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보아온 영상매체의 모든 순간들을 통틀어 최후의 1초를 고르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 순간이다. 이 때의 이별은 BGM 의 얄팍함과 시점쇼트의 위대함을 동시에 일러준 최고의 순간이다.
진공의 시간이 있다. 가령 고속버스에 앉아 지루한 풍경을 반복적으로 마주한다거나 이상할 정도로 느린 엘레비에터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숨죽이며 서있는 순간들이 그렇다. 생각의 시작점은 모르겠으나 그럴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특별한 능력의 취사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해줄리 만무하지만 그냥 아무런 맥락없이 그 중 하나를 선택해 본다. 언제나 일순위는 상대방이 듣고 있는 음악을 남몰래 청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큰 힘은 항시 책임감이 따르기에, 지나치게 큰 힘은 항시 완력이 감정적 측면의 사고에 우선하기에 부담스럽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하기에 난 상대의 음악을 스리슬쩍 나혼자만 엿들을 수 있는 능력을 원한다. 사람들에 대한 궁금즘이 많다. 어쩌면 이 따분한 사회구조속에서 평생 이렇게 지루하게 살다가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 혹 상대와 대화를 나누거나 인연을 꾸려가지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에 대한 사소한 취향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내 기준에 있어선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시민들로부터 어떠한 책임감도 양도받지 않을 부담없는 능력인 동시 음악이라는 위대한 예술을 바탕으로 상대를 추리해간다는 측면에서 정말이지 낭만적인 능력이다.
이는 어찌보면 이기적이고 게으른 성향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취향과 기호를 바탕으로 인연을 선택한다. 일전에 특정부류의 인간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본적이 있다. 감정싸움의 성취에 굉장히 무디며 정서적으로 많은 것들을 일방향의 흡수로 일관하는 심심한 사람들에 관한 글이다. 자존감에 기반한 기싸움을 선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언제나 편한 태도로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주지만 남들보다 훨씬 낮은 지점에 있는 일정한 경계를 건드리는 순간 그 관계는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해가 간다. 이는 별다른 욕심이나 불안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저냥 살아가는 지독한 회의주의자들이 타인들의 눈에 긍정적인 인물로 비춰질 때 발생할 여지가 있다. 그러하기에 사람을 쉽게 사귀고 가볍게 다가가지만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들은 부담없지만 절대로 그 경계를 건드리지 않을 관계들을 추구하는 것 같다.
초인적인 능력에 관한 아무런 맥락없는 이 몽상은 결국 나 자신이 아무런 판단 없이 잡다한 사고들만 이런 저런 경험에 섞어 속절없이 띄워보내고 있는 지금의 오후와 닮아 있기에 그냥 멍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이러한 능력을 가진 지구인이 있다면 그건 김창완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ALESSANDRO ZANONI
Daido Moriyama
Esther Bubley
Jean mohr
Lu Nan
NOBUYOSHI ARAKI
ralph eugene meatyard
Weegee
William Klein
Yuan Dongping
국제우주정거장 ISS 의 일상적 풍경을 담은 25분 가량의 다큐 영상이다. 이 기록이 흥미로운 것은 우주공간에 항시 따라붙던 비장미나 몽환적인 느낌이 완전히 배제된 분위기 덕이다. 이토록 평범한 집들이 투어식 접근법을 우주정거장이라는 낯선 장소에 대입하니 묘한 조화가 이뤄졌다. 무엇보다 저음 나레이션을 사용해 기어코 하나라도 더 가르쳐보겠다는 식의 느끼한 태도가 없어서 마음에 든다. 얼마전 김홍준 교수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이클 무어의 데뷔작 '로저와 나'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새삼 다큐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성일은 일반 개개인의 홈무비에 편집의 개념이 일상화되는 순간 영화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저 낯선 공간에서 날아온 이 다큐영상을 보다보니 문득 미래에 생겨날 수많은 사적 영화들은 다큐의 영역과 아주 친밀한 존재가 될 듯한 느낌이 든다.
며칠 전 한강다리를 건넌 적이 있다. 평소라면 거닐 일이 없는 서강대교 위였다. 그 곳에서 내려다 본 한강의 모습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밤섬의 존재였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 다리 위를 걸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20대 초반 언제쯤 별다른 목적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 건넜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이 곳을 언젠가 걸어본 경험이 있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 당시 이해준 감독이 했던 상상을 못했던 걸까. 한강다리-투신-밤섬-표류. 너무도 명백하고도 매혹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현장에서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어릴적에는 항상 찰리 카우프만 식의 창조를 창의라 맹신했던 것 같지만 조금씩 다양한 환경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필요를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과 저마다의 가치에 수차례 놀람을 반복하다 보니 존재하는 것, 당연한 것 속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스토리텔링의 재능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최근 읽어 본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셸 퓌에슈가 쓴 '설명하다'였다. 설명이라는 동작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소통과정에서 설명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특정한 동사 내지 형용사 하나로 세상살이의 가치를 갈무리하는 모습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무작정 걷고 보고 들으며 성장해 온 내 20대를 모두 끝마치고 성인기의 한 단락을 전환하려는 현 시점에서 나만의 동작을 떠올려본다면 아마도 '경험하다'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인 것 같다. 대상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자극하는 모든 동기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일텐데 나는 지난 삶의 경험들을 차곡히 몸 속에 쌓아온 느낌을 서강대교 위에서 밤섬을 내려다보며 어느정도 정리하게된 것 같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지' 에서 '어떻게 이 생각을 못할 수가 있었지'로 옮겨간 것이 20대의 모든 경험이 내게 건내준 소박한 의문문인 것 같다. 비단 이것은 창작과 창의에 관한 문제 뿐만이 아니다. 발단은 그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사회적, 일상적 분야에 있어서 나라는 사람이 신경쓰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점차 늘어가기만 하는 것을 느끼고 있기에 단순히 어느 한가지 요소에 매몰된 독자적 사고에서 벗어나 주변의 인과관계와 예외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한, 보다 성숙한 시각이 몸에 베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저만치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홀로 빛나는 무엇을 막연히 동경하기 보단 나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의 서로 다른 경험에 기반한 그들 각자의 이야기에 더욱 귀기울이게 되는 30대의 시작이다.
로저 에버트 사후 개최된 Eberfest에서 틸다 스윈튼은 먼저 떠나간 로저를 위해 1000여명의 관객들과 함께 배리 화이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축제>와 함께 한묶음으로 기록된 사적인 기억이다. 아래의 영상은 2009년 Pedro Pires가 연출한 단편 <Danse macabre> 이다. 이 영상이 <화장>과 묶일지는 미지수지만 최근 몇 달간 겪은 것 중 '최후'에 관한 이미지로 기록될 두 편이기에 하나의 묶음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화장>에는 임권택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초현실적 환영이 등장한다. 그 덕분에 지극히 정직한 임권택의 화면과 이 실험적인 단편이 내 기억에서 같이 남겨지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