의 형태를 띄는 것이다. (추상표현 주의 회화들이 대부분 이런 금욕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홀한 피조물들>의 금욕주의는 이와는 다르다. 다시말해, 이 작품에는 시각적 소재가 흘러넘친다는 뜻이다. <황홀한 피조물들>에는 생각이나 상징도, 무언가에 대한 논평이나 비판도 없다. 스미스의 영화는 순전히 감각에 바치는 향응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프랑스의 수많은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문학적' 영화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황홀한 피조물들>을 보는 즐거움은 우리가 보고 있는것을 이해한다거나 해석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상 그 자체의 직접성과 강력함, 양적인 풍성함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진지한 현대예술과 달리, 이 작품은 좌절된 의식, 막다른 궁지에 몰린 자아를 다루지 않는다. 이렇듯 스미스의 조잡한 기교는 <황홀한 피조물들>에 구현된 감성 - 생각을 부인하는 감성, 부정 너머에 자리잡은 감성- 에 멋지게 이바지 한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현대에 보기드문 예술작품이다. 이 영화는 기쁨과 천진난만함을 다룬다. 분명히, 이 기쁨, 이 천진 난만함은 (보통 기준으로 볼때) 뒤틀리고 퇴폐적이며, 아무리 못해도 대단히 연극적이고 인위적인 주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이 때문에 이 영화가 아름다움과 현대성을 얻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오늘날의 한 장르, 즉 '팝아트'라는 경박한 이름으로 통하는 장르의 훌륭한 견본이 되는 작품이다. 스미스의 영화는 팝아트의 쾌활함과 꾸밈없는 천진함, 교훈주의에서 벗어난 활력 넘치는 자유도 있다. 팝아트 운동이 지닌 한가지 위대한 미덕은 뭔가 주제에 대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낡은 규범을 후려갈기는 방식에 있다. (말할것도 없이 세상에는 입장을 취해야만하는 일련의 사안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건 아니다. 그런 사안을 다룬 예술작품의 극단적인 사례가 <대리인>일 것이다. 내말은, 인생에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는 요소들, 특히 성적 쾌락같은 요소들도 있다는 뜻이다)


팝아트라고 불리는 작품들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작품들은 예술에서 묘사된 것 -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인생에서 경험한 것- 에 반드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낡은 사명을 내던지겠다는 의도를 실천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체제순응주의의 또다른 징후, 대중문화의 가공물에 환호하는 일종의 열병 현상이라며 팝아트를 도외시하는 자들의 생각이 어리석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팝아트는 이전 같으면 모순으로 여겨졌을 멋지고도 새로운 요소가 뒤섞인 행동양식을 받아들인다. 이렇듯 <황홀한 피조물들>은 성교를 재기 발랄하게 조종할 뿐만 아니라 성적 충동을 과장되게 그리고 있다. 시각적인 면만 보더라도 이 영화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 장면들, 가령 늘씬하고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앙상하고 털투성이의 사람들이 뒹굴고 춤추고 성교하는 무질서한 장면들 중간 중간에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시각효과 (레이스 달린 옷가지,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 활인화)가 삽입되는 식이다. 


스미스의 영화는 복장도착증의 시학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라고 도 볼 수 있다. <황홀한 피조물들>에 제 5회 독립영화상을 수여한 <영화문화>는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변태들에 대한 값싼 동정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복장 도착증 환자들의 영광과 화려함, 요정나라의 마술로 우리를 강타했다. 그는 우리 삶의 한구석에 불을 밝혀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멸시하는 구석이긴 하지만"



