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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nema and Video art
 






1. 이야기를 시작하며...


조사를 진행해 나갈수록 애초의 발상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시물로서의 영상예술, 앞으로 주요하게 다루게 될 비디오(미디어)아트에 대한 피상적인 인상과 몇 번의 우연한 만남만만을 상기하며 지레짐작식의 나태함으로 일관해온 내 스스로가 초래한 실수였다. 영상예술의 범위 내에 소속된 개별 요소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위치와 상호간 영향력의 관계에서 예술이란 공식석상의 끄트머리에 몸을 담그고 있는 (처음으로 숫자를 명받으며 그 후 나타난 8,9의 예술과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는 7번째 늦둥이로서의) 영화의 존재를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초의 계획은 정지된 이미지에 생명을 부여해준 영화가,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아방가르드적 전복사고의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통해 혁명적 예술사고의 유연성을 가능케 해준 영화가,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통한 영상의 개인적 소유와의 교점에서 새로운 세대의 도전정신과 만나 TV란 (부정적 늬앙스로서의) 매스 미디어를 향해 펼쳐온 극복과정의 결과물로서 걸어온 행보를 살펴보려는 것이었으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였으며 비디오(미디어)아트를 이해하는 단계에서 별 도움이 안 되는 초점 맞추기였다. (계속된 자료 조사를 통해 느낀 바지만)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이전 예술에 비해 보다 복합적인 결합물의 형태를 띄우고 있었다. 이 둘은 모든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폭발하는 지점에서 분명한 시작점을 획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물론이며, 도전적인 영화작가들의 영감과 정신을 저변에 깔고 현대미술,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플럭서스 운동 등의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유발된 영상의 용광로인 비디오(미디어)아트를 단순히 영화의 영향력에 얽매어 언급하는 건 본질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는 편협한 근시안적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 초 제출한 계획서에는 멜리에스로부터 촉발된 영상의 무한한 가능성이 숱한 기성극복의 사상과 도전적인 표현기법의 흐름과 만나 60년대 비디오 아트의 탄생까지, 그에 미친 영향력과 이 후 실험/언더그라운드 무비 등의 인상적 순간들을 회고하며 비디오 아트(미디어 아트)의 영상적 실험정신에 비견할만한 현대 영화작가들의 오늘 까지를 알아보고자 했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영화와 영상예술이란 구색을 위해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몇몇 비디오(미디어)아트 작품을 덧붙이고자 했었다.


목차는 완전히 뒤집어 졌다. 물론 여전히 이곳의 타이틀은 <영화와 영상예술>이다. 하나의 중심챕터를 이루던 영화 속의 실험적 표현은,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영화를 활용하는 이유 그리고 내 스스로 본 주제를 선정한 ‘왜 영화일까?’의 서문에서 그 발자국만 남겨놓고 과감히 삭제하고자 한다. 애초의 논지는 현대 미술관 곳곳에 베여있는 발전적인 실험정신과 그 반복의 과정에서 피어날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가능성의 교훈을 점점 망각해가고 있는 현대의 영화적 흐름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자 하였다. 과거에는 분명히 예술적 가치발산의 장이기도 했던 영화란 영역이 어쩜 이리도 다양성 소실에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상업성 핑계에만 매달려있는지, 그리고 관객들은 어찌 충돌과 실험의 역사가 현재 우리가 누리는 보편성의 씨앗임을 망각한 채,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무감각히 스스로의 활동반경을 좁혀나가는지 스스로 묻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가 예술내지 문화를 대면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디오(미디어) 아트에 대한 접근과정에서 보다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아트 작업과 영화 본연의 구조에 대한 탐색을 위해 공간성과 상호작용을 몸소 경험하는 실험적인 비디오 설치 작품들이었다. 영화의 장면을 차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은 ‘피쳐링 시네마(작년에 국내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사용한 명칭이나 외국에서도 이와 같이 명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사와 시간경과란 영화적 특성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창의적으로 충돌시키면서 지독한 익숙함을 이용해 기시감의 역발상을 유발하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고정적이며 한정적인 영화 관람의 범위가 암실을 벗어나 개개인의 소유에 까지 미치는 과정과 함께 비디오(미디어)아트의 시야확대가 이뤄지며 점차 그 수가 증가해 오고 있다. 단순히 편집을 이용해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에서부터 사운드와 공간을 활용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과정, 때때론 오마주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직접 세트를 짓고 새롭게 촬영을 하는 방식에 이르기 까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당 초 2,3 작품의 간략한 소개로 마치려했던 이 분야가 새로운 핵심 주제로서 부상하게 된 것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 창작물속에 내재된 잠재력에 대한 관심과 흥미 때문이다. 잠재력이란 표현은 본 분야가 내재한 힘과 영향력에 대한 기대이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이에 대한 관심 내지 시도가 여타 다른 장르에 비해 폭이 넓지 않으며, 더욱이나 현 한국예술계에선 그 시도가 미미한 수준이기에 끌어온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도록 하고, 아무런 존재이유 없이 자질구레 길기만 한 지금까지의 주제변경의 변은 앞으로 진행될 구성에 대한 보고를 끝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왜 영화인가’ 라는 선언이 아니라 ‘왜 영화일까?’ 라는 자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어찌하여 숱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영역에서도 이다지도 자그마한 공간에 깃발을 꽂았는지, 그리고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가들은 어찌하여 창작적인 촬영물이 아닌 참조의 방식으로서 남의 이야기를 빌어 작품을 구성했을지, 나름의 생각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중반부는 영화를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들에겐 족보랄 것이 없어 깔끔히 구분 지을 울타리가 마땅치 않았다. 다소 자의적이고 산발적으로 이야기가 진행 될 것 같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된 부분과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스스로 정리해보며 앞으로 다가올 ‘파운드 푸티지’ 기반 혹은 영화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업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왜 영화일까?


서로 간 봉합의 흔적마저 서서히 옅어져가는 현 예술계의 동향을 생각해본다. 지금 나의 시각에서는 양자 간 선후 관계나 영향력에 대한 이론적 서술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이거니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부분이다. 고집스레 영화가 내려준 영상으로서의 단초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속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본 주제에 해당되는 비디오(미디어)아트 작품에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존재 가치를 통해 이유와 효과와 교훈을 깨닫고자 한다. 순전히 아마추어적인 입장에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나는 영화가 좋다. 그러하기에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이야기하면서도 애써 영화를 끌어당기는 것 이다. 통상적 흐름을 파괴하며 반서사의 기지아래 극단의 위치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영화 기반 비디오(미디어)아트 작업은 영화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불투명한 거울과 같다고 생각한다. 흐리고 뭉그러진 모습으로 자신을 비춰주지만 그 속의 본질은 분명 자기임을 인지하게 하기에, 스스로를 자세히 보려 애쓰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면 일상에선 깨닫지 못한 새로운 교훈을 자각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고 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영화의 이름앞에 불투명한 거울이 되어 발전적 방향으로 교훈을 제시한다고 보진 않는다. 단순히 영화 이미지를 차용할 뿐 온전히 비디오(미디어)아트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미적 심상을 고취시키는 선에서 끝나버리는 작품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The maybe...


지금부터 영화가 선택된 이유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의 이미지는 1995년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 전시됐던 코넬리아 파커의 <어쩌면>이란 작품을 찍은 사진이다. 유리관 안에서 한 여인이 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날 저 상태로 8시간을 잤다.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영화를 선택할 이유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튀어 오른 것은 이 이미지였다. 이 작품이 내 뇌리에 정확히 박혀있을 수 있던 이유는 평온히 잠을 청하고 있는 저 여인의 이름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틸다 스윈튼. 하지만 단순히 그녀가 유명한 배우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면>이라는 작품에 대한 강력한 각인효과가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영화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진한 인상을 심어주는 측면은 존재하겠지만 이는 단순 해프닝으로서의 구경거리를 넘어 그 저변에 깔린, 영화라는 존재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영향에 대한 견고함을 상기시켜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가 복잡히 얽힌 집중력. 작품 속에 영화가 개입하는 순간 관람객의 사고는 단순히 작가의 메시지 내에 한정되지 않게 된다. 우리와 일생을 함께하며 모든 감각과 숱한 감정의 기억을 공유해온 영화란 존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직면한 대상에 대한 경험적 환기를 통해 개인적인 다양한 사고와 작가의 주제 표현을 뒤섞어 작품의 감동을 획득한다. 이러한 작용은 비단 영화 뿐 아니라 대부분의 매체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2002년 오마 페스트가 만든 <CNN Concatenated>를 떠올려보자. CNN의 아나운서와 캐스터들의 한 음절씩을 차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 이 작품에서 설파하는 표면적 단어의 나열은 굉장한 영향력을 지닌다. 이는 대중의 수용방식에 대한 비판인 동시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상기 시켜준다.


CNN Concatenated 


이러한 차용은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들어나게 해주는 친대중적 몰입도를 획득한다. 우리는 영화를 기반으로 완성된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창작물을 대면하며 각자의 기억과 감각을 안고 완성된 이야기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 이다. 가장 쉽게 표현해 자신이 감상한 영화가 미술관 한켠에서 영사가 되고 있다. 그는 편견과 기대를 품고 호기심어린 발걸음을 떼게 될 것 이다. 우리의 삶 전반에 세포처럼 내제화 되어있는 영화라는 이름의 기억이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들의 실험적인 표현과 주제전달의 좋은 미끼가 되어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대척점의 매력 또한 발생된다. 확신과 기억을 안고 다가선 관객에게 작가들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파괴의 미학으로서 영화에게 가학을 행한다. 관객의 망막에 닿는 이미지는 이미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에 혼란이 초래된다. 파괴의 미학인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품들이 선사하는 세계는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관을 초토화 시킨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동시적으로 활용하여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친대중적 몰입도와 함께 동시발생적으로 이는 양가적 감정으로서의 역기시감을 한데 섞어 환각적 배경을 구축하며 친숙한 초대와 붕괴적 선언을 이용해 강력한 파급력을 발생 시킨다.


The era of cinema


다음으론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옆에 제시된 작품은 21 미터 길이의 설치 비디오로 1890년대부터(정확히 1896년의 멜리에스의 영화) 현재까지의 작품을 시대사 별로 차례차례 이어붙이며 순차적으로 피사체를 움직인 <The era of cinema>이다. 중심인물이 시대를 통해 좌에서 우로 움직일 때 마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그를 좇는다. 이러한 행동적 유도는 영상으로서의 영화가 지닌 역사성과 대표성 그리고 시적영역에 있어서 영화가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위치를 말해준다. 각자의 영상 아래는 년도가 표기된다. 영화는 시적 구분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친숙히 설명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영상과 이미지를 보며 시간을 상기하고 구분한다. 매해 영화는 시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을 탄생시킨다. 단순한 스타의 표상이 됐건 작품적 경탄이 됐건, 영화는 우리의 옆에서 대표적 영상매체로서의 기억을 공유한다.


기록되어 영사되고 투영되는 방식은 어떻게든 시간성을 가지게 된다. 비디오(미디어)아트와 영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시간성’이란 숙명을 지닌다. 이러한 공통특성은 본 장르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 ‘시간’이란 주제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영화를 참조하는 이유는 시간을 품고 있는 방식에 있어 상호간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적 제약을 가지고 있음에도 영화는 서사라는 틀을 배경삼아 고유의 영역 내지 특징으로서 이를 소유하며 직선적으로 시간을 표현한다. 이에 비해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의식적으로 서사를 회피하는 과정에서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며 순환적인 시간을 선택하며 동시성과 즉시성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닮은 듯 다른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의 대 시간 개념은 비디오(미디어)아트로 하여금 판이한 시간적 배경을 옮겨와 영화를 새롭게 정의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변환의 흥미를 느끼게끔 해주는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작품의 대부분은 시간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직선적 시간성과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파편적이고 순환적인 즉시적 시간성을 동시에 활용하며, 그 어느 소재보다 시간의 개념을 폭 넓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기에 많은 작가들이 영화를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마디로 영화를 활용한 비디오 (미디어)아트는 시간개념 활용에 유리한 뛰어난 시적 활용처라는 뜻이다.



Sync 연작


이미지는 언어에 종속되기에 영화와 비디오(미디어)아트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영화는 언어를 탐하고 통상의 비디오(미디어)아트는 분명한 서사를 의식적으로 피하며 발생한 차이이다. 하지만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영상영역에서 영화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디오(미디어)아트는 영화 자체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란성 쌍둥이 같이 비슷한 유전자와 제각각의 외모를 지녔다. 언어를 탐하고 서사를 회피한다는 건 두 개의 영역이 차별성을 지니는 동시에 언어와 이야기란 경계선을 중심으로 서로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디오(미디어)아트는 결국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정된 서사의 파괴와 이미지 반복, 시간적 왜곡, 거울 이미지 등을 통해 표현된다.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는 숙명적 관계로서, 그 존재 자체가 서로에 대한 반사이며 반영이기에 작가들은 영화를 차용하며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분신에게 영상예술로서의 새로운 고민과 표현의 확장 단초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24 hr Psycho (iphoto re edit)


마지막으론 현 시점에서 영화의 이미지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유된 자원임을 강조하고 싶다. 창작에 있어 소통의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하고 절실해진 현 세대에서 창작품을 만드는 일은 단지 기성 작가의 고리타분한 업무가 아니다. 손쉬운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자. 더글라스 고든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의 초당 프레임 수를 조정해 아주 느린 속도로 영화를 재생하며 무려 24시간 동안 영화가 진행되도록 만든다. <24시간 싸이코>는 시간경험의 독특한 예를 보여주며 많은 관람객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 후 유튜브를 통해 많은 오마주격의 영상들이 올라오게 됐다. 그중에는 <24초 싸이코>와같이 시간개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데스크탑의 슬라이드쇼를 사용해 상반된 느낌의 음악과 자신만의 영상효과를 가미하며 전혀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 냈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현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소통과 참여의 장에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작업이 내제하고 있는 공유된 자원의 특성이 잘 어울림을 알려주는 경우라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영화란 매체 자체가 가진 친대중적 몰입도와 비디오 아트 특유의 파괴적 형식이 결합해 관람객의 기억과 감각을 쉽게 끌어당긴 후 전혀 새로운 지점으로 유인해 강렬한 주제의식을 전달 해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 상반된 시간적 속성의 경계를 오가며 여타의 비디오(미디어)아트 소재보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간에 대한 사고를 진지하고 효율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본 작업은 영화매체 그 자체에 대한 은유적인 집중으로서 반 영화적인 해체 작업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는 자기 지시성 내지 자기 반영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공유된 열린 자원으로서의 영화 이미지는 수많은 상호작용과 파급력을 이끌어 낼 수 있기에, 개인에게 기술적 도구가 충분히 지원 가능한 현 시대의 흐름에서 즐겁고 흥미로운 공유의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의미의 예술적 확장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위의 4가지 주요 사유뿐 아니라 일상에 박힌 숱한 조각들을 임의로 골라 이쁘게 찢고 오려붙여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본 작업에 어찌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은 재밌는 일이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이다. 본격적으로 작가들을 소개하기 전에 본 작업의 선조격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에 대한 간략한 이해를 우선하고 싶다.



looking for alfred


3. 파운드 푸티지 필름


영상 창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과 궁리를 연속하고 있는 이 땅의 작가들의 사고 한켠에는 분명히 선대의 영화작가들이 호기심의 이름으로서 힘껏 끌어당겨온 경이로운 표현의 발견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파운드 푸티지’를 기반으로 영화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려는 작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빛과 암실, 그리고 작가와 관객의 관계를 통해 빛의 예술이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심상은 어떤 것일지 골똘히 몸소 실천해보는 여타의 작가들의 활동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탄생한 지도 벌써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구조적으로나 시대상으로나 영화시장의 영역 내에서 예전과 같은 도전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예외적 대우를 받는 극소수의 영화작가가 아니라면 영상언어로서 참신한 운을 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직관적인 투명성을 내포한 표현적 측면의 예술로서 영화를 반가이 맞아주지 않는 시대이지만 그간 영화가 남겨온 족적을 매만지며 영상예술로서의 영화를 고민하고 계승하고자하는 작가들이 근접 분야에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곳에선 본격적으로 비디오(미디어)아트 작가를 소개하기에 앞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예술 창작물들의 실질적인 선례를 짚고 넘어가보고자 한다. 이는 특정 장르를 파생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지점에서 묵묵히 흘러온 여러 영향력들이 어느 우연한 시점에서 만나 한데 뭉쳐져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게 되는 오딧세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 장르의 직접적인 선조격인, 바로 윗세대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에 대한 이야기다.


