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2016. 11. 8. 12:35 from I​nfluence/Private







지금껏 보아온 영상매체의 모든 순간들을 통틀어 최후의 1초를 고르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 순간이다. 이 때의 이별은 BGM 의 얄팍함과 시점쇼트의 위대함을 동시에 일러준 최고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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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2016. 9. 2. 14:47 from I​nfluence/Private



진공의 시간이 있다. 가령 고속버스에 앉아 지루한 풍경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거나 이상할 정도로 느린 엘레비에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숨죽이며 서있는 순간들이 그렇다. 생각의 시작점은 모르겠으나 그럴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특별한 능력의 취사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해줄리 만무하지만 그냥 아무런 맥락없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해 본다. 언제나 일순위는 상대방이 듣고 있는 음악을 남몰래 청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큰 힘은 항시 책임감이 따르기에, 지나치게 큰 힘은 항시 완력이 감정적 측면의 사고에 우선하기에 부담스럽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하기에 난 상대의 음악을 스리슬쩍 나혼자만 엿들을 수 있는 능력을 원한다. 사람들에 대한 궁금즘이 많다. 어쩌면 이 따분한 사회구조속에서 평생 이렇게 지루하게 살다가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 혹 상대와 대화를 나누거나 인연을 꾸려가지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에 대한 사소한 취향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내 기준에 있어선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시민들로부터 어떠한 책임감도 양도받지 않을 부담없는 능력인 동시 음악이라는 위대한 예술을 바탕으로 상대를 추리해간다는 측면에서 정말이지 낭만적인 능력이다. 


이는 어찌보면 이기적이고 게으른 성향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취향과 기호를 바탕으로 인연을 선택한다. 일전에 특정부류의 인간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본적이 있다. 감정싸움의 성취에 굉장히 무디며 정서적으로 많은 것들을 일방향의 흡수로 일관하는 심심한 사람들에 관한 글이다. 자존감에 기반한 기싸움을 선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언제나 편한 태도로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주지만 남들보다 훨씬 낮은 지점에 있는 일정한 경계를 건드리는 순간 그 관계는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해가 간다. 이는 별다른 욕심이나 불안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저냥 살아가는 지독한 회의주의자들이 타인들의 눈에 긍정적인 인물로 비춰질 때 발생할 여지가 있다. 그러하기에 사람을 쉽게 사귀고 가볍게 다가가지만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들은 부담없지만 절대로 그 경계를 건드리지 않을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 같다. 


초인적인 능력에 관한 아무런 맥락없는 이 몽상은 결국 나 자신이 아무런 판단 없이 잡다한 사고들만 이런 저런 경험에 섞어 속절없이 띄워보내고 있는 지금의 오후와 닮아 있기에 그냥 멍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이러한 능력을 가진 지구인이 있다면 그건 김창완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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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풍경을 떠올리게 될 때 가장 먼저 생각날 영화다.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내 스스로 생각하던 인간의 정서적 본질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사적인 영역에서 무엇인가 닿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가 끝나가는 순간이 오면 감독이 어떤 음악으로 영화를 닫을지가 궁금해지는 법이다. 엔딩크레딧은 Tindersticks 와 함께 한다. 마지막까지 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는 결국 감독의 언질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화자의 의도는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사고의 여지를 방해하는 일은 내 방식의 감상법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건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항상 눈여겨 보는 것은 상대의 작은 몸짓과 시선에서 떠올려보는 나의 과거와 가치이다. 외면적으론 거창할 거 없어보이는 관계의 갈구일지라도 스스로를 온전히 순수하게 펼쳐 보일 수 있는 타인을 만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관계의 양상은 생각보다 훨씬 폭이 좁다. 