<황홀한 피조물들>은 알고보면 동성애보다는 이성애를 다룬 영화다. 스미스의 통찰은 자신이 그린 천국과 지옥의 그림에서 몸부림치는 인물, 파렴치한 인물 등을 독창적으로 묘사해낸 보슈의 통찰과 비슷하다. 동성애적 사랑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그린 앵거의 진지하고 감동적인 영화 <불꽃> 이나 주네의 <사랑의 찬가>와는 달리, 스미스의 등장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인지 쉽사리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성애의 다종다양한 쾌락 속에서 불타오르는 '피조물'들이다. 이 영화는 모호함과 다의성의 복잡한 거미줄로 엮어낸 작품이며, 그 으뜸 이미지는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분간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장면이다. 흔들리는 젖가슴과 흔들리는 성기를 바꾼다한들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보슈는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남녀양성 소유자와 나체를 배경 삼아, 자신만의 기이하고 불완전한 관념적 형상을 구축해냈다. 스미스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배경 대신에 (인물이 실내에 있는지 야외에 있는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의상과 몸짓, 음악 같이 철저하게 인공적인 경관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양성성의 신화가 진부한 음악, 광고, 의상, 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촌스러운 영화들에서 끌어온 한 다발의 환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스미스는 '캠프'에 관한 지식을 풍부히 콜라주해 <황홀한 피조물들>을 촘촘히 짜놓았다. 흰색옷을 입은 채 머리에 백합을 한송이 꼿고 고개를 수그린 여인 (여장남자)이 있고, 관에서 나온 말라빠진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나중에 흡혈귀임이, 그리고 끝에 가서는 남자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검은 레이스가 달린 만털라를 두른 채 부채를 들고 스페인 풍의 춤을 추는 커다란 검은 눈의 무희(이 사람도 복장도착증 환자다)  


  
<아라비아의 족장>이라는 그림에서 따온 두건 달린 외투를 입은 채 비스듬히 기대누운 남자들과 무신경하게 한쪽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아리비아의 여부, 슈테른베르크가 1939년대 초반에 디트리히와 함게 찍었던 영화들의 밀도 높고 복잡한 구성을 연상시키는 꽃과 엉마에 기대 누운 두 여인의 장면등이 있다. 스미스는 라파엘 전파의 나름함, 아르누보, 1920 대의 이국적 스타일, 스페인과 아랍의 분위기, 대중문화를 즐기는 현대의 '캠프'기법에서 끌어온 표현 형식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와 구성을 만들어낸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세계를 심미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런 통찰력은 십중 팔구 양성성을 근저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예술은 아직껏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황홀한 피조물들>이 움직이는 영역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비평가들이 예술의 자리로 지정해 왔던 도덕관념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에게는 도덕의 영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잣대로 보자면 <황홀한 피조물들>은 정말로 형편없는 영화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심미적 영역, 쾌락적 영역도 있다. 여기가 바로 스미스의 영화가 움직이며 그 생명을 누리는 곳이다. 

 - the end 수잔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中 -












잭 스미스

캠프 영화의 고전이자 금지된 걸작으로 영화 애호가들의 소문 속에 회자되던 <황홀한 피조물들>의 감독, 잭 스미스는 그의 작품 하나 만으로도 미국 아방가르드 특히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유럽의 감독들(예를 들어 페데리코 펠리니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장-뤽 고다르, 아그네스 바르다 등)은 벨기에와 뉴욕을 방문하였고 그의 팬이었던 앤디 워홀이 자신의 팩토리를 통해 영화 작업에 뛰어들었던 것 역시 유명한 일화이다. 분명 잭 스미스의 영화들은 부박하고 화려한 캠프적인 취미에 흠뻑 빠진 채 어떤 윤리적 명령의 강요도 영향을 미치는 순진무구한 관능과 열정 사이로 유영하는 현대 영화의 괴물들이다. 잭 스미스는 그 스스로 공공연한 게이였으며 자신의 영화에서 당시의 하위문화로부터 비롯된 게이 정체성, 특히 드랙 퀸과 이성복장착용자들, 성전환자들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재현한 인물들에 대한 그 스스로의 정의였으며 그의 작품 제목에 빈번히 등장하기도 하는 '피조물(creatures)'은 매우 시사적이다. 느와르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디즘적인 범죄자나 팜므 파탈이 동성애 정체성의 은유로 전유되었거나 아니면 공포 영화에서 괴물의 이미지를 통해 배제된 자, 비천한 존재로서 자신을 재현했던 동성애자들과 유사하게 잭 스미스 역시 자신의 불법적인 섹슈얼리티를 기괴한 모습의 인물들을 통해 표상한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에서의 비극적이면서도 모호한 존재인 범죄자, 요부, 괴물들과 달리 잭 스미스는 매우 유쾌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이들의 삶을 일종의 문화적 인공물로 가정한다. 즉 잭 스미스는 우리 모두의 삶을 장식과 수사, 색채와 양식화된 몸짓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간주한다. 잭 스미스는 영화 감독일 뿐 아니라 다른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의 배우로서, 사진작가, 연극 연출자, 디제이, 열정적인 의류 수집가, 비평가이기도 하였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현재 잔존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복원이 완료된 <황홀한 피조물>을 비롯한 5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 2003년 쾌락의 셀룰로이드 궁전 프로그램 당시 감독 설명 -