1895년 영화는 열차와 함께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후 멜리에스는 카메라의 일시적인 고장을 계기로 수많은 영화적 표현 기법의 힌트를 얻게 된다. 초창기 작가들은 표현의 다양화를 위해 몽타주, 서사, 장치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진행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 중에서도 본 장에서는 영화 내 시간과 공간을 구축하고 합성하는 몽타주 기법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부분을 조립한다는 의미의 몽타주는 필름의 단편을 조립해 영화적인 시공간을 창조하여 작품 내 현실을 구축하는 방식인데, 1920년대 소비에트에서 활발히 이론화된 본 기법이야 말로 영화의 조작과 변형을 기반으로 하는 ‘파운드 푸티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숙지해야할 개념이다. 파괴의 미학이라는 ‘파운드 푸티지’ 영상작업은 필름과 필름을 이어 서사와 공간의 구축하는 몽타주와 비교해 그 의도성만 다를 뿐 기본적 존재원리는 상당히 유사하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 은 영화가 탄생한 후 고작 7년 만에 첫 명함을 내밀게 된다. 지난 수업시간에 감상했던 에드윈 S. 포터의 1902년 작 <어느 미국인 소방수의 생애>는 최초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에디슨의 회사에서 일하던 포터는 어느 날 영화 저장소에서 자료를 찾다 소방서에서 찍은 다양한 촬영물을 본 후 영감을 얻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이 후 소련에서는 혁명 직 후 에스퍼 I. 슈브가 헌 필름 (Cast off film)을 이용해 1927년에 <레마노프왕조의 몰락>과 <위대한 길> 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 작품들은 초기의 대표적인 파운드 푸티지 필름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흐름은 이어진다. 초현실주의 미술가 조셉 코넬은 파운드로 달아 판매하는 ‘헌’ 영화를 수집하여 20여개의 실험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대표작으로는 1936년에 제작된 <로즈 호바트>가 있는데 이는 로즈 호바트라는 여배우가 1931년작인 <보르네오의 동쪽>에서 출연한 장면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코넬은 그녀가 나오지 않는 장면과 액션장면에 삭제 및 재편집 등을 거쳤으며, 여기에 과학영화 등을 삽입하며 이야기의 연속성을 해체하였다. 19분 짜리 헐리웃 산 실험영화는 16프레임이라는 느린 속도와 다크 블루 필터의 사용, 삼바음악의 차용 등으로 전에 없던 독특한 의미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새 기준을 제시하게 된다. 1958년 브루스 코너가 연출한 <영화>라는 작품에서는 뉴스 릴과 과학영화, 포르노, 릴 필름 등을 앗상블라주 기법을 활용해 통합하며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한 차원 발전시키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켄 제이콥스의 1985년작 <퍼펙트 필름>과 레즐리 손튼의 1997년작 <올드 월디> 등의 대표작들이 주목을 끌으며 현대까지 그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는 스테파니 바버와 같은 작가가 가장 큰 주목을 끌고 있다.



Rose hobart (re edit)


전혜숙 교수는 대부분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들이 어떤 파운드 푸티지를 근거로 했는가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파운드 푸티지 필름’ 방식자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영화>와 <로즈 호바트>를 예로 들며 이들 작품은 자신 스스로가 파운드 푸티지로 구성되어있음을 애써 강조하며 영화의 구조 자체를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영 화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역설적인 작업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운드 푸티지 필름‘ 특유의 혼란스럽고 낯선 지각적 교란은 비디오(미디어)아트 장르의 특성과 닮아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작업방식은 훗날 많은 비디오(미디어) 아티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작을 통해 어떤 서사적 변화가 발생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조작되었는가에 집중하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작가들의 작업방식은 그대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예술 창작 작가들에게도 이어졌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매체인 영화를 해체하며 그가 지닌 조작의 힘과 리얼리티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4. 영화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가들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현대미술 관련 서적과 film, movie, cinema, found footage, video art, media art 등의 키워드를 조합해 닿을 수 있는 모든 웹페이지를 뒤져본 결과 총 21인의 작가가 만든 38편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영화 이미지를 토대로 새로운 재해석을 가한 작품이 30편이였고, 특정한 씬을 리메이크 하거나 영화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 작품은 8편이였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마르코 브람빌라 - Civilization, Evolution , Sync, Sync watch, Sync fight, Ritual compositon No.1, Flash back

피에르 위그 - Dubbing, Remake, The third memory, L'ellipse

더글라스 고든 - Through a looking glass, Deja vu, 24hr psycho

칸디스 브라이츠 - Soliloquy trilogy

크리스찬 마클레이 - Video quartet, Watch, Telephone

제니퍼 & 케빈 맥코이 - Horror chase, The kiss, Traffic series, Learning from las vegas

마이클 호아퀸 그레이 - The blink

요한 그리몽프로 - Looking for hitchcock, Double take

브루스 코너 - Cosmic ray

크리스토프 지라르데 & 마티아스 뮐러 - kristall

임민욱 - 희생

노재운 - God4saken

트레이시 모펫 - Mother

올리버 피에치 - The shape of things

Cinezoique - The era of cinema

안소니 맥콜 - Line describing a corn

구스타프 도이치 - a girl and a girl

벤 러셀 - The black and the white gods

자넷 카디프 & 조지 브루스 밀러 - The paradise institute

아이작 줄리언 - Ten thousand waves


직접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조사할 수 없는 주제이기에 위의 목록에 올라온 작품 중 12편 가량은 간단한 설명과 함께 몇몇 이미지만을 보는 수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26편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 올려놓은 영상을 보거나 관람객들이 어설프게 촬영한 짧은 기록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가 의도한 공간속으론 참여하지 못한 채 방한구석에서 상상을 가미해 써내려간 반쪽짜리 경험이지만 그간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작품들의 구성을 최대한 자세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추후삽입 – 투명성이란 표현을 좋아한다. 철저한 비전문가로서 수잔 손택이 강력히 주장해온 예술 감상에 있어서의 직관적 투명성을 다년간 믿어오고 실천해온 사람으로서 각각의 작품에서 예리하게 의미와 장점을 추출해 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엉터리로 끼워맞춘 부분도 있으며 비평가의 생각에 기댄 부분 상당수 있다. 4장의 보고는 작품의 작동원리와 대략적인 지향점 정도에 초점을 맞춰 주시길 바란다.]


이번 주제선정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선사한 작가 마르코 브람빌라의 작품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전 미디어 아티스트 7인이 모여 만든 실험영화 <제한해제>를 국내의 한 영화제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7편의 작품 속에서도 유난히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본 작가가 연출한 1,2분 분량의 아주 짧은 단편 <Sync> 였다. 이는 남녀가 만나 성행위를 하는 순간을 영화와 각종 영상물에서 추출한 후 이를 이미지 단위로 뽑아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어지도록 배열하며 숨 쉴 틈 없는 드럼 비트 아래에 깔아놓은 작품이었다. 


마르코 브람빌라는 <Sync>에 대응하는 반응물로 <Sync fight> 와 <Sync watch> 등의 작품을 만드는데 전자는 각종 영화 속 폭력적인 싸움 장면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각각 별도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토록 하였으며, 후자는 성행위와 폭력적인 싸움 장면에 맞춰 극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며 감동하고 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시각이 겨우 쫓을 만한 빠른 조각들의 연결로서 보여주고 있다.


Sync

Sync watch

전시회에서는 3개의 스크린을 설치하여 정신없이 쏟아지는 성과 폭력의 이미지들을 영화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관람하게 만들고 있다. 짧은 순간을 구성하기위해 수백편의 이미지들을 범람시키는 본 작품은 영상 속 움직임의 구성 원리를 새삼 느끼게끔 하는 동시 우스꽝스러운 관계형성을 통해 매체 자체에 대한 비판을 동반한다.



Flashback


Ritual composition No.1


Cvilization Evolution


Evolution



브람빌라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잘게 쪼개진 조각들이 이루는 큰 그림의 활력 넘치는 전달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Flash back>과 <RItual composition NO.1>의 경우 <Sync> 연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화면 속에 유사 속성의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배열하며 활동적인 이미지의 분절되고 연결되는 효과를 통해 각각의 주제를 잘 이야기 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브람빌라는 거대한 세계를 구성해 상징성을 지닌 이미지의 차용을 통해 주제를 전하기도 한다. <Civilization> 과 <Evolution>의 경우가 그러하다. 본 작품들은 종과 횡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미지를 연속하며 거대한 세계관을 이룬다. 문명과 진화의 타이틀에 적합한 수백편의 영화 속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하나의 웅장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지금껏 감상한 모든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본 작품들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지니게 된 상식과 기억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거대한 인공세계를 구축한다. 비디오(미디어) 아트 장르 뿐 아니라 영화와 뮤직비디오 장르에서도 활동하는 작가이며 아무래도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는 작가이다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영상 싸이트에 공유되고 있어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24hr Psycho


다음으론 시간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 더글라스 고든에 대한 소개이다. 앞서 간략히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대표작인 <24hr psycho>는 극한의 슬로우 모션 기법을 사용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유례없는 시간적 경험을 경험토록 유도한다. 영화 <싸이코>의 유명한 욕실 살해 시퀀스는 본 작품에서 1시간 가량 지속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대면하면서 끊임없 이 기억과 또 다른 사고와 마주한다. 이는 비디오(미디어) 아트 특유의 파괴적인 형식 실험인 동시에 현대적 의미의 지나친 쾌락의주적 편집에 대한 반발이며, 영화적 경험을 매개로 관람객에게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묻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더글라스 고든은 <Deja vu> 를 통해 헐리웃 스릴러 영화 <D.O.A>를 세 개의 스크린에 재생시키며 각각 초당 25,24,23 프레임의 설정으로서 살짝 씩 어긋나게 배치한다. 연속된 세 개의 이미지는 소량의 시간차로 조금씩의 차이를 보이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환상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Through a looking glass


뿐만 아니라 <Through a looking glass> 라는 작품을 통해선 더욱 적극적으로 관람객들을 기억의 장소로 초대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한 장면인, 트래비스가 거울을 보며 읊는 "You talkin' to me?" 라는 대사를 듀얼 스크린을 이용해 각각 반대쪽 스크린에 재생 시킨다. 주인공이 내뱉는 이야기를 동일한 스크린에 펼쳐내며 관객을 그 속으로 밀어 넣는다. <24hr psycho>가 영화를 통해 시간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제시해본 실험이었다면 <Deja vu> 와 <Through a looking glass>는 영화적 경험을 기반으로 관람객의 기억과 감각을 향해 던지는 환상적인 체험이라 생각한다. 더글라스 고든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가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이다.


 

Taxi driver scene


피에르 위그는 보다 실험적인 방법으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를 엮어 낸다. 그는 <Dubbing>, <Remake>, <The third memory>, <L'ELLIPSE> 등의 작품을 통해 영화적 경험에 대한 실험을 수행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The third memory>를 통해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소유한 기억에 대한 궁금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작품은 영화와 현실을 왕복하며 우리에게 제시된 기억을 정리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1972년 존 요토비치는 애인의 성전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브루클린에서 은행강도를 감행한 다. 이후 그 이야기는 3년의 시간이 흘러 시드니 루멧 감독에 의해 <뜨거운 오후>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된다. 피에르 위그는 실화와 영화의 1번째, 2번째 기억을 지나 출 소를 한 당시의 강도를 직접 데려와 같은 장소에서 3번째 기억을 이야기 하도록 한다. 2 개의 스크린을 이용해 좌측에는 알파치노가 분한 2번째 기억이 우측에는 실제 범인이 진술하는 3번째 기억이 동일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영화란 매체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진실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인 동시에 인간의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The third memory


우리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음을 듣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상당부분이 알 파치노의 애드립으로 촬영되었으며, 14시간의 서사는 124분으로 압축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많은 부분이 씻겨간 3번째 기억에 완전히 의지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며 무엇이 진실이며, 우리가 매체를 통해 진실을 전달받는 과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는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스꽝 스럽다. 결국 존 요토비치는 영화의 저작권을 통해 애인의 수술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외의 작품에서도 위그는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의 상이한 차원들을 구별 짓곤 한다.


<Dubbing>의 경우는 영화를 더빙하는 15인의 배우와 그들이 읊는 스크립트만을 보여주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영화란 경험이 단지 보는 행위만이 아님을 인지시켜주며, 97년에 제작한 <아틀란티크>의 경우는 하나의 영화를 서로 다른 캐스팅을 통해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작업은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작업은 아니지만, 영화의 본질과 다양한 형태에 대한 질문으로서 그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Remake>는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이창>을 아마추어 배우를 대상으로 재연시키며 영화와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동시에 상영하는 작품이다. 이는 현실의 인물을 스크린의 영화인물로 재현한 과정을 다시 재도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벽을 넘나들도록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L'ELLIPSE> 는 생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은 영화 속에서 무심코 흘러간 순간과 순간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작업이다. 빔 벤더스의 77년작 <미국인 친구>에서 배우 부르노 간즈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 생략되어 버린 갭을 20년이 흘러 동일한 배우를 불러와 같은 장소에서 기억을 회기 시킨다. 그의 작업은 이 처럼 영화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매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 대한 자기 반영적 사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위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히치콕의 영화를 예로 들며 자신이 그의 영화를 선택한 것은 수용적 차원의 문제라 말하였다. 즉 누구나 알고 있기에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 매개적 성격. 그의 인터뷰를 통해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가들의 소재 선정에 대한 나의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Video quartet 


다음으론 가장 방대한 분량의 편집 작업을 통해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작가 크리스찬 마클레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파운드 푸티지’ 작업은 어마어마한 양을 다루고 있다. <텔레폰> <비디오 4중주> <시계>등의 작품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영화의 이미지를 편집해 영상적 흐름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그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소리이다. 그의 작업의 주안점은 ‘과연 보는 것을 들을 수 없는 것인가?’ 이다. 작가는 헐리웃의 영화를 기반으로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소재 선정은 역시 관람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3작품 모두 소리를 중심에 두고 각각의 화면을 연결 짓고 있다. 