이벤트같은 만남 속에서 진정성 가득 한 스스로의 모습을 입 밖으로 꺼내볼때면 어느순간 서툰 자신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낯설고 어색한 일이지만 정말이지 기분 좋은 순간이다. 어찌그리 외롭고 이 얼마나 힘겨운 인생살이인가. 모두가 자신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진실한 순간에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그게 행복해지는 수단의 한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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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오 풀치 감독의 <City of the leaving dead>는 몇몇 씬의 박력과 애벌레의 이미지만으로도 오랜 시간 기억 속에 남을 만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안개 자욱한 던위치의 분위기를 멋지게 표현해준 사운드트랙이야말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아래 사운드트랙 영상에서 1분 3초 부터 시작되는 부분, 필립 그래스가 'thin blue line' 테마에서 선보였던 바 있는 작품 분위기와 소리의 합, 그 이상적인 만남을 간만에 느껴본 것 같았다. 나는 사실 영화 속 스코어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굳이 이 음악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꽤나 예외적인 일이다. 오컬트적이고 단발적으로 폭력적이며 우울함이 지배하는 영화의 공기에는 이 음악이 정말이지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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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16.08

2016. 8. 8. 22:32 from I​nfluence/Artist






















ALESSANDRO ZANONI















                    































Daido Moriyama






































Esther Bubley






























Jean mohr



























Lu Nan
























NOBUYOSHI ARAKI


























ralph eugene meatyard























Weegee























William Klein
























Yuan Dong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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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은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종종 예술과 상품의 경계에서 갈등담론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상업성의 순기능 중 하나로서 그 작품의 시대성과 개인의 기억이 그 행보를 함께 하게 해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위에 언급한 예술-상업 담론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부분은 새로운 의미로 정의되곤 한다. 최근 몇년 간 각종 예능프로를 통해 90년대 음악적으로 홀대받았던 대중상품들이 추억의 매개로서 각광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됐다. 전부터 하던 생각이지만 문화의 위대한 점은 상품성이란 기준에 맞춰 시대를 불가피하게 반영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본다. 작가의 창의력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편차가 존재하지만 그 기반에는 최소한의 시대적 요구가 존재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대상을 통해 작가의 주제를 전달받기도 하지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순간의 풍경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고히 간직하게 된다. 만일 현 시점에서 극장에 걸려있는 '우리들'이란 영화를 보게 된다면 20여 년 후 우리의 기억속에 이 영화는 20대 혹은 30대의 시선에서 어린시절의 미묘한 감정을 뒤늦게 포착했던 자신의 감정의 진폭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인생여정 속 2016이란 카테고리 속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The era of cinema'는 기억의 매개로서 문화가 자리하는 위치를 분명히 해주는 작품이다. 21미터 설치비디오로를 통해 개인의 시점과 기억의 순간을 잇고있다. 영화를 본 후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극장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돈을 내고 이야기와 음악을 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시간때우기의 일부로 의례적으로 행해진다 할지라도 그 기억이 갖는 가치는 함부로 예상할 수도 예단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인디스 월드'를 본 후 광화문에서 잠실까지 돌아오던 그 길의 풍경과 날씨가 선명히 기억난다. 난 이 영화를 본 후 인권에 대한 사고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마이클 윈터바텀이 주목했던 시대적 이슈가 내게 어떠한 큰 영향을 줬는지는 분명히 설명하긴 힘들다. 그럼에도 난 2005년의 그 어떤 순간의 감정도 명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극장을 나서던 때의 심정만은 또렸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게 이 영화는 소중하게 남아있다. 이것은 내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 동시 향후 내가 인생을 살아갈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작게나마 힌트를 주고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의 단서가 20대 초반의 나에게 던져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추억거리를 선택할 수 없다. 무엇이 어떠한 의미로서 먼 훗날의 내게 메시지를 던져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재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서다. 모두에게 추천한다는 표현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모든 사람이 봤으면 한다. 무작위의 예비된 추억거리들은 음악의 형태를 가졌을 때 그 파급력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BGM 이란 표현과 같이 무엇인가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문화는 많지가 않다. 이것은 존중의 위협인 동시 어마어마한 영향력의 상징일 것이다. 음악은 인생의 특정 시점을 장식해주는 통과의례가 되기도 한다. 음악은 그 장소를 특정하는 기억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음악은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생각들을 포장해 놓은 사물이 될 수도 있다. 2014년에 제작된 '이 노래를 기억하세요? Alive inside' 는 예술/문화가 가진 시간적 지표로서의 굳건함. 그 축복과 같은 기억의 매개로서의 사명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다시한번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모든 사람들이 봤으면 한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 있어 국가와 개인의 도리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선에서 절차가 진행되듯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가끔 외롭고 소외된 누군가를 위해 작은 아이디어를 행복하게 실현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하곤한다. 이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 정말 창의적이고 고마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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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우주정거장 ISS 의 일상적 풍경을 담은 25분 가량의 다큐 영상이다. 이 기록이 흥미로운 것은 우주공간에 항시 따라붙던 비장미 몽환적인 느낌이 완전히 배제된 분위기 덕이다. 이토록 평범한 집들이 투어식 접근법을 우주정거장이라는 낯선 장소에 대입하니 묘한 조화가 이뤄졌다. 무엇보다 저음 나레이션을 사용해 기어코 하나라도 더 가르쳐보겠다는 식의 느끼한 태도가 없어서 마음에 든다. 얼마전 김홍준 교수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이클 무어의 데뷔작 '로저와 나'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새삼 다큐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성일은 일반 개개인의 홈무비에 편집의 개념이 일상화되는 순간 영화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저 낯선 공간에서 날아온 이 다큐영상을 보다보니 문득 미래에 생겨날 수많은 사적 영화들은 다큐의 영역과 아주 친밀한 존재가 될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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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2016. 8. 1. 11:58 from I​nfluence/Private