 












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수 많은 책들을 넘겨본다. 그곳에는 걸작의 가치에 대한 찬사가 있을 수 있으며, 때때론 시대사적 해프닝들의 단편적 제시와 빛바랜 논란의 역동들이 담겨있기도 하다. 허나 드넓은 스펙트럼의 그물망에도 잡히지 않는 비사들도 존재한다. 특히 세계영화사를 한글로만 읽어내려 간다면 만나보기 힘든 이름들도 존재하고있다. <아라이아 로렌스>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던 해, 고다르는 <경멸>을 구로자와 아키라는 <천국과 지옥>을 펠리니는 <8 1/2>을 김기영은 <고려장>을 세상에 내놓은 해. 영화의 타이틀이 사서에 오르는 순간에는 항상 탄생년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흐름을 읽어 내려가며 영향과 가치를 분석할때 가장 명확하고 편의적인 방법은 시대사적인, 년도분류에 따른 구분일 것이다. 1963. 이들을 묶는 하나의 공통어, 네자리 숫자의 그림자속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과거의 용암, 실험영화의 어느 지점인 동시 수 많은 논란을 낳은 문제작. 잭 스미스 감독의 <황홀한 피조물들>에 대한 에세이를 위에 소개해봤다. 세가지 연유에서 옮겨봤다. 첫째론 수잔 손택에 대한 탄복이지만, 이는 본 포스팅에 있어 발단이나 동기 정도의 단서이니 다음 기회에 더욱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남겨두도록 하고, 두번째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토록 소중한 영감의 원천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혹은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에 대한 역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반세기전의 특수한 영화운동의 흐름과 시효만료의 논란만이 <황홀한 피조물들>의 유일한 존재가치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는 지나치게 틀에 얽매인 심심한 사조놀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2011년에 와 이 작품을 지지하고 언급하는 일이 비상식적이고 퇴폐적인 컨셉에대한 치기어리고 무조건적인 지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이다. 물론 시초에 대한 예우도 아니다. 일반의 시야에서 극단적 예술의 영역으로 치부되며 장외로 밀려나버린 본 형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반세기를 건너서도 유효한 특수해석의 가치를 유지하게 됐다는대에서 <황홀한 피조물들>에 대한 수잔 손택의 지지와 미인지자들에 대한 경각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현재는 물론이고 50여년 전 <황홀한 피조물들>이 등장했을 당시에도 본 작품의 가치는 평상의 해석적 시각으로 재단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익스페리멘탈 / 언더그라운드 무비로 분류되는 본 작품의 해석은 심미적이고 직관적인 탐색을 통해 이뤄져야 할것이며,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아온 이런류들의 자유롭고 쾌락적인 세계관은 흡사 미술관에서 경험해온 현대미술의 수용방식과 비슷한 형태로라도 받아들이며 그 가치와 존재이유를 논의하고 공유해야 할것이다.      

컬트무비에 대한 매혹과 열광도 끌어와본다. 특이취향의 과도유입과 특수팬덤을 노린 기획적 허술함들로 설명되는 현대영화의 돌연변이들, 그들이 치장한 마이너한 분위기에선 찾아보기 힘든 유영하는 자유로움들을 이전의 중단편 실험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본 작품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는 크리스 마르케의 1962년작 <활주로>역시 영감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과거의 신품이라 생각한다. 그야말로 소수에게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컬트무비의 조건은 어쩌면 이들에게 더 유리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파괴가 작품의 입장을 더디게 하지만, 장르와 매체를 초월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들을 대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창의적인 영감의 긍정적 원천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 연유는 통제와 닳아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이었다. 멀리갈것 없이 <황홀한 피조물들>의 감상 전후로 경험한 <악마를 보았다>의 검열과 <블랙 스완>의 충격요법에 대한 개인적 의문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1963년 영화가 공개되었을 당시 작품의 표현수위는 충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인한 사회적 파장도 엄청나 본 작품을 지지한 어느 누군가는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반세기전의 빛바랜 해프닝을 듣다가 문득 두가지 갈래로 의문이 생겼다. 폭력과 성에 관한 표현수위. 이전에 7인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실험영화 <제한해제>를 다루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적이있다. 나체의 전시와 상식에 어긋난 성교로 점철된 필름이라고 해서 포르노취급을 당해야 하는가? 김지운과 이병헌의 메인스트림의 폭을 넓힌 과감한 시도가 어째서 1,2 초 차이로 제한상영과 청소년관람불가 사이를 오가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페이드 아웃과 함께 과거장면 하나를 인서트 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박찬욱 감독이 2002년 <죽어도 좋아> 제한상영가 판정당시 올렸던 격문이다.