Telephones


일단 <텔레폰>의 경우는 음성을 매체로 한 소통도구인 전 화기를 이용해 수많은 배우들이 서로 전화를 받고 끊는 행위를 반복하게 한다. ‘파운드 푸티지’ 작업에 있어 초기작에 해당하는 본 작품은 상호작용과 음성의 연결이라는 측면을 활용해 비교적 단순하게 이뤄진 작업이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작품은 보다 풍성해졌고 그 구성도 상당한 수준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디오 4중주>의 경우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와 영상의 실험인데, 각각 3m, 총 12m인 4개의 스크린을 이용해 17분 길이의 음악을 완성하였다. 각각의 영화 이미지를 차용해 소리를 중첩시키고 어긋나가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전반적인 흐름의 맥이 존재하고 있으며 불협화음과 우연적인 소리의 완성에 있어 기묘한 하모니를 완성시킨다. 특히 700여편의 작품을 이어붙인 실험이기에 그 압도감이 상당하다.



The clock


한발 더 나아가 마클레이는 4000여편 이상의 영화를 편집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시계>라는 작품으로서, 작품의 총 길이는 24시간이다. 헐리웃의 영화의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만을 뽑아 째깍 거리는 시계의 음성적 흐름에 맞춰 이미지를 따라가게 만든다. 미술관이 문을 닫은 후에도 마클레이의 시계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어느 미술관에서는 새벽까지 전시를 연속한 적이 있었는데 본 작품의 많은 시간대 중에서도 특히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의 편집은 굉장한 시각적 쾌락을 선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마클레이는 소리라는 중심 축을 따라 이미지를 겹겹이 쌓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그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가며 단순히 응시만으로 일관하던 관람객들을 점차 자신의 세계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은 맥락없이 단절된 그의 영상을 무감각하게 만나게 되더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실체 앞에서 감탄과 경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위에 소개한 4인은 현재 ‘파운드 푸티지’ 기반 영상작업에 있어 가장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작가들이다. 앞으로 소개할 작가들은 대부분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하며 산발적으로 이와 같은 형식을 차용하는 이들이다. 켄다이스 브리츠의 <Soliloquy trilogy>는 헐리웃의 유명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잭 니콜슨, 샤론 스톤이 각각 <더티 해리> <이스트윅의 마녀들> <원초적 본능>에 나왔던 장면을 토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을 모두 날려버린 작업이다. 브리츠는 이 작업을 통해서 그들의 독백을 이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한다. 작가는 극단의 방식을 택하는데 주인공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만약 화면에 타인의 얼굴이 나오는 경우에는 아예 암전시키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철저한 독백의 연속에서 편집을 통한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을 시도하고 있다. 샤론 스톤과 이스트우드의 작품은 7분여이고 잭 니콜슨의 작품은 14분에 이른다. 이러한 과감한 생략을 통해 새로움을 뽑아내는 기법은 우리나라의 작가도 시도한 적이 있다. 임민욱 작가의 <희생>이 이와 비슷하게 극단적인 생략을 감행한 경우이다. 2시간이 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8분으로 줄인 작업이다. 작가 임의로 선정한 핵심을 중심으로 과도한 점프컷과 생략을 통해 본래의 서사와 주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작가는 예술과 인간 근원에 대한 사유와 질문에 연관된 대사들을 중심으로 긴 영화를 8분으로 만든다. 본래의 형태를 잘게 잘라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이러한 방식은 원작을 완전히 탈색하여 불안함만을 남기고 있다. 솔직히 이와 같은 작업이 제공하는 전달방식에 대한 의문이 큰 편이다. 단순히 생략만으로 이뤄진 작업이 원작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예술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크게 지닐지, 누군가에게는 의문으로 다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oliloquy - jack


 

Soliloquy - clint


Soliloquy - sharon


이어 제니퍼 & 케빈 맥코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관계를 실험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인 <호러 체이스>의 경우 샘 레이미 감독의 영화 <이블 데드 2>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영화 속 주인공이 실내를 이동하며 쫓기는 장면에서 착안해 자신들이 직접 브루클린에 세트를 지은 후 체이스 씬을 촬영한 후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절대 겹치지 않는 동선으로 영상이 계속적으로 반복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키스>에서는 <보디 히트>의 유명한 키스씬을 두 명의 배우를 섭외해 재연하게 한 후 <호러 체이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컴퓨터를 통해 불규칙하게 배열하여 불안한 영상을 제공한다. 이 두 작품에서 선보여지는 비선형적이고 분절적인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제니퍼 & 케빈 맥코이는 고다르 영화의 사운드를 배경으로 조각품을 이용해 새로운 씬을 구축한다든지 <스타트렉>이나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등의 작품을 이용해 단순한 ‘파운드 푸티지’ 차용을 넘어서 적극적인 오마주/모방의 방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Horror chase


The kiss


마이클 호아퀸 그레이의 <The blink>의 경우도 앞서 언급한 제니퍼 & 케빈 맥코이의 사례처럼 컴퓨터의 임의적인 편집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를 새롭게 배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레이는 그 기준점을 음악으로 놓고 있다. <Leaving on a jet plane>이라는 평화로운 팝송의 선율에 맞춰 레니 리펜스탈의 <올림피아> 속 장면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배열한다. 이는 앞서 소개한 <키스>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인데 음악의 적극적인 활용과 관람방식의 차이로 인해 더욱 신비한 최면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작품은 한 번에 한명의 관객만이 관람이 가능하다. 서로 다른 비율로 깜빡이는 두 개의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고 음악에 맞춰 양쪽 눈으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이다.


The blink


다음으론 동일한 주제로 한데 묶인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독특한 효과를 발하는 작품들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크리스토프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의 작품인 <크리스 탈> 과 올리버 피에치의 <꿈의 형태>가 그 것이다. <크리스탈>은 단순히 고전 영화 속 거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반복하는 단순한 태를 지녔지만 거울의 사전적 정의를 영상 으로 전이한 듯 한 영상의 집중도로 06년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최우수 단편 상을 받았다고 한다. 수백편의 고전에서 추출한 거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주인공을 해체하고 파편화 시키며 자아도취와 분열증, 사랑과 파괴등의 과정을 거쳐 인간의 수많은 감정선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한 구조 속에서 폭 넓은 감정을 표현핸는 이 14분 짜리 영상물은 이번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세계 곳곳의 ‘파운드 푸티지’ 기반 전시회에서 항상 목록에 올라있는 작품이었다. 올리버 피에치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꿈과 죽음, 자살과 마약등의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편집하는 작가이다. 그는 <꿈의 형태>에서 히치콕부터 린치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스릴러 서스펜스 호러 작가들의 꿈과 악몽을 차용하여 혼수상태부터 지각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메타포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단순하지만 설득력강한 작업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욕망을 영화에 투영해 지속적으로 발산하며 강력한 힘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시 모펫의 <마더> 역시 공통 요소의 집합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각종 영화에 등장한 엄마의 모습을 한데 모아 놓은 작품이라는 사실만 전해 들었을 뿐 정확한 구성이나 표현 기법은 확인 할 수 없었다.



Cosmic ray


이외에도 ‘파운드 푸티지’ 작업의 1세대 기수인 브루스 코너의 <Cosmic ray>와 49편의 느와르를 차용해 색감의 다변화 속에 인터렉티브 장치를 고안한 노재운 작가의<God4saken>등이 조사되었지만 실제 영상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브루스 코너의 <Cosmic ray>는 나체의 여성이 역동적으로 춤을 추는 필름에 미키 마우스, 전쟁 기록, 광고, 서부영화 등의 이미지를 묶어 레이 찰스의 흥겨운 노래 속으로 집어넣은 작품이다. 이는 대중문화와 전쟁 등의 선정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으로서 초기 ‘파운드 푸티지’ 기반 꼴라주 작업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시회를 통해 꼭 감상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노재운 작가의 경우는 동류 작가들이 선호하는 방식과는 다소 상이한 특징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인터렉티브 요소를 가미했다. 49편의 흑백 느와르 필름의 씬을 컷팅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색을 부여하고 관람객에게 49개의 색면을 제시하여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직접 작품이 전시된 형태를 관람하지 못하여 작가의 의도나 방향성은 쉽사리 추측이 되지 않는다.


Cosmic ray


‘파운드 푸티지’를 기반으로 작품활동을 펼쳐온 기성작가들에 대한 소개를 이어봤다. 여기까지 언급된 이들은 순수하게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이미지에 영감을 얻어 그들을 복제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이질적인 외형과 상이한 메시지를 뽑아내 왔다. 이들의 작업방식을 물리적 방식에 따라 나누면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째로는 <크리스탈> 이나 <시계>와 같은 방식으로 유사한 이미지를 중첩시켜 자신의 강박적인 집중력을 펼쳐보인 케이스이다. 공통적인 요소의 반복과 모든 씬들의 허리를 꿰뚫는 강렬한 주제의식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최면적 감상효과를 얻도록 유혹하는 작품들이였다. 임의의 가상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원본의 장면을 자르고 뒤집고 쪼개며 편집의 온 집중력을 쏟아 부은 경우이다. 


 

Kristall


<희생>과 <Soliloquy trilogy> 와 같이 큰 맥락을 잘게 나누어 결국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기이한 형태로 얻어내는 방식이다. 덜어내고 순서를 바꾸고 새롭게 이어 붙이며 관객의 역발상적 기시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 형태이다. 그리곤 <호러 체이스> 나 <The third memory> 와 같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관람객과 소통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본 작업은 순수한 ‘파운드 푸티지’ 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작품에 침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 방식보다 강한 어조로 설파하며 원작 본연의 매체적 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는 <24시간 싸이코>와 같이 시간을 조절하고 소리를 컨트롤 하는 방식으로 단순히 기술적 조건의 변형을 통해 특정 감각에 대한 통각을 자극하는 케이스가 있다. 이는 대부분 속도와 기억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공백에 대한 자문을 스스로 던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희생


물리적 작업 속성에 따른 편집/조합/재창조/변형 의 구분은 궁극적으로 세 가지 테마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Cosmic ray>와 <Sync> 연작들이 자극적인 영상의 재빠른 전환을 통해 우리에게 강렬히 전달한 바는 매체 자체에 대한 자기 반영적 암시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들은 영화를 비롯해 여타의 대중매체의 소비적,쾌락적 특성의 지나친 물질주의를 경고하며 스스로에게 자정할 수 있는 사고의 장을 열어 준다. 또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촉구하는 작품군들이 존재한다. <플래시 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더글라스 고든의 숱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와같은 테마에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시간의 의미와 영화매체. 비디오(미디어)아트 매체가 지닌 시간의 속성을 반복적으로 환기 시켜준다. 다음으로는 <L'ellipse> 와 <Through a looking glass> 처럼 공간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들도 있다. 현존하는 공간을 새삼 상기 시키며 동시에 공간이 표할 수 있는 매체적 맥락을 복구와 참여의 작업을 통해 관람객에게 제시해준다.


5. 결론


'파운드 푸티지‘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 작업은 아직까지 그 영역이 넓진 않다. 하지만 확언하건대 점차 본 분야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시도가 이뤄질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은유적 존재로서 비디오(미디어) 아트가 진작 걸었어야 했던 길을 잠시 방황하며 잊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들어 작품의 물리적 개수의 증가와 함께 해당 컨셉만으로 전시회를 기획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 미국의 밀워키 아트 뮤지엄에서는 크리스찬 마클레이와 피에르 위그, 제니퍼 & 케빈 맥코이 등의 작품들을 모아 <CUT/film found object>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작년 강남구 신사동의 코리아나 미술관에서는 <피쳐링 시네마>라는 제목으로 치유로서의 은밀한 반복이란 부제와 함께 브루스 코너를 비롯한 대표 작가 10인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었다. 가깝게는 이번 달 네달란드 암스테르담의 EYE 에서는 <Found footage : cinema exposed> 라는 전시를 열어 <크리스탈> 등 ’파운드 푸티지‘ 분야의 대표작들을 소개 중에 있다.


Found footage : Cinema exposed 전시회장 준비장면


영화의 해체와 반복과 재창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작업. 나는 이러한 방식이 갖는 단단한 잠재력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즐거운 꼴라주 작업은 많은 방식을 통해 그 파급력을 점차 확대 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유된 자원으로 탄생하는 근원적 존재성으로 인해 이미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개척중에 있다. 개중에는 단순히 흥미위주의 시각적 충족을 지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체에 대한 반영적이며 비판적인 근본적 속성에 의해 각각의 작품들은 수용자로 하여금 의도치 않은 교훈과 즐거운 감각의 충족을 동시에 이루고 있다고 본다. 얼마 전 히치콕의 <이창>을 분리하고 조합해 자신만의 캠퍼스 속에 동시 다발적으로 영화의 시간들을 조합하는 작업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완성도나 품고 있는 함의에 있어 절대 기성작가의 논조와 어조에 눌리지 않는 강력함이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컨셉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파생되는, 흡사 놀이와 같은 상호 영향관계를 보며 본 분야가 인터넷 기반 바운더리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 본성의 흥미를 자극하는 ‘파운드 푸티지’ 기법은 여러 방식으로 대중매체로 자신의 존재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힙합 가수 카니예 웨스트는 마르코 브람빌라의 <문명> <진화> 연작에 큰 미적 심상과 감동을 받아 직접 그와의 협업을 통해 그와 동일한 컨셉으로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경우가 있다. 단순히 예술이 미술관 안에서 서식하는 독자적 의미의 오브제가 아니란 사실을 말해주는 케이스다.


 

Power


영화를 집어삼킨 비디오(미디어) 아트 들 옆에는 스스로가 영화가 되기를 욕망하며 영화와 영화 기반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직접 촬영한 영상이나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해 새로운 방식으로서 실험적인 영화 상영을 시도하며 필름을 변형시키고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왜곡 시키거나 흡사 영화관과 동일한 구조의 작은 관람실을 만들어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영상물을 영화에 대체하는 작업등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와 빛과 암실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과 뜨거운 실험들이 행해지는 분야 역시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업들과 함께 영화와 비디오(미디어) 아트의 관계와 영향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향한 반영적, 지시적 실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이작 줄리언의 <The ten thousand waves>의 경우는 9개의 스크린의 압도적인 비주얼과 유명배우 장만옥의 캐스팅을 통해 단순히 영화의 그림자가 아닌 영화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시각적 경험으로서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기도 하고 있다.