며칠 전 한강다리를 건넌 적이 있다. 평소라면 거닐 일이 없는 서강대교 위였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본 한강의 모습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밤섬의 존재였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다리 위를 걸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20대 초반 언제쯤 별다른 목적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 건넜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이 곳을 언젠가 걸어본 경험이 있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 당시 이해준 감독이 했던 상상을 못했던 걸까. 한강다리-투신-밤섬-표류. 너무도 명백하고도 매혹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현장에서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어릴적에는 항상 찰리 카우프만 식의 창조를 창의라 맹신했던 것 같지만 조금씩 다양한 환경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과 저마다의 가치에 수차례 놀람을 반복하다 보니 존재하는 것, 당연한 것 속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스토리텔링의 재능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최근 읽어 본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셸 퓌에슈가 쓴 '설명하다'였다. 설명이라는 동작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소통과정에서 설명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특정한 동사 내지 형용사 하나로 세상살이의 가치를 갈무리하는 모습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무작정 걷고 보고 들으며 성장해 온 내 20대를 모두 끝마치고 성인기의 한 단락을 전환하려는 현 시점에서 나만의 동작을 떠올려본다면 아마도 '경험하다'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인 것 같다. 대상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자극하는 모든 동기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일텐데 나는 지난 삶의 경험들을 차곡히 몸 속에 쌓아 느낌을 서강대교 위에서 밤섬을 내려다보며 어느정도 정리하게된 것 같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지' 에서 '어떻게 이 생각을 못할 수가 있었지'로 옮겨간 것이 20대의 모든 경험이 내게 건내준 소박한 의문문인 것 같다. 비단 이것은 창작과 창의에 관한 문제 뿐만이 아니다. 발단은 그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사회적, 일상적 분야에 있어서 나라는 사람이 신경쓰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점차 늘어가기만 하는 것을 느끼고 있기에 단순히 어느 한가지 요소에 매몰된 독자적 사고에서 벗어나 주변의 인과관계와 예외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 보다 성숙한 시각이 몸에 베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저만치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홀로 빛나는 무엇을 막연히 동경하기 보단 나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의 서로 다른 경험에 기반한 그들 각자의 이야기에 더욱 귀기울이게 되는 30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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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1

2016. 6. 24. 16:08 from I​nfluence/Private








사당




















노량진














노량진

















노량진


















신촌












팔달문


















연무동






















천호



















창룡문




















연무동


















연무동
















망원시장















영등포















연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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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_그저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화장>이라는 작품은 아내가 죽은 후 화장을 하기까지 삼일장을 치르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내의 장례식이 사흘간 진행되고, 여기에 추은주가 방문합니다. 그 사흘간의 이야기 중 한 갈래는 뇌종양 판정을 받은 아내가 수술을 받은 다음 죽어가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추은주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녀가 떠나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런 구성만으로 이야기한다면 전통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축제>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안성기씨가 주인공이었는데, 하지만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명랑하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중간에 동화가 끼어들고 있습니다. <화장>은 현대의 장례식을 다루면서 무겁고 어둡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장례식에 관한 감정이랄까, 둘 사이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임권택_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기서는 내가 바라보는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중년의 나이랄까, 그러니까 <축제>를 찍을 때는 그 영화를 찍었던 감독인 나를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때를 바라보면, 그 나이에는 죽음을 치장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화장>을 찍고 있는 지금은 그런 치장이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무것도 생각하는 것이 없어요. 이젠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죽음에 대해서. 여기서는 그런 시선으로 장례식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은 죽음 앞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음을 보는 <축제> 때의 감독의 정신적 죽음관이 거기에 있었다면 지금은 내 나이 여든살이 되면서 바라보는 죽음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여기에 이렇게 심어놓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씨네 21 '<화장>에 대해 정성일이 묻고 임권택이 답하다 中'