그뒤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그 영화 얘기를 해댔습니다. 기자들을 만나면 빨리 감독 인터뷰 잡으라고 충고했고 감독들을 만나면 우리 반성하자고 촉구했으며, 민간인을 만나면 “기다려라, 죽이는 영화가 너희 곁을 찾아갈 것이니. 한국영화, 이제 장난 아니니라”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번 판정으로 저, 완전히 바보됐습니다.


구강 아니라 비강으로 한들 뭐가 대숩니까, 아래로 들어가면 정상이고 위로 들어가면 변태입니까? 국가가 체위도 정해주나요? 남성기가 크게 잡혀서 안 된다고요? 중요한 건 어느 신체기관이 찍혀 있느냐가 아니잖습니까. 영화가 무슨 축군가요? ‘핸들링’처럼 ‘페니슬링’하면 반칙인가 보죠? 그럼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해놓은 미술사의 숱한 걸작들은 다 뭡니까. 그리고, 성교를 가짜로 했든 진짜로 했든 그런 게 왜 문제죠? 가짜로 하는 영화들일수록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나요? 예를 들어 너무 실감나게 연기해서 꼭 진짜 같아 보이는 어떤 에로틱한 영화가 있다고 칩시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배우들을 불러 실제 삽입 여부를 조사 확인한 다음, “삽입이면 제한이요, 불입이면 십팔이라…”, 이러실 건가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기들 좋아서 진짜로 성교하는 장면과 아무 애정도 없는 배우들이 억지로 성교하는 척만 하는 장면 중에 어느 쪽이 보기에 아름다운가요? 그 장면에서 심의위원 여러분은 정말 성적 수치심을 느끼셨나요, 아니면 ‘나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은 그럴 거야’라고 생각하셨나요. 전자면 과민이요, 후자면 오만이라….


제 생각에는 여러분이 뭔가를 심판하려는 자세로 영화를 봐서 그런 착각이 생겼지 않았나 싶군요. 그냥 편한 마음이었다면 여러분도 아마 저희 부부처럼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우는 희한한 경험을 하셨을 텐데, 참 안 됐네요.

 


<황홀한 피조물들>과 <악마를 보았다>의 연계를 상상하며 내가 언급하고자하는 바는 논리적인 반박이나 시스템에 대한 모순지적이 아니다. 음악부터 영화까지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 현 체계에 대해 놀라움을 표할뿐이다. 수잔 손택의 글을 옮기게 된 몇몇가지 연상중 하나이기에 언급하며 문제제기할뿐 도저히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다. <숏버스>와 <악마를 보았다>를 향한 몰상식하고 박한 대우들. 과연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것이 맞을까. <블랙스완>에 대한 고민은 충격과 표현이 점점 닳아져갈 몇몇 장르영화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심리스릴러 한편을 본 후 <황홀한 피조물들>의 해프닝을 듣고나니, 대런의 강박적 걸작이 몇십년 후에 받을 평가에 있어 연출장치에 대한 둔화가 걱정되어 살짝 고민했던건데, 얼마전 시네마테크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시스터즈>을 보면서, 예상가능하고 고립타분한 순간을 영화적 고민을 통해 놀랍고도 지속가능한 충돌로 변환시키는 모습을 보며 한시름 걱정을 덜어놓긴 했다. 케익살해씬은 관객을 엄습하는 독특한 힘이 존재한다.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다. 

말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이거다.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은 보다 더 많이 언급되어야 하며, 수잔 손택의 글들은 보다 더 많이 읽혀야 한다는 것. 어쩌면 괴상한 40여분의 영상물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영화적 고민을 파생시켜준 독특한 경험이었기에 애정과 존경을 아끼고 싶지 않다.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