Ten thousand waves


Looking for alfred



 

Upolar



Rear window timelapse


시간과 공간, 대중과 작가, 매체에 대한 자기 반영성과 자기 지시성 등 여러 가지 키워드를 떠올리며 ‘파운드 푸티지’ 기반 작업을 살펴보았다. 본 작품이 일반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위에서 다 언급한 것 같다. 나는 이 보고서를 마무리 지으며 딱 두 가지 만을 덧붙이고 싶다. 상호간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두 매체간의 관계를 바라보며 시도와 변형의 고민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발전적인 방향에 대한 답안을 보다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봤으면 하는 것. 그리고 이전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오브제 개념의 무한한 공유화와 상호작용의 시대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작품이란 놀이를 통해 피부 가까이 맞대가며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고 반성케 만들어 줄 수 있는 예술의 참되고 진솔한 의미를 보다 쉽고 부드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Life in a day


작년에 가장 인상적으로 감상한 영화가 있었다. 전 세계 인구가 동일한 하루의 자신을 각자의 카메라에 담아 한편의 영화로서 완성한 작은 지구본 <라이프 인 어 데이>. 서로가 서로의 인용이 되어 하나의 몸뚱이를 체워 나가는 과정. 난 이러한 작업이 지니고 있는 시도와 의미야 말로 앞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예술과 신매체의 새로운 얼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과 힌트를 가장 적절하게 제시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파운드 푸티지’ 기반의 영상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며 서로의 영향력을 공유하며 큰 그림을 그려내는 작업들에 아낌없는 애정을 보낼 것이다.




- 27살

Posted by Alan-Shore :

요즘 드는 생각. 확실히 포스터 아트는 한계가 있는것 같다. 그만의 매력이 있다지만 일러스트 기반의 재해석이 기획적인 사진매체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감당하기는 버거운것 같다. 포스터 아트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기본에 소홀했다는 생각이든다. 2차 해석, 오마주는 어디까지나 예외고 해프닝이다. 하나의 대중예술로도 읽힐 수 있는 영화 포스터에 더 관심을 기울여보고자 한다. 月刊 Poster는 그런 의미에서 다달이 열댓장의 뛰어난 포스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포스터들을 전시하고자 한다. 제작년도 는 구분치 않는다. 오늘 공개된 뜨거운 이미지일 수도, 무성영화 시절의 고전 이미지가 올라올 수도 있다. 月 1회 포스팅을 기준으로 포스터를 보다 더 가까이 들여다 보고자 한다. 

















 

SAVAGE GRACE 얼굴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줄리안 무어는 그런 배우다. 냉랭하고 차디찬, 어찌보면 괴상한 이 영화. 줄리안 무어의 표정없는 표정으로서 친절히 설명해준다.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현실에 없을것 같은 배우들, 틸다 스윈튼과 함께 줄리안 무어는 확고한 신비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영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는 느낌이 좋다. 배우의 힘만으로.. 


Midnight in paris 우디앨런 감독의 신작 포스터다. 영화에 관한 정보는 (내 선택에 의해) 전무한 상태에서 한장의 포스터만으로 작품을 기다려본다. 제목에서 짐작컨데, 아마도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이 영화. 빈센트 반 고흐의 Starry Night 을 하늘삼아 자정을 걷는 남자를 포착하고 있다. 파리와 명화의 결합을 보고 있자니 문뜩 빈센트 미넬리가 떠오른다. 미술학도이자 브로드웨이에서 미술감독을 지낸 바 있는 빈센트 미넬리는 <파리의 미국인> 에서 진 켈리를 틀루즈 로트레크의 화폭 속으로 집어 넣는다. 미술을 사랑하는 이 감독은 영화의 후반부 배경을 명화 속 거리와 풍경으로 가득 체웠었다. 영화 속으로 끊임없이 캔버스를 밀어넣었다. 생의 농을 즐기는 현실주의자에게서 그런 환상은 바라지 않지만, 이 포스터를 보고 있자니 미국감독과 프랑스 미술가의 기묘한 동거가 떠오른다. 가장 눈에 띄는 포스터다.     



Straw dogs 샘 페킨파 감독의 첫 현대극 <어둠의 표적> 포스터. 가장 좋아하는 포스터 중 하나다. 얼마전 극장에서 <블랙스완>의 팜플렛을 보다 이 작품이 떠올랐다. 일반의 작품들이 할애된 지면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활용하는데 반해 <블랙스완> 이나 <어둠의 표적>의 경우는 이미지 상에 별도의 액자를 위치시키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균열과 붕괴의 상징을 주인공의 얼굴 위에 씌여 불안의 정서를 완성 시킨다. 더스틴 호프만의 외소한 체구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한없이 무능력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연약한 미국인 학자가 타지의 위협으로 부터 광기와 불안을 체득하는 순간. 이 포스터는 강렬하게 말해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한국 영화 포스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환상의 현실화를 위한 거침없는 달리기. (힘들어) 죽거나 혹은 (작품성이) 나쁘거나 류승완 감독은 필사의 의무감으로 이 작품을 완성 시켰다. 바로 그 날것의 정서가 포스터에 온전히 담겨있다. 스틸컷이라 해도 무방한 흔해빠진 구도 그리고 그 위로 무심히 흐르는 문구.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허전하고 거친데, 너무 아름답다. 



rabbit hole 개인적으로 꽤나 선호하는 디자인이다. 조각난 이미지의 이어질듯 불균질한 조합. 감상 전이기에 정확한 흐름은 모르지만 대강의 얼개는 새끼잃은 어미의 혼란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로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이야기인 만큼 니콜 키드만의 얼굴을 파편의 일부로 배치한 구성이 썩 괜찮아 보인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의외로 묵직한 작품들이 많다. 가끔씩은 놀라우리 만큼.



SPUN 청춘 소모와 젊음의 방치. Spun은 꽤나 반항적인 작품으로 각인돼있다. 오래전에 감상한 작품들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솔직히 정확한 이야기나 사건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접하게 해줬으며 영화를 본 뒤로도 자신의 색을 확실히 각인 시켜준 강렬함. Spun의 포스터는 영화에 대한 회상인 동시 강렬한 문신이다. 



WIN WIN 꽤 기대중인 독립영화다. 그렇게 눈여겨 볼만한 포스터는 아니지만, 폴 지아메티의 존재감에 대해 언급해보고 싶었다. 물론 상업영화에서도 자주 얼굴을 접할 수 있지만 그의 뚱한 표정과 펑퍼짐한 몸매는 그 자체로서 독립영화의 기운을 표출한다. <사이드웨이>때문에 생긴 편견일까. 왠지 포스터 한켠에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면 소소한 이야기가 슬슬 흘러나오는듯 하다.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분명히 믿음이 가는 배우다. 닮은 구석은 없지만 한국에서는 박혁권씨의 존재감이 그렇다.



 


Posted by Alan-Shore :

요즘 드는 생각. 확실히 포스터 아트는 한계가 있는것 같다. 그만의 매력이 있다지만 일러스트 기반의 재해석이 기획적인 사진매체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감당하기는 버거운것 같다. 포스터 아트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기본에 소홀했다는 생각이든다. 2차 해석, 오마주는 어디까지나 예외고 해프닝이다. 하나의 대중예술로도 읽힐 수 있는 영화 포스터에 더 관심을 기울여보고자 한다. 月刊 Poster는 그런 의미에서 다달이 열댓장의 뛰어난 포스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포스터들을 전시하고자 한다. 제작년도 는 구분치 않는다. 오늘 공개된 뜨거운 이미지일 수도, 무성영화 시절의 고전 이미지가 올라올 수도 있다. 月 1회 포스팅을 기준으로 포스터를 보다 더 가까이 들여다 보고자 한다. 
 








































I am love 이번 기획의 단서가 된 작품이다. <I am love>는 2011년의 첫번째 걸작이다. 스크린을 통해 엠마의 자아회복기를 구경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영화적 체험이 되었다. 칭찬은 이쯤에서 접고 본 포스터 작가에 대한 감사함을 표할 차례다. 만약 이 이미지가 없었다면 <I am love>를 무심히 흘려보냈을 것이다.  2장의 이미지를 전시한다. 껍데기는 가라. '나는 사랑'이라며 인간회복에 뛰어든 엠마의 우아한 일탈을 정확히 포착해낸 포스터다. 영화 만큼이나 우아하고 근사하다. 박제된 인물들의 얼굴 위로 I am love라는 문구가 스쳐간다. 우리의 엠마만 당당히 얼굴을 내밀뿐 


I SAW THE DEVIL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북미판 포스터다. 로컬리티에 의한 스타성 배제는 이렇게 훌륭한 느낌을 선물해준다. 아무리 올드보이와 지 아이 조로 외국팬들에게 얼굴을 각인시켰다지만, 그들에겐 어디까지나 낯선 이들이다. 날것, 그 자체의 느낌을 생생히 전해주는 포스터다. 국내외 모든 포스터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악마를 보았다>의 얼굴이다. 


 I'M STILL HERE 지난한해 등장한 모든 포스터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이미지다. 호아킨 피닉스에 관한 이 괴상한 다큐멘터리는 그저그런 작품으로 밝혀졌지만 포스터만큼은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와 비슷한 구석도 있다. 제목도, 포스터도 멋지다. 






Posted by Alan-Shore :









삼합의 안정감을 선호한다. 자신들의 몸을 포개어 서로의 근거와 예증이 되어주는 어느 세가지 것들의 만남. 한가지 컨텐츠를 단단히 구축해낼 자신감도 없기에 이와같이 내 부족함을 기획에 기대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경계와 제한이 존재치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으면한다. 비록 사소한 단서가 되더라도 차곡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화적 감흥이란 이름으로 머릿속에 오래토록 축적되어가는 '순간'과 '사건'의 이야기들이 미련의 여지로서 굳어지기전에 스케치 정도를 기록하고자 한다. 블로그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갖고 슬며시 권태의 길로 접어드려는 찰나 본 카테고리의 글들이 새로운 활력과 동력으로서 유일한 취미생활이 수면아래로 가라앉지않게 날 잡아줬으면 한다.     




세점을 잇는 첫번째 이야기는 춤추는 그대들의 모습이다. 사실 영상을 편집해놓은건 4월 경이었다. 당시의 주 목적은 오마주의 어느 단면에 대한 흥미거리였다. 장 뤽 고다르의 64년이 할 하틀리의 92년에게 그리고 94년의 타란티노에게, 최종적으로는 2009년의 정성일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영상을 한두번 돌려볼 수록 최초에 선물받은 뮤지컬씬의 달콤한 감흥이 확연히 줄어듬을 느끼게 되었다. 왜 일까? 매일매일은 과장이지만 이따금씩 3명의 젊은이들이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즐기는 순간의 군무들을 떠올리며 고민해봤다.


두달사이 몇권의 책을 훑으며 몇번이고 마주치게된 이름이 있었다. 진켈리, 그리고 그 중에서도 <파리의 미국인>. 뮤지컬 장르의 분명한 역사이자 보물같은 순간인 본 작품의 모습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보니 극단의 위치에서 색다른 뮤지컬씬을 연출해낸 세 작품들의 단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야기를 빌려온다. 「 나는 항상 영화속의 뮤지컬 신들을 좋아했다. 특히 '뮤지컬 장르가 아닌 영화' 속의 뮤지컬 신을 더욱 좋아했으며, 고다르 영화 속의 뮤지컬 신을 가장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선 갑자기 뮤지컬 장면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 신은 매우 매혹적이다.그리고 뮤지컬 장르에 속하는 영화가 아니기때문에, 뮤지컬 신을 삽입하려면 영화의 흐름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 점이 영화를 더욱 달콤하게 만든다. 」


어느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에 읽게된 '돌발적 뮤지컬신'에 관한 타란티노의 이야기는 독자적 편집에 의해 훼손되어버린 이들의 매력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청춘과 불안의 어느 접점에서 튀어오르는 그대들의 몸짓은 <시카고>의 화려함이나 <렌트>의 열정마냥 작은 틀안에 가두어 각자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감정과 이야기를 쫓는 방식에 있어 논리적 서사보단 춤이라는, 인간의 육체로 표현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으로서 직접적인 교감을 시도하는 뮤지컬 장르를 갑작스레 끼워넣는 방식은 가장 충격적이며 언제까지나 젊음의 이름으로서 기억될만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걸까, 무의식중에도 이같은 매혹을 어느정도 느끼게된건지 통상의 뮤지컬 신과는 분명히 다른 편집점을 새겨넣긴 했었다. 율동의 시작점이 아니라 최소한의 단서를 선행한 후 출발하는 이들의 춤. <국외자들>에선 군무에 앞서 이들의 성격과 관계에 대한 단서를 주고 싶었던걸까. <심플맨>에서는 그 외침을 보여주고 싶었던걸까, <카페 느와르>에선 컬러의 무대로 진입한 순간 영수의 어중간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던걸까. 어떤 동기에서건 갑작스런 침입의 최소한의 흔적은 남긴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오마주의 흥미로 시작된 관심이 사소하나 나름 의미있는 발견으로 마무리된 본 포스팅의 이야기들. 세명의 남녀가 추는 세개의 경, 본 기획의 첫번째 이야기로 어울릴듯 하다.





 






 






 



2001년 정성일은 김홍준과의 대담자리에서 <국외자들>의 카페 뮤지컬신을 최상의 뮤지컬로 손꼽은 바 있었다. 고다르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최상의 뮤지컬은 분명하다던 그 이야기. 새삼 떠오른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에서 잭 래빗 슬림 댄스 컨테스트 역시 이들과 분명한 접점이 있는 모습이긴하나, 영화광의 지독한 욕심은 한 신속에 고작 한편의 작품에게 구애할 순 없었는지 너무나 많은 인용과 오마주가 있었기에 별도의 케이스로 떼어놨다. 




 
 








- 26살





Posted by Alan-Shore :

영화 팜플렛 콜렉션

2012. 3. 3. 11:38 from Cinema/Mine






'목록을 작성해야지' 입으로만 중얼거리며 이래 저래 미루다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와 버렸다. 뒤바뀐 밤과 낮을 바로잡고자 24시간 이상을 무수면 상태로 버텨야할 상황에서 도저히 글자는 눈에 안들어오기에 공부는 때려치고 그간 미뤄온 숙원사업에 손을 대봤다.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감각 탓에 실용보단 이쁜것. 그리고 날 기분좋게 만드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보지도 않을, 그리고 이미 예전에 다 봐버린 비디오를 책장에 차곡 차곡 쌓아놓는 이유도 단지 넓직한 이미지가 이쁘기에, 그리고 가만히 보다보면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일게다. 아마 팜플렛을 챙겨온 것도 비슷한 이유에설게다. 중학생 시절 신문지의 영화광고를 오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극장에서 팜플렛을 꾸역 꾸역 챙겨오는 짓거리도 아마 그냥 이뻐서 그런걸 게다. 사실 그때만해도 영화에 대해선 별 아는바도 없을 뿐더러 친구들과 약속이 있지 않으면 극장도 안가던, 영화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이쁜 것들을 줏어 모으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이 생긴걸까. 여튼 우연히도 그 후 얼마 지나지않아 극장을 혼자 찾아가는 중학생이 된듯하다. 동기도 목표도 없기에, 수집 목록은 참으로 조잡하고 애매하다. 뭐 어차피 수집에서 만큼은 과유불급은 어불성설일 수 있으니 앞으로도 기준은 없을것 같다. 주기적으로 변덕치는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듬성 듬성 몇년의 시간들이 비어있다.