임권택 - 축제, 1996 (한국영상자료원 영상)



떠나보내는 동시 남겨지게 되는 순간, 장례와 닿아있는 이야기들은 나의 주된 관심사다. <화장>은 20여년 전 만들어진 <축제>의 죽음과 사뭇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두 편의 이야기는 비슷한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기고 있다. 같은 감독과 배우가 만나 펼쳐낸 이야기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는지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감독은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배우는 지금의 자신을 기다려온다. 접점에 선 두 예술가의 시선과 표정을 떠올려보니 또 한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비슷한 시간적 무대를 갖추고 있지만 이들은 너무나 다른 영화다. <축제>의 마지막은 종종 일상의 사건 속에서 펼쳐지곤 한다. 가장 좋아하는 엔딩씬 중 하나이기에 그때마다 난 기분이 좋았다. 비단 그것은 죽음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당연한 불행이 서로의 대화 속에서 아슴푸레 회복되는 느낌이 좋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죽음의 이미지는 '호상'으로 얼버무려지는 막연한 개념 정도이기에 '이상' 내지 '환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절차로서의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 떠난 이와 남은 자의 마지막 시간을 꾸미는, 가장 밝고도 허망한 <축제>의 풍경은 감정과의 거리감이 유지된 의식(儀式)으로서의 죽음. 타인의 불운 대한 지나친 감정 몰입이 무감각한 결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나는 비극의 작은 희망이라도 비추질 기미가 보이면 타인을 향해 <축제>의 미소를 짓는 듯하다.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하기에 난 의식적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작품 전반에 깔린 정서를 사회성의 태도로 자주 참고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화장>의 경우 모든 것들로 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비극의 동반석에 올라타야 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과 나의 불완전함이 한 몸이 되어 모든걸 앗아갈 그 때에 불현듯 떠오를 감정의 저장소같은 느낌이다. 이 역시 <축제>와 마찬가지로 내 생명의 끝은 아니다. 타인은 내가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품고있는 죄책감과 무기력함의 정서는, 최소한 진심으로 슬퍼질 나의 감정 영역 내에서 작동하게 될 어떤 미래와 너무나 닮아 있다. 얼마전 사소한 일이 있었다. 심지어 우연에 가까운 현장이었다. 난 당시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라 내내 멍했었다. <화장>에 대한 몸의 반응이 그나마 이와 비슷했다. 역시 이 영화도 불행과 비극이 삶에 침투하는 순간 떠오를 것이다. 물론 내 주변의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볼 때 <축제>도 <화장>도 떠오르질 않길 바란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경우라면 전자이길.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연출작이 좋은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쉽게 잊혀질 만큼 엉성한 목적과 안일한 태도로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싶다. 주체적 창작의 지대가 희박해진 이 곳에서 여든의 감독과 예순의 배우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설득력있게 들려줬다. 간만에 반가운 경험이다. 



 



로저 에버트 사후 개최된 Eberfest에서 틸다 스윈튼은 먼저 떠나간 로저를 위해 1000여명의 관객들과 함께 배리 화이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축제>와 함께 한묶음으로 기록된 사적인 기억이다. 아래의 영상은 2009년 Pedro Pires가 연출한 단편 <Danse macabre> 이다. 이 영상이 <화장>과 묶일지는 미지수지만 최근 몇 달간 겪은 것 중 '최후'에 관한 이미지로 기록될 두 편이기에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화장>에는 임권택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초현실적 환영이 등장한다. 그 덕분에 지극히 정직한 임권택의 화면과 이 실험적인 단편이 내 기억에서 같이 남겨지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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