 

기준도 없이 시작된 막 짓거리지만 자연스레 용솟음치는 괴상한 애착 정도는 생기긴했다. 일단 외국 영화들에 있어선 팜플렛의 호감 정도는 작품성과 비례하는것 같다. 좋은 작품, 혹은 내가 감명깊게 본 작품엔 너무나 평범한 애착이 간다. 근데 기묘한 점은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으로 적용된다는 거다. 정말 이상한 영화, 평단과 관객들에게 철저히 조롱받은 작품들을 갖고 있으면 묘한 뿌듯함이 생긴다. 물론 박찬욱과 봉준호 이창동의 영화는 너무나 빛나기에 흐물거리는 종이 한장도 소중히 모시고픈 맘이 든다. 몇몇 거장을 제한다면 한국영화 시장을 좀먹은 혹은 거대한 재앙으로 기록된 작품들에 호감이 간단거다. 이번에 정리하며 발견한 것이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팜플렛이 2개나 있는걸 보고 너무 즐거워졌다. 몇년전에 찍은 사진이지만 다시봐도 감동적이다. <까불지마> <구세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긴급조치 19호> <그녀를 모르면 간첩> <제니,주노> 오, 이 놀라운 면면을 보시라. 개인적으론 깐느 영화제 콜렉션 나열에 맞먹는 전율이다. 특히나 극장에서 관람한 긴급조치는 더욱 특별하다.  




 

이번에 목록을 정리하다보니 막연하기만 했던 팜플렛 수집에서 몇몇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첫째로 난생 처음보는 듯한 영화들이 은근히 많다는 것이다. 국내극장에 걸렸으니 누구나 알법한 배우들이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시놉시스 한글자 마저떠오르지 않는 작품들이 많았다. 도대체 실베스터 스텔론의 <디 톡스>는 무슨영화였지. 이건또 뭐야 안젤리나 졸리와 클라이브 오웬이 나오는데 난생 첨보는 느낌이다. <머나먼 사랑>이라... 영화는 많이 안봐도 영화 정보를 읽어제끼는걸 좋아하기에 개봉작들은 거진 다 알고 있다 당연시 해왔는데, 확실히 한수 배웠다. 어쩌면 머리가 안좋은 것일 수도 있겟지만.



 


둘째는 앞으론 누군가에게 팜플렛을 선물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다. 대수롭지 않게 모아왔기에 대수롭지 않기에 친구들에게 주곤 했었는데, 예전 사진 속 팜플렛이 집에서 사라진걸 보니 묘하게 씁쓸한거다. 생각해보니 이건 다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선물로 주기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종이 쪼가리니 그냥 가만히 냅두는게 상책인것 같다. 뭐 죽어라 필요한것도 아니지만, 괜히 느껴지는 공허함이 있다. 별 생각없이 줏어왔어도 10년 가까운 시간이 쌓아준 정이려나. 셋째로는 앞으로 소규모 독립 상영관에 갈땐 꼭 가방을 챙겨야겠단거다. 멀티플렉스로 나설땐 이래 저래 다른 물건들도 살겸 읽을 책도 싸갈겸 작은 가방이라도 들고가니 팜플렛을 자연스레 챙겨오는데, 시간에 딱 맞춰 영화만 보고 후딱 나오는 독립 상영관에선 팜플렛을 잊는 경우가 많은것 같았다. 뭐 팜플렛이란게 메인스트림이건 인디건 시간 지나면 어차피 다 사라질 운명이지만 인디영화 쪽 팜플렛이 이쁜 것들이 더 많은것 같다. 이번에 정리하다보니 확실히 느꼇다. 어째 제작비는 비견도 안될 꼬맹이들이 이리도 이쁜 종이위에 그림을 찍어내는건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감성이 참 이쁘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감한것이 요즘엔 도통 팜플렛에 투자를 안하는것 같다. 거진 한쪽짜리 압축본에 기껏해야 접이식 구성이다. 캬, 새삼 느낀거지만 2000년대 초반만해도 뭔놈의 책같은 팜플렛도 많더라. 이거 흔한 광고지지만 해당 영화를 인상깊게 본 사람으로선 꽤 소중한 자료가 되는것 같다. 뭐 비단 분량의 문제 뿐 아니더라도 사각의 틀에서 가끔씩 벗어나는 깜찍함을 좀 발휘해줬음 좋겟다. 축구공 디자인을 빌려온 <소림축구> 팜플렛은 영화 만큼이나 유쾌했단 말이다. 펼치면 반지같이 생겨먹은 <반지의 제왕> 팜플렛은 지금봐도 신기하단 말이다. 토토로 모양에 맞춰 이쁘게 잘라놓은 요 귀여운 녀석좀 보란 말이다. 요즘엔 도통 이런 짓은 안하는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희극 조합인 에드가 라이트의 <뜨거운 녀석들>과 정신나간 <심슨 극장판> 팜플렛이다. 요렇게 달려 만코롬 조금만 신경 써줘도 참 좋은 선물이 될듯한데 말이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도 달력 디자인인데 한장 뿐이라 아까워서 접지못하는게 아쉽구려. 


 

몇년 잊고 지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배우 이은주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까워 미칠것 같은 이은주씨. 유독 좋아하는 배우였기에 이래 저래 팜플렛도 챙겨놨었는데, 아쉽다 아쉬워. 조만간 시간이 나면 <안녕 UFO>를 한번 다시 봐야겠다. 내 기억으론 <번지점프를 하다>와 함께 이은주씨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담긴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적 비중을 따지면 <안녕 UFO>가 훨씬 높기에 이은주하면 자꾸만 이 작품이 생각난다. 다시봐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네. 




아... 본론이 지나치게 뒤로 가버렸다. 결국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수집한 자료들을 꾸준히 기록하기 위해 목록을 적어 봤단거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보단 개인적 기록 차원이라, 이 카테고리안에서 게시글은 이게 마지막이 될것이다. 페이지 상에서 꾸준히 업데이트하며 혼자 성실히 기록해보고자 한다. 일단 한국영화를 제외한 작품들은 외화로 뭉쳐놨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국가간의 어느정도 구분은 가능하지만 그럴만큼 방대한 양은 아니기에...  


 

 
[ㄱ]
까칠한 그녀의 달콤한 연애비법 (2) /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 공기인형 (3) / 공작부인 / 그랜토리노 / 겟 스마트 / 권태 / 007 카지노 로얄 / 굿 셰퍼트 (2) / 고스트 라이더 / 고 / 검우강호 (3) / 가디언의 전설 (2)

[ㄴ] 
나이트 메어 (2) / 나는 비와 함께 간다 (3) / 넘버 23 (3) / 나비효과 / 나루토 - 질풍전 / 뉴 폴리스 스토리 / 나오코 / 나인 / 뉴욕, 아이러브 유 / 나비부인 / 노크 / 님스 아일랜드 /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 닌자 거북이 /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 내일의 기억 / 눈물이 주룩 주룩 / 나인야드 2 / 늑대의 후예들 / 노트북 / 노스페이스 / 넥스트 / 닌자 어쌔신 (2) / 노라없는 5일 (5) / 노다메 칸다빌레 

[ㄷ]
디스 이즈 잇 / 디어존 / 데이브레이커스 (3) / 데자뷰 / 대단한 유혹 / 디 톡스 / 데스워터 / 더 클럽 (3) / 드림업 / 더 리더 / 드래그 미 투 헬 / 드림걸즈 (3) / 더블타겟 / 데스노트 : L / 더 퀸 / 드리븐 / 데스티네이션 / 뜨거운 녀석들 (2) / 더 레슬러 /드래곤볼 에볼루션 / 대부 (10) / 디센트 2 / 드래곤 길들이기 (4) - 2종 / 더 코브 / 더 로드 (2) / 도쿄타워 / 돈 조바니 (3) / 대부2 (10) / 더 콘서트 (2) / 데블 (5) / 

[ㄹ] 
로빈후드 (2) / 러블리 본즈 (2) / 러브송 / 릴로 & 스티치 / 렌트 / 룸바 / 라르고 윈치 / 링 2 / 로나의 침묵 / 록키 발보아 / 레밍 / 러시아워 2 / 로렌조의 밤 / 러브 & 트러블 / 람보 4 / 라스트 에어벤더 / 로마에서 생긴일 (2) / 레터스 투 줄리엣 (2) / 레지던트 이블 4 (2) / 렛미인(US) / 레드 (2) 

[ㅁ] 
메신저 / 미스포터 / 몬스터 주식회사 / 머스킷티어 / 모스맨 / 마터스 (3) / 말로노체 / 맘마미아 / 메디엄 / 10,000 BC / 매뉴얼 오브 러브 / 밀크 (2) / 미션 클레오파트라 / 밀리언즈 / 마하 2.6 / 머나먼 사랑 / 미트 페어런츠 / 모짜르트와 고래 / 미치고 싶을 때 / 묵공 /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 마이너리티 리포트 / 모래와 안개의 집 / 명탐정코난 - 천공의 난파선 / 마법사의 제자 / 미, 투 (2) / 모범시민 /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몬스터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마루 밑 아리에티 (2) 

 

 [ㅂ]

블러디 발렌타인 / 부기맨 / 브레이크 업 - 이별후에 (2) / 발렌타인 데이 / 배드 컴패니 / 바벨 / 블랙 (2) / 바스터즈 (5) / 베이직 /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 박물관이 살아있다 2 / 블룸형제 사기단 / 브라더 베어 /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 배트맨 비긴즈 (2) / 밴티지 포인트 (2) / 번 애프터 리딩 / 블레이드 2 / 블랙아웃 / 분노의 질주 / 비밀의 숲 - 테라비시아 / 브리짓 존스의 일기 - 열정과 애정 / 블랙북 (3) / 비독 / 바닐라 스카이 (2) / 블러드 (5) / 블라인드 사이드 / 브라더스 (3)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4) / 블러디 다이아몬드 / 뷰티풀 마인드 

[ㅅ]
시간여행자의 아내 / 써로게이트 / 선샤인 (2) / 슈렉 3 (3) - 2종 / 슈렉 2 / 소림축구 / 사랑은 너무 복잡해 / 시리어스맨 (2)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 쇼피숄의 마지막 날들 / 소피의 연애매뉴얼 / 썸머워즈 / 스콜피온킹 / 솔로이스트 / 씬시티 / 숏버스 / 쇼퍼홀릭 / 식코 / 사랑을 부르는 파리 / 쉘위 키스 / 스파이더맨 / 스파이더맨 2 / 스파이더맨 3 (3) - 2종 / 사랑보다 황금 / 4.4.4 / 13 자메티 / 쉘 위 댄스 (US) / 스위트 노멤버 /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 쉬즈 더 맨 / 심슨가족 더 무비 (3) / 스파이 게임 / 쇼타임 / 상성 / 스텔스 / 선라이즈 선셋 / 스쿠비두 / 스피릿 / 사랑해 파리 / 스모킹 에이스 / 300 (2) / 신주쿠 사건 (3) / 스텝업 2 / 스쿠프 / 섹스 앤더 씨티 2 (2) / 싱글맨 (5) / 솔트 / 스텝업 3D / 셔터 아일랜드 (2) / 셜록홈즈 / 새드 베케이션 /  쏘우 3D / 스카이 크롤러 (5) 

[ㅇ]
오프사이드 / 유령작가 / 일루셔니스트 / 이웃집 토토로 / 이터널 선샤인 / 위핏 (2)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 / 인빅터스 (2) / 인디 에어 (5) / 예언자 (5) / 용호문 / 20세기 소년 / 인 블룸 (2) / 11:14 / 이글아이 / 아이스 에이지 3 / 업 / 어바웃 어 보이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3) / 여름의 조각들 / REC / 인크레더블 헐크 (2) / 애니 레보비츠 (2) / A.I /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게임 / 에코 / 오션스 일레븐 / 오션스 13 (2) / 오퍼나지 / 워 / 언페이스풀 / 우작 (3) / 6번째 날 / 22 블렛 / 어바웃 러브 / 인디스 러브 (2) / 왓 라이즈 비니스 / 알리 / S다이어리 / 아포칼립토 / 아틀란티스 / 알리바이 / 아들 (2) - 2종 / A - 특공대 / 영아담 / 아메리칸 파이 2 / 익사일 / 원티드 / 아메리칸 스윗하트 / 엔젤 아이즈 /  우리, 사랑일까? / 우주전쟁 (3) / 아주르와 아스마르 / 어톤먼트 / 이노센스 / 엣지 오브 다크니스 / 오션스 /익스펜더블 / 일라이 / 아이언맨 2 (2) / 엘라의 계곡 / 웰컴 (2) / 아바타 (2) / 에로스 / 에비에이터 /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슬립 (3) / 아메리칸 

 

[ㅈ]
지구 / 지.아이.조 (2) / 제 9중대 / 잘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 주노 (3) / 점퍼 / 집결호 (2) / 적벽대전 - 거대한 전쟁의 시작 / 자토이치 / 저스트 라이크 헤븐 / 진주만 / G - 포스 (2) / 제노바 (2) 

[ㅊ] 
착신아리 2 / 착신아리 / 치킨런 / 찰리 바틀렛 (2) /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 코치 (2) / 천사와 악마 

[ㅋ]
컴 아웃 파이팅 / 클로이 / 코코샤넬 (2) / 킬러들의 도시 /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 (4) / 킹덤 오브 헤븐 / 킹콩 / 킨제이 보고서 / 콘스탄틴 / 킹아더 / 콜래트럴 데미지 / 코치카터 / 키스 오브 드래곤 / 캐쉬백 / 클릭 / 콜래트럴 / 캣츠 앤 독스 / 크레이지 (2) / 킥애스 (10) / 크리스마스 캐롤 / 클린 / 

[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 트로이 / 트리플 X 2 / 트랜스 포머 (4) /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 터미네이터 - 미래 전쟁의 시작 (2) / 타인의 삶 (3) / 트와일라잇 - 뉴문 / 트와일라잇 - 이클립스 / 택시 4 (2) / 툼레이더 / 타이탄 / 

[ㅍ]
팬도럼 / 포스 카인드 / 프롬 파리 위드 러브 / 퍼펙트 겟어웨이 / 퍼블릭 에너미 / 플라이트 플랜 / 펠햄 123 / 피터팬 / 페이첵 / 포비든 킹덤 / 팩토리 걸 / 퍼햅스 러브 / 프라임 러브 / 프린세스 다이어리 (2) / 페인티드 베일 /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3) / 패밀리맨 / 펭귄 / 프릭스 / 페르시아의 왕자 / 폴리와 함께 / 포스트맨 블루스 / 프로포즈 데이 / 퍼니게임 / 파라노말 액티비티 2 / (2)

[ㅎ]
한니발 라이징 / 하치 이야기 (2) /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히든 / 황시 / 해리포터와 불의 잔 / 황후화 / 행복을 찾아서 / 해피 플라이트 (4) /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 훌라걸스 / 하나와 앨리스 / 하이 크라임 / 혹성탈출 / 황야의 마니투 / 히노키오 / 향수 / 하트의 전쟁 / 허트로커 (4) /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  

 



[ㄱ]
그랑프리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 / 경계도시 2 (3) / 구세주 / 까불지마 / 국가대표 (2) / 고고 70 / 꽃섬 / 그림자 살인 / 과거는 낯선 나라다 / 김씨 표류기 (2) / 거북이 달린다 (4) - 2종 / 극장전 / 결혼은 미친 짓이다 / 그녀를 모르면 간첩 / 긴급조치 19호 / 거미숲 / 고양이를 부탁해 / 간큰가족 (2) / 경의선 (4) / 귀여워 / 가문의 영광 / 강력 3반 / 검은집 (3) - 2종 / 꽃피는 봄이 오면 / 고사 2 / 광식이 동생 광태 (2) / 공공의 적 / 공공의 적 2 / 극락도 살인 사건 (2) / 그 놈 목소리 / 그 놈은 멋있었다 / 그때 그사람들 

[ㄴ]
남극일기 / 내 남자의 로맨스 / 날아라 허동구 / 나는 행복합니다 (3)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2) / 눈부신 날에 (2) / 내부순환선 / 나탈리 (2) / 나두야 간다 / 내 머리속의 지우개 / 나무없는 산 (2)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 2종 / 내사랑 싸가지 / 노랑머리 2 / 내 깡패같은 애인 (2) / 녹색의자 

[ㄷ] 
동해물과 백두산이 / 돌려차기 / 두번째 사랑 / 달마야 놀자 / 달마야 서울가자 / 댄서의 순정 / 두사부일체 / DMZ 비무장지대 / 다섯은 너무많아 (2) / 달콤한 인생 (2) / 된장 (3) / 돌이킬 수 없는  



[ㄹ] 
라이터를 켜라

[ㅁ]
맨발의 청춘 / 모던보이 /미워도 다시한번 / 못말리는 결혼 / 마이 뉴 파트너 / 마지막 밥상 / 무림 여대생 / 마더 (2) / 목포는 항구다 / 무영검 / 밀양 (2) / 무사 / 무적자

[ㅂ] 
바람의 파이터 / 부산 / 비몽 / 브로큰 플라워 / 불신지옥 (2) / 뷰티풀 선데이 (2) / 바람의 전설 / 범죄의 재구성 / 바보 / 보트 / 빙우 / 복면달호 / 방자전 (4) - 2종 / 박쥐 (3) / 바람피기 좋은날 / 베스트 셀러 / 반가운 살인자 / B형 남자친구 / 백야행 (2) / 빈집 / 박수칠 때 떠나라 / 봄날은 간다 / 불량남녀 / 부당거래 (5)  

 

[ㅅ] 
10억 / 시크릿 / 4교시 추리영역 / 쏜다 / 쓰리 (2) / 실종 / 생활의 발견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 / 싸울아비 (2) / 수  / 썸 / 시 (6) / 소름 / 시간의 춤 / 심야의 FM / 소와 함께 여행하는법 

[ㅇ] 
이장과 군수 / 의형제 (2) / 용서받지 못한자 / 요가학원 / 엽기적인 그녀 / 아프리카 / 오래된 정원 / 여행자 / 원스 어폰 어 타임 / 6년째 연애중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 워낭소리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2009 로스트 메모리즈 / 영화는 영화다 / 아라한 장풍 대작전 / 아는 여자 / 우리학교 (3) / 연애소설 / 예스터데이 / 이것이 법이다 / 이대근, 이댁은 / 악마를 보앗다 (5) / 이끼 / 와니와 준하 /  울랄라 시스터즈 / 용서는 없다 / 여배우들 (2) / 어떤 방문 (2) / 아이언팜 (2) / 연애의 목적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안녕 ! 유에프오 / 웰컴 투 동막골 (2) / 연애 / 우아한 세계 / 어쿠스틱 

[ㅈ] 
작전 /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 캐릭터별 포스터 추가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제니,주노 / 조폭 마누라 / 주홍글씨 (2) / 전설의 고향 / 작은연못 / 집행자 (2) / 좋지 아니한가 (2) / 전우치 (2) / 작업의 정석 

[ㅊ] 
청담보살 / 채식주의자 / 차우 (2) - 2종 / 추격자 (2) / 친절한 금자씨 / 천년학 (2) / 참을 수 없는 (3) / 초능력자 (2) 

 

 
[ㅋ]
킹콩을 들다 / 크로싱 / 케이티 / 퀴즈왕 (5)

[ㅌ]
토끼와 리저드 / 투 가이즈 / 트럭 / 태극기 휘날리며 (2)

[ㅍ] 
파송송 계란탁 / 평행이론 / 패밀리 / 펜트 하우스 코끼리 / 파주 (2) / 파란 자전거 (2) / 폐가 (2) / 파괴된 사나이 / 페스티발 (5)

[ㅎ]
하녀 / 하늘과 바다 / 호우시절 / 후아유 / 해운대 (4) - 2종 / 허밍 / 히말라야 (2) / 흑수선 / 황진이 / 흡혈형사 나도열 / 화산고 / 혈의 누 (2) / 효자동 이발사 / 해결사 


[ETC] 
3인의 거장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 / 아르노 데플레생 / 미카엘 하네케) / 씨네필의 향연 (2005.04.15~ 05.01) / 2009년 6월 단편 상상극장 / 2009 빛나는 선택 (오이시맨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 보트) 

 

[Note]
형사 - Duelist 

[Post card]

천국의 속삭임 / 스폰지 하우스 - 일본 인디 필름 페스티벌 / 서핑업 / 친절한 금자씨 / 스폰지 to 스폰지 2006 / 브레이크 업 - 이별 후에 / 더 로드 / 씬시티 / 아임 낫 데어 / 흑수선 / 13구역 / 블레이드 2 / 샴 / 두사부일체 / 홍상수 감독전 / 마리 이야기 / 열혈남아 / 윈드토커 / 커튼 레이저 / 나도 모르게 (2) / 쇼킹 패밀리 /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 아비정전 / 천하장사 마돈나 / 주먹이 운다 / 페어러브 

개인적으론 엽서나 작은 책자 따위의 기념품들을 좋아한다. 근데 요즘은 어째 이상하리만큼 홍보용 엽서는 만들지 않는 눈치다.

 

나름의 맥을 찾아 같이 놓고 사진찍는 일은 나같이 혼자노는 일을 즐기는 이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소모행위다. 과거형이 됐지만 정말 좋아했던 탐 크루즈의 작품들. 저 <바닐라 스카이> 팜플렛은 정식 팜플렛이 아니라 방한시 나눠줬던 싸인지다. 탐이 아닌 페넬로페에게 싸인을 받았는데 도저히 못찾겠더라. 뒤적 뒤적 팜플렛을 만지다보니 영화에 얽힌 옛추억도 스멀스멀 올라오긴 하는구나. 아, 탐 크루즈 참 잘생겼었지. 사랑하는 배우 디카프리오와 사랑하는 여성 전지현의 영화들도 나름의 추억과 소소한 소중함이 담겨있다. 맨 아래에 있는 <이터널 선샤인> <봄날은 간다> 팜플렛은 내가 젤 사랑하는 팜플렛 들이다. 특히 영화를 편애하는건 아니지만 전자는 비율이 후자는 재질이 맘에 든다. 물론 영화 자체도 좋아하긴 하지. 그리고 금자씨 팜플렛은 쫌 더 이쁘게 만들 수 있을것 같은데, 에이.

 

여기서부턴 이야기해보자면 나름의 추억과 설명거리들이 많지만 도저히 귀찮아서 못할것 같다. 그래도 몇몇 작품은 찝어서 이야기 해보자면, <하나와 앨리스>는 수능시험을 마치고 집에 들러 가방만 내팽개치고 바로 극장으로 가서 봤던 영화다. 앨리스. 이 캐릭터는 내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 한때 참 좋아했었다. 그리고 수 많은 팜플렛중 가장 쓸쓸한 느낌이 나는게 바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일게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던 느낌이 떠오른다. 저 팜플렛만 보면. 한마디로 참 불쌍한 팜플렛이다.


 

대미는 최초의 팜플렛으로 장식해야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집에 굴러 들어온 최초의 팜플렛이다. 그만큼 때도 자국도 많다. 생각해보니 영화를 안봤네. 참 좋아하는 감독이긴한데 이런 장르는 진짜 못 만들것 같아서 안본것 같다.




이렇게 몇년간 미뤄오던 작업을 마쳤다. 역시 엄청나게 소모적인 짓거리였다. 와 요즘엔 뭔 짓을 해도 허무하네. 뭐, 언젠가는 좋은 기억으로 , 좋은 자료로 남겠지. 그렇게 믿어야지 뭐. 그럴린 없겠지만 저장하기를 눌렀을때 에러가 난다면 미쳐버릴것 같다. 진심으로. 


Posted by Alan-Shore :

창작의 세계에서 영감(靈感)은 신의 선물과도 같다. 찰나의 순간에 스쳐지나간 한 줄기 빛을 잡아늘이다보면 어느새 수심이 가득했던 창작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종합예술로 불리는 영화는 유독 많은 영감의 원천을 갖고 있다. 한곡의 음악, 한점의 그림, 한편의 소설에도 영감의 선물은 가득하다. 특히 한장의 사진은 영화의 드라마를 창출해내거나, 인물을 창조하기도 하며 장면의 빛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곤 한다. 영화인들에게 신의 선물을 하사한 사진작가들로는 누가 있을지 궁금했다. 연출, 촬영, 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8명의 영화인들은 저마다 영화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사진작가를 추천했다. 사진과의 첫 만남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이 자신의 작품으로 이어진 사연들을 가나다순으로 소개한다. 그들의 영화세계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한석 / 강병진  씨네 21 2007.03.09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빛  김지운 영화감독  브루스 데이비드슨의 <영 커플>(1958) 

“매그넘 회원이기도 한 브루스 데이비드슨은 미국사회의 루저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촬영해온 작가다. 오래전에 백수생활할 때 이 작가에 관해 알게 됐는데, 그 뒤로도 우리나라 갤러리에서 사진전 등을 할 때 보러 가곤 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자주 담는 건 흑인, 노동자들, 할렘가의 아이들, 길거리 서민들, 서커스의 난쟁이 단원들 혹은 아주 낮은 곳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다. 대체로 미국사회의 어둡고 낮은 부분들을 많이 다뤄왔는데, 놀라운 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놓여 있을, 그 거리감이 마치 증발되어버린 느낌이 있을 만큼 대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한장의 사진은 <영 커플>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서민들이 지나다닐 법한 허름한 공간에서 두 젊은 남녀가 거울을 보고 몸을 치장하는 것을 포착한 것인데, 마치 그들은 현실이나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없다는 투로 아마 그 나이 때에나 가질 수 있는 거침없는 모습을 발산하고 있다. 그들의 전망은 밝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빛나는 이미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기성세대에 편입되기 직전의 그 찰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가질 만한 모습 말이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진이다.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짧고 아름다운 순간을 명징하고 아름답게 포착했다. 처음으로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된 내 시나리오 <좋은 시절>도 바로 이런 어두운 시기에 자신만의 빛을 내는 젊은 그들에 대한 느낌을 담으려 했다.”





 
타인을 인정하는 따뜻한 시선 김태용 영화감독  다이앤 아버스의 <일란성 쌍둥이, 로젤>(1967)

“다이앤 아버스는 비정상인들, 아니 이 세계의 이방인들을 많이 찍어왔다. 왜 우리가 그들을 대할 때의 어떤 딜레마가 있지 않나. 특별하다고 말하는 건 위악인데, 그렇다고 평범하게 본다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위선이 되는, 그들을 똑같이 대한다고 말할 때의 혼란. 그런데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은 그것에 대해 너무 당당하여 오히려 그 혼란을 무화하는 지점이 있다. 가령 새로운 사물을 찾기보다 사물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는 매그넘 사진작가들의 방식이 있는가 하면, 다이앤 아버스의 경우는 실제로 특이한 사람들을 많이 찍는다. 다이앤 아버스 사진 중에는 기형인들이 많다. 그전에는 이런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 사진을 보며 생각이 좀 바뀐 것 같다. <일란성 쌍둥이, 로젤>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도 그중 하나다. 보고 있으면 내가 이 이방인들과 함께 세상에 같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계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들을 봐야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언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보다 언급하며 친구가 되려는 것이 촌스러운 것처럼 치부되곤 하지만, 인정하지 않고 멀어지는 것보다는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에는 그걸 인정하는 태도가 있다. 피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직시하기, 아프지만 거기에 계속 서서 뻔뻔하기, 다른 데 보며 고상하게 모른 척 있으려 하지 않고 ‘바로 여기 있다’고 응시하기. 딜레마를 대하는 그 태도가 감동적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 같은 민병훈 영화감독  만 레이의 <Noire et Blanche>(1926)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연출한 민병훈 감독은 만 레이의 사진에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모성과 자연, 또는 순수함을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아하게 볼 것이다. 그런 다양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고전인 듯하다.” 만 레이는 친구인 파블로 피카소와 마르셀 뒤샹의 초상사진과 여성의 누드와 뒷모습을 담은 작품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작가이면서 화가이자 영화감독이다. “만 레이는 삶 자체도 섹시하지만, 사진에 투영된 이미지들도 관능적이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에 등장하는 여성의 뒷모습이나 사물들의 이미지에도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만 레이가 발명한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기법들 또한 민병훈 감독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영화에서 CG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만 레이의 사진들은 기교를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그 기교가 가장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민병훈 감독은 전작들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만 레이의 사진에서 얻은 느낌들을 반영했다. “<괜찮아, 울지마>는 영국에서만 사용되는 약품으로 인화했고, <벌이 날다>는 필름에서 색을 뺐다. 영화의 내용과 이미지에 가장 알맞은 기교를 사용하여 관객이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봐주길 원했다.” 민병훈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목각인형을 손에 쥔 한 여자의 얼굴이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기술이 곧 예술이다 박기형 영화감독  로버트 실버스의 <엘비스>(2001)

로버트 실버스는 기존의 사진들을 모자이크로 조직해 새로운 사진을 만드는 포토모자이크의 창시자다. 수천개의 꽃사진으로 다이애나비의 초상을 만들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가 하면, <라이프>의 커버를 가지고 만든 마릴린 먼로의 얼굴은 <라이프>의 60주면 기념 표지를 장식했다. 2002년 한 전시회에서 로버트 실버스의 작품을 처음 보게 된 박기형 감독은 “기술이 곧 예술이라는 말을 체감했다”고 한다. “보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마릴린 먼로나 다이애나비의 초상은 아이디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스페인 시민전쟁의 사진들로 그려낸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사진예술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박기형 감독이 로버트 실버스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기존의 것들을 가지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창작물을 만든다는 점이었다. “있는 것들의 재조합으로 창작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태도다. 영화 역시 훌륭한 고전이 많고, 새로운 작품들 또한 그것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기술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 또한 시사하는 바가 컸다. “기술과 노력이 천재성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창작의 뿌리인 것 같다.” 그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들로 만든 프레슬리의 초상이다. “그 어떤 사진보다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게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시각의 혁명 이명세 영화감독  듀안 마이클의 <사물의 기이함>(1973)


8인의 영화인이 공통으로 자주 거론하는 작가가 듀안 마이클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그를 선점한 이명세 감독이 듀안 마이클을 말한다. 복잡한 그림과 사진들이 섞여 있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의 콘티 중에도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어김없이 참조물로 등장한다. <앤디 워홀>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마치 베이컨이 자신의 자화상이나 이런저런 삼면화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인간 신체의 늘어짐을 생각나게 하는 사진이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거다. 거기에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듀안 마이클의 사진 중에는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 마그리트를 세워 찍은 사진들도 있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들, 꿈과 현실, 이 모든 것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보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사물의 기이함>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다. 처음에는 욕조의 미니어처처럼 보이지만, 연속사진으로 액자 속에 또 액자가 있는 걸 거듭 알게 되면서 과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액자 안의 무엇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듀안 마이클은 연속 사진을 통해 사진적 철학에 접근한 작가로 유명한데, 이명세 감독이 추천한 <사물의 기이함>은 그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례로 손꼽히고 있다.








 

풍경과 인물의 리얼리즘 이모개 촬영감독  요제프 쿠델카의 1979년작


“사람들은 그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느낀다.” 20년 전 사진동아리의 한 선배가 해준 말은 이모개 감독이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집을 펼쳐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사진들이 매우 세게 느껴졌다. 어떤 사진들은 세상에 없는 시간을 찍어낸 것 같더라. 예를 들면 마르케스 소설의 리얼리즘 같은 느낌이다. 한장의 사진 안에 수만 가지의 감정이 있는 듯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사진작가인 요제프 쿠델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뛰어들어 셔터를 누른 사진작가로 유명하지만 이모개 감독에게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집시들의 삶을 담아낸 사진들이었다. “드라마틱한 사진들은 아니지만, 오히려 느낌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좋다. 날것 그대로를 담아낸 듯한 사진들도 이면의 사연을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1979년 프랑스에서 촬영된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듯한 어느 커플의 모습이 담긴 사진. 감독 자신이 워낙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진작가의 존재감보다는 피사체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는 사진이기 때문. “개인적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영화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촬영자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풍경과 인물에 깊이 몰입하는 태도가 감동적이었다. 나 역시 그런 작업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을 얻고 싶다.” 














사진으로 사람과 소통하는 법 정정훈 촬영감독  낸 골딘의 <담배 연기가 자욱한 차>(1979)


<친절한 금자씨>를 준비하던 정정훈 촬영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집에서 낸 골딘의 사진집을 발견했다. 인물들이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진에서 정정훈 감독은 “촌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가 구도를 위해서 어느 자리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알맞은 각도를 위해서 움직인 것도 아니다. 낸 골딘은 그저 그 공간에서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찍은 것 같다.” 특히 책 표지에 나온 ‘세컨드 팁에서 화장을 고치는 C’라는 제목의 사진은 금자를 만든 중요한 모티브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금자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바로 이 사진에서 비롯된 장면이었다고. 정정훈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낸 골딘의 사진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차’란 제목의 사진이다. “역광으로 들어오는 빛이 강렬했다. 특별한 연출없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빛의 힘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담아낸 게 놀라웠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금자가 제니와 근식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비슷한 연출을 해보고 싶었다.” 정정훈 감독을 사로잡은 또 한장의 사진은 애인에게 맞아 얼굴에 멍이 든 채로 찍은 낸 골딘 자신의 셀프 포트레이트. “자신의 아픔을 쿨하게 보여준 사진이다. 영화나 사진이나 의사소통의 도구인 측면에서 공유하는 면이 많은데, 낸 골딘도 사진작가의 직함을 떠나 사진으로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숨은 이야기가 있는 풍경 류성희 미술감독  로버트 프랭크의 <Parade-Hoboken, New Jersey>(1955)


“영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로버트 프랭크는 다이앤 아버스와 함께 내 영화 작업에 영향을 준 최초의 사진작가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현대사진의 기수로 불리는 미국의 로버트 프랭크를 꼽는다. “로버트 프랭크는 결정적 장면을 포착해서 본질을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찍어내려던 그 이전의 보도사진들과 달리 연출이 아님에도 현상이나 사건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느낌이 있어 좋다. 성조기가 걸려 있는 이 사진도 보통의 작가라면 난리 법석인 행진 그 자체에 관심을 갖고 그 풍경에서 뭔가 구하려고 했을 텐데, 이 사람은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성조기가 그 사람들을 가리고 있는 이 장면을 찍었다. 위대하다고 치부되던 당시 미국사회의 시민이 실제로는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 국기에 가려진 얼굴들로 느끼게 한다. 우상화를 배제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시적이다. <살인의 추억>을 할 때 봉준호 감독이 참조하라고 준 건 신디 셔먼의 사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많이 생각했다. <살인의 추억>이 감독 개인의 입장에서 주변적인 시각을 모아 복합적인 요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 말한 그런 방식의 예술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군중성이나 공공성이 아닌 작은 것을 놓치지 않으며 원인을 찾아가는 로버트 프랭크의 작가적 태도는 창작자로서 바로 내가 닮고 싶은 태도다.”  








  


Posted by Alan-Shore :










본문의 글은 수잔 손택의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 (1964)>에 실린 에세이,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 Flaming Creatures (1963)> (국내 번역판의 명칭은 불타는 족속들이었지만 국내영화제 상영당시 사용된 황홀한 피조물들로 수정하였다.)에 관한 지지와 분석이다. 본문의 택스트와 하위에 첨가된 영상들은 어쩌면 누군가에겐 다소 선정적이고 불쾌한 경험이 될 수도 있음을 고지하는 바이다. * 배경음악은 상위 검은바를 이용 (미미시스터즈 - 우주여행)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 이 근접 촬영한 흐물흐물한 성기, 거대한 젖가슴, 자위행위, 그리고 구강성교 장면에 내가 유일하게 유감스러운 점은, 이런 장면들 때문에 이 걸출한 영화를 그냥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게 됐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변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입에 올린다거나 변호까지 한다고 해서, 내가 이 영화를 실제보다 덜 괴이하다거나 덜 충격적인 영화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건 아니다. 공식적으로 <황홀한 피조물들>은 여자 두명과 그보다 훨씬 많은 남자들이 중고품 할인점에서나 팔만한 현란한 색상의 여성복을 입은 채 시종일관 시시덕거리고 어울려 춤추면서, 온갖 방탕한 장면과 성적광분, 로맨스, 흡혈귀 짓을 보여주는 영화다. - 여기에 몇 곡의 라틴가요 (시보니, 아마폴라) 로큰롤, 긁히는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 연주, 투우음악, 몇명의 남자들이 여장을 한 채 등장했던 '하트모양 립스틱' 이라는 기이한 신제품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중국노래, 떨리는 고성으로 이뤄진 합창곡, 가슴 큰 어느 여자를 집단 강간하는 장면이 유쾌하게 집단 성교로 바뀌는 장면에서 나온 비명소리등이 반주로 곁들여 진다. 

간단히 말해서 <황홀한 피조물들>은 괴이하며, 또 그럴 작정으로 만든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바로 그런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공교롭게도 <황홀한 피조물들>은 포르노가 아니다. 성적흥분을 일으키려는 명백한 의도와 내용을 지닌 장르를 포르노라고 정의한다면, 이 영화의 나체 장면이나 (직접적인 성교가 두드러지게 생략된) 온갖 성적장면의 묘사는 너무나 비애감에 차있으며, 너무나 천진난만해 음란하다고 보기 힘들다. 스미스의 성교 이미지는 감상적이거나 음탕하다기 보다는 어린아이 같고 재기발랄하다. 




<황홀한 피조물들>에 대해서 경찰 당국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않다. 스미스의 영화가 법정에서 목숨을걸고 싸워야만 하리라는 것도, 슬프긴 하지만 불가피한 현실일 것이다. 실망스러운 점은 성숙한 지식인과 예술가의 공동체가 이 영화에 대해 무관심이거나 신경질적 반응, 혹은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다는 점이다. 거의 유일한 지지자는 충직한 영화감독 동아리와 시인들, 그리고 젊은 '빌리지 사람들' 뿐이었다. <황홀한 피조물들> 은 아직 일종의 컬트, <영화문화>라는 잡지를 근간으로 하는 뉴 아메리카 시네마 그룹의 입상작 수준을 졸업하지 못했다. 


우리는 스미스의 영화를 비롯해 여타 수많은 새로운 작품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 거의 혼자 힘으로 꿋꿋이 영웅적으로 작업해온 조나스 메카스에게 감사해야하리라. 그렇지만, 메카스와 그의 동료들의 선언이 과장되고 때로는 실질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황홀한 피조물들>을 포함한 이 새로운 유파의 영화가 영화사상 전례없는 발전이 될 것이라는 메카스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 호전적인 태도는 <황홀한 피조물들>의 미덕을 이해하는데 불필요한 장애로 작용해 오히려 스미스에게 해가된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어느 특정한 전통, 즉 충격적인 시적 영화의 작지만 소중한 결실인 것이다. 이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브뉘엘의 <안달루시안의 개> 와 <황금시대>, 에이젠슈타인의 <파업> 일부, 토드 브라우닝의 <별종들> , 장루쉬의 <미친 지도자들> 프랑주의 <짐승의 피> 레니카의 <미로> 케니스 앵거의 작품들 <불꽃> <살아난 전갈> 노엘 뷔르쉬의 <사제수업> 등이 있다. 


미국의 초기 아방가르드 감독들 (마야 데렌, 제임스 브러튼, 캐니스 앵거)은 상당히 치밀한 기법을 연구한 단편영화로 돌아섰다. 아주 저예산으로 작업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이 만든 영화의 색체와 카메라 촬영술, 연기, 이미지와 음향 합성은 전문적 기량을 최대한으로 살린 것이었다. 미국 영화계에 등장한 두가지의 새로운 아방가르드 스타일 가운데 하나 (그레고리 마코폴로스나 스텐 브래키지 보다는 잭 스미스나 론 라이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는 고의적으로 조잡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새로운 조류들 - 수작과 졸작, 태작 모두 - 은 부아가 치밀 정도로 영화기법의 모든 요소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투박함을 보여준다. 이는 매우 현대적인, 매우 미국적인 태도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미국만큼 구태의연한 유럽적 낭만주의가 긴 수명을 유지하는 곳도 없다. 깔끔하고 꼼꼼한 기법이 즉흥성과 진실성, 직접성을 방해한다는 믿음은 다른 어느 곳보다 미국에서 강력하게 살아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일반적인 기법이 대부분 이 신념을 표명하고 있다. (기법에 반대하는 것조차 기법이 필요하다) 


음악의 경우, 이제는 우연성을 활용한 작곡뿐만 아니라 연주도 행해지고 있으며, 새로운 음의 재료를 찾고 기존의 악기들을 절단하는 식의 새로운 방법까지 등장했다. 회화와 조각의 경우에는 일회용품이나 기존의 잡동사니들을 재료로 이용하는 방법, 일부러 부서지기 쉬운 작품 (한번 쓰고 버리기) 을 만드는 방법, '해프닝' 같은 방법이 있다. 나름대로 <황홀한 피조물들>도 일관성과 기술적 완성도라는 예술작품을 둘러싼 속물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캠프적인 미학을 응축하고 있는 이 전무후무한 이단적인 작품은 도착적이며 비순응적인 정의불가능한 성의 주체들의 사육제를 극화하며, 저속하면서도 또한 극한적으로 숭고한 그러나 표면만이 존재하는 실낙원의 인물들을 재연한다. 아마 모든 캠프적 영화들은, 요컨대 <핑크 플라멩고>에서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까지, <황홀한 피조물들>에 진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황홀한 피조물들>의 (내가 세어본 바에 의하면) 일곱 시퀀스는 서로 확연히 구분될 분만 아니라 이야기도, 줄거리도, 마땅한 순서도 없다. 일련의 대목에서는 정말로 과도한 노출을 의도한 것이 아닌가 의심도 하게 된다. 그 어떤 장면도 그보다 더 길거나 짧지 않은 바로 그 길이로 만들어야 했다는 이유를 납득시켜주지 못한다. 쇼트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맞춰지지 않았다. 머리 부분이 잘려 나온다거나 아무 연관 없는 인물들이 장면 끝머리에 불쑥 등장하는 식이다. 카메라는 대부분 손으로 들고 찍었고, 영상이 자주 떨린다. (이런 방법이 완전히 효과를 거둔,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의도된 부분은 집단 성교를 찍은 장면이다)

그러나 <황홀한 피조물들>이 보여주는 아마추어적인 기법은, 최근의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보는 이를 짜증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스미스가 시각적으로 감칠맛 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매순간 볼거리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 영상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즐거운 전율과 아름다움이 있다. 강력한 영상이 쓸모있는 영상 때문에 그 효과가 떨어지는 순간에 조차, 혹은 좀더 다듬어 졌더라면 더 좋았을 장면에서 조차 그렇다. 

오늘날에는 기교에 대한 무관심이 휑뎅그렁함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신중한 계획에 반감을 드러내는 현대예술은 흔히 미학적 금욕주의의 형태를 띄는 것이다. (추상표현 주의 회화들이 대부분 이런 금욕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황홀한 피조물들>의 금욕주의는 이와는 다르다. 다시말해, 이 작품에는 시각적 소재가 흘러넘친다는 뜻이다. <황홀한 피조물들>에는 생각이나 상징도, 무언가에 대한 논평이나 비판도 없다. 스미스의 영화는 순전히 감각에 바치는 향응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프랑스의 수많은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문학적' 영화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황홀한 피조물들>을 보는 즐거움은 우리가 보고 있는것을 이해한다거나 해석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상 그 자체의 직접성과 강력함, 양적인 풍성함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진지한 현대예술과 달리, 이 작품은 좌절된 의식, 막다른 궁지에 몰린 자아를 다루지 않는다. 이렇듯 스미스의 조잡한 기교는 <황홀한 피조물들>에 구현된 감성 - 생각을 부인하는 감성, 부정 너머에 자리잡은 감성- 에 멋지게 이바지 한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현대에 보기드문 예술작품이다. 이 영화는 기쁨과 천진난만함을 다룬다. 분명히, 이 기쁨, 이 천진 난만함은 (보통 기준으로 볼때) 뒤틀리고 퇴폐적이며, 아무리 못해도 대단히 연극적이고 인위적인 주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이 때문에 이 영화가 아름다움과 현대성을 얻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오늘날의 한 장르, 즉 '팝아트'라는 경박한 이름으로 통하는 장르의 훌륭한 견본이 되는 작품이다. 스미스의 영화는 팝아트의 쾌활함과 꾸밈없는 천진함, 교훈주의에서 벗어난 활력 넘치는 자유도 있다. 팝아트 운동이 지닌 한가지 위대한 미덕은 뭔가 주제에 대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낡은 규범을 후려갈기는 방식에 있다. (말할것도 없이 세상에는 입장을 취해야만하는 일련의 사안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건 아니다. 그런 사안을 다룬 예술작품의 극단적인 사례가 <대리인>일 것이다. 내말은, 인생에는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는 요소들, 특히 성적 쾌락같은 요소들도 있다는 뜻이다)


팝아트라고 불리는 작품들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작품들은 예술에서 묘사된 것 -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인생에서 경험한 것- 에 반드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낡은 사명을 내던지겠다는 의도를 실천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체제순응주의의 또다른 징후, 대중문화의 가공물에 환호하는 일종의 열병 현상이라며 팝아트를 도외시하는 자들의 생각이 어리석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팝아트는 이전 같으면 모순으로 여겨졌을 멋지고도 새로운 요소가 뒤섞인 행동양식을 받아들인다. 이렇듯 <황홀한 피조물들>은 성교를 재기 발랄하게 조종할 뿐만 아니라 성적 충동을 과장되게 그리고 있다. 시각적인 면만 보더라도 이 영화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 장면들, 가령 늘씬하고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앙상하고 털투성이의 사람들이 뒹굴고 춤추고 성교하는 무질서한 장면들 중간 중간에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시각효과 (레이스 달린 옷가지,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잎, 활인화)가 삽입되는 식이다. 


스미스의 영화는 복장도착증의 시학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라고 도 볼 수 있다. <황홀한 피조물들>에 제 5회 독립영화상을 수여한 <영화문화>는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변태들에 대한 값싼 동정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복장 도착증 환자들의 영광과 화려함, 요정나라의 마술로 우리를 강타했다. 그는 우리 삶의 한구석에 불을 밝혀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멸시하는 구석이긴 하지만"



<황홀한 피조물들>은 알고보면 동성애보다는 이성애를 다룬 영화다. 스미스의 통찰은 자신이 그린 천국과 지옥의 그림에서 몸부림치는 인물, 파렴치한 인물 등을 독창적으로 묘사해낸 보슈의 통찰과 비슷하다. 동성애적 사랑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그린 앵거의 진지하고 감동적인 영화 <불꽃> 이나 주네의 <사랑의 찬가>와는 달리, 스미스의 등장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가 여자고 누가 남자인지 쉽사리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성애의 다종다양한 쾌락 속에서 불타오르는 '피조물'들이다. 이 영화는 모호함과 다의성의 복잡한 거미줄로 엮어낸 작품이며, 그 으뜸 이미지는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분간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장면이다. 흔들리는 젖가슴과 흔들리는 성기를 바꾼다한들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보슈는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남녀양성 소유자와 나체를 배경 삼아, 자신만의 기이하고 불완전한 관념적 형상을 구축해냈다. 스미스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배경 대신에 (인물이 실내에 있는지 야외에 있는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의상과 몸짓, 음악 같이 철저하게 인공적인 경관이 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양성성의 신화가 진부한 음악, 광고, 의상, 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촌스러운 영화들에서 끌어온 한 다발의 환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스미스는 '캠프'에 관한 지식을 풍부히 콜라주해 <황홀한 피조물들>을 촘촘히 짜놓았다. 흰색옷을 입은 채 머리에 백합을 한송이 꼿고 고개를 수그린 여인 (여장남자)이 있고, 관에서 나온 말라빠진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나중에 흡혈귀임이, 그리고 끝에 가서는 남자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검은 레이스가 달린 만털라를 두른 채 부채를 들고 스페인 풍의 춤을 추는 커다란 검은 눈의 무희(이 사람도 복장도착증 환자다)  


  
<아라비아의 족장>이라는 그림에서 따온 두건 달린 외투를 입은 채 비스듬히 기대누운 남자들과 무신경하게 한쪽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아리비아의 여부, 슈테른베르크가 1939년대 초반에 디트리히와 함게 찍었던 영화들의 밀도 높고 복잡한 구성을 연상시키는 꽃과 엉마에 기대 누운 두 여인의 장면등이 있다. 스미스는 라파엘 전파의 나름함, 아르누보, 1920 대의 이국적 스타일, 스페인과 아랍의 분위기, 대중문화를 즐기는 현대의 '캠프'기법에서 끌어온 표현 형식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와 구성을 만들어낸다. 



<황홀한 피조물들>은 세계를 심미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런 통찰력은 십중 팔구 양성성을 근저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예술은 아직껏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황홀한 피조물들>이 움직이는 영역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비평가들이 예술의 자리로 지정해 왔던 도덕관념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에게는 도덕의 영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잣대로 보자면 <황홀한 피조물들>은 정말로 형편없는 영화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심미적 영역, 쾌락적 영역도 있다. 여기가 바로 스미스의 영화가 움직이며 그 생명을 누리는 곳이다. 

 - the end 수잔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中 -












잭 스미스

캠프 영화의 고전이자 금지된 걸작으로 영화 애호가들의 소문 속에 회자되던 <황홀한 피조물들>의 감독, 잭 스미스는 그의 작품 하나 만으로도 미국 아방가르드 특히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유럽의 감독들(예를 들어 페데리코 펠리니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장-뤽 고다르, 아그네스 바르다 등)은 벨기에와 뉴욕을 방문하였고 그의 팬이었던 앤디 워홀이 자신의 팩토리를 통해 영화 작업에 뛰어들었던 것 역시 유명한 일화이다. 분명 잭 스미스의 영화들은 부박하고 화려한 캠프적인 취미에 흠뻑 빠진 채 어떤 윤리적 명령의 강요도 영향을 미치는 순진무구한 관능과 열정 사이로 유영하는 현대 영화의 괴물들이다. 잭 스미스는 그 스스로 공공연한 게이였으며 자신의 영화에서 당시의 하위문화로부터 비롯된 게이 정체성, 특히 드랙 퀸과 이성복장착용자들, 성전환자들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재현한 인물들에 대한 그 스스로의 정의였으며 그의 작품 제목에 빈번히 등장하기도 하는 '피조물(creatures)'은 매우 시사적이다. 느와르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디즘적인 범죄자나 팜므 파탈이 동성애 정체성의 은유로 전유되었거나 아니면 공포 영화에서 괴물의 이미지를 통해 배제된 자, 비천한 존재로서 자신을 재현했던 동성애자들과 유사하게 잭 스미스 역시 자신의 불법적인 섹슈얼리티를 기괴한 모습의 인물들을 통해 표상한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에서의 비극적이면서도 모호한 존재인 범죄자, 요부, 괴물들과 달리 잭 스미스는 매우 유쾌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이들의 삶을 일종의 문화적 인공물로 가정한다. 즉 잭 스미스는 우리 모두의 삶을 장식과 수사, 색채와 양식화된 몸짓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간주한다. 잭 스미스는 영화 감독일 뿐 아니라 다른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들의 배우로서, 사진작가, 연극 연출자, 디제이, 열정적인 의류 수집가, 비평가이기도 하였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현재 잔존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복원이 완료된 <황홀한 피조물>을 비롯한 5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 2003년 쾌락의 셀룰로이드 궁전 프로그램 당시 감독 설명 -

 












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수 많은 책들을 넘겨본다. 그곳에는 걸작의 가치에 대한 찬사가 있을 수 있으며, 때때론 시대사적 해프닝들의 단편적 제시와 빛바랜 논란의 역동들이 담겨있기도 하다. 허나 드넓은 스펙트럼의 그물망에도 잡히지 않는 비사들도 존재한다. 특히 세계영화사를 한글로만 읽어내려 간다면 만나보기 힘든 이름들도 존재하고있다. <아라이아 로렌스>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던 해, 고다르는 <경멸>을 구로자와 아키라는 <천국과 지옥>을 펠리니는 <8 1/2>을 김기영은 <고려장>을 세상에 내놓은 해. 영화의 타이틀이 사서에 오르는 순간에는 항상 탄생년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흐름을 읽어 내려가며 영향과 가치를 분석할때 가장 명확하고 편의적인 방법은 시대사적인, 년도분류에 따른 구분일 것이다. 1963. 이들을 묶는 하나의 공통어, 네자리 숫자의 그림자속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과거의 용암, 실험영화의 어느 지점인 동시 수 많은 논란을 낳은 문제작. 잭 스미스 감독의 <황홀한 피조물들>에 대한 에세이를 위에 소개해봤다. 세가지 연유에서 옮겨봤다. 첫째론 수잔 손택에 대한 탄복이지만, 이는 본 포스팅에 있어 발단이나 동기 정도의 단서이니 다음 기회에 더욱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남겨두도록 하고, 두번째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토록 소중한 영감의 원천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혹은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에 대한 역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반세기전의 특수한 영화운동의 흐름과 시효만료의 논란만이 <황홀한 피조물들>의 유일한 존재가치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는 지나치게 틀에 얽매인 심심한 사조놀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2011년에 와 이 작품을 지지하고 언급하는 일이 비상식적이고 퇴폐적인 컨셉에대한 치기어리고 무조건적인 지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것이다. 물론 시초에 대한 예우도 아니다. 일반의 시야에서 극단적 예술의 영역으로 치부되며 장외로 밀려나버린 본 형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반세기를 건너서도 유효한 특수해석의 가치를 유지하게 됐다는대에서 <황홀한 피조물들>에 대한 수잔 손택의 지지와 미인지자들에 대한 경각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현재는 물론이고 50여년 전 <황홀한 피조물들>이 등장했을 당시에도 본 작품의 가치는 평상의 해석적 시각으로 재단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익스페리멘탈 / 언더그라운드 무비로 분류되는 본 작품의 해석은 심미적이고 직관적인 탐색을 통해 이뤄져야 할것이며,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아온 이런류들의 자유롭고 쾌락적인 세계관은 흡사 미술관에서 경험해온 현대미술의 수용방식과 비슷한 형태로라도 받아들이며 그 가치와 존재이유를 논의하고 공유해야 할것이다.      

컬트무비에 대한 매혹과 열광도 끌어와본다. 특이취향의 과도유입과 특수팬덤을 노린 기획적 허술함들로 설명되는 현대영화의 돌연변이들, 그들이 치장한 마이너한 분위기에선 찾아보기 힘든 유영하는 자유로움들을 이전의 중단편 실험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본 작품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는 크리스 마르케의 1962년작 <활주로>역시 영감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과거의 신품이라 생각한다. 그야말로 소수에게 회자되는 기념비적인 컬트무비의 조건은 어쩌면 이들에게 더 유리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파괴가 작품의 입장을 더디게 하지만, 장르와 매체를 초월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들을 대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창의적인 영감의 긍정적 원천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 연유는 통제와 닳아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이었다. 멀리갈것 없이 <황홀한 피조물들>의 감상 전후로 경험한 <악마를 보았다>의 검열과 <블랙 스완>의 충격요법에 대한 개인적 의문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1963년 영화가 공개되었을 당시 작품의 표현수위는 충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인한 사회적 파장도 엄청나 본 작품을 지지한 어느 누군가는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반세기전의 빛바랜 해프닝을 듣다가 문득 두가지 갈래로 의문이 생겼다. 폭력과 성에 관한 표현수위. 이전에 7인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실험영화 <제한해제>를 다루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적이있다. 나체의 전시와 상식에 어긋난 성교로 점철된 필름이라고 해서 포르노취급을 당해야 하는가? 김지운과 이병헌의 메인스트림의 폭을 넓힌 과감한 시도가 어째서 1,2 초 차이로 제한상영과 청소년관람불가 사이를 오가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페이드 아웃과 함께 과거장면 하나를 인서트 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박찬욱 감독이 2002년 <죽어도 좋아> 제한상영가 판정당시 올렸던 격문이다.




그뒤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그 영화 얘기를 해댔습니다. 기자들을 만나면 빨리 감독 인터뷰 잡으라고 충고했고 감독들을 만나면 우리 반성하자고 촉구했으며, 민간인을 만나면 “기다려라, 죽이는 영화가 너희 곁을 찾아갈 것이니. 한국영화, 이제 장난 아니니라”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번 판정으로 저, 완전히 바보됐습니다.


구강 아니라 비강으로 한들 뭐가 대숩니까, 아래로 들어가면 정상이고 위로 들어가면 변태입니까? 국가가 체위도 정해주나요? 남성기가 크게 잡혀서 안 된다고요? 중요한 건 어느 신체기관이 찍혀 있느냐가 아니잖습니까. 영화가 무슨 축군가요? ‘핸들링’처럼 ‘페니슬링’하면 반칙인가 보죠? 그럼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해놓은 미술사의 숱한 걸작들은 다 뭡니까. 그리고, 성교를 가짜로 했든 진짜로 했든 그런 게 왜 문제죠? 가짜로 하는 영화들일수록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나요? 예를 들어 너무 실감나게 연기해서 꼭 진짜 같아 보이는 어떤 에로틱한 영화가 있다고 칩시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배우들을 불러 실제 삽입 여부를 조사 확인한 다음, “삽입이면 제한이요, 불입이면 십팔이라…”, 이러실 건가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기들 좋아서 진짜로 성교하는 장면과 아무 애정도 없는 배우들이 억지로 성교하는 척만 하는 장면 중에 어느 쪽이 보기에 아름다운가요? 그 장면에서 심의위원 여러분은 정말 성적 수치심을 느끼셨나요, 아니면 ‘나는 아니지만 우리 국민은 그럴 거야’라고 생각하셨나요. 전자면 과민이요, 후자면 오만이라….


제 생각에는 여러분이 뭔가를 심판하려는 자세로 영화를 봐서 그런 착각이 생겼지 않았나 싶군요. 그냥 편한 마음이었다면 여러분도 아마 저희 부부처럼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우는 희한한 경험을 하셨을 텐데, 참 안 됐네요.

 


<황홀한 피조물들>과 <악마를 보았다>의 연계를 상상하며 내가 언급하고자하는 바는 논리적인 반박이나 시스템에 대한 모순지적이 아니다. 음악부터 영화까지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 현 체계에 대해 놀라움을 표할뿐이다. 수잔 손택의 글을 옮기게 된 몇몇가지 연상중 하나이기에 언급하며 문제제기할뿐 도저히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다. <숏버스>와 <악마를 보았다>를 향한 몰상식하고 박한 대우들. 과연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것이 맞을까. <블랙스완>에 대한 고민은 충격과 표현이 점점 닳아져갈 몇몇 장르영화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심리스릴러 한편을 본 후 <황홀한 피조물들>의 해프닝을 듣고나니, 대런의 강박적 걸작이 몇십년 후에 받을 평가에 있어 연출장치에 대한 둔화가 걱정되어 살짝 고민했던건데, 얼마전 시네마테크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시스터즈>을 보면서, 예상가능하고 고립타분한 순간을 영화적 고민을 통해 놀랍고도 지속가능한 충돌로 변환시키는 모습을 보며 한시름 걱정을 덜어놓긴 했다. 케익살해씬은 관객을 엄습하는 독특한 힘이 존재한다.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다. 

말이 길어졌지만, 결론은 이거다. 잭 스미스의 <황홀한 피조물들>은 보다 더 많이 언급되어야 하며, 수잔 손택의 글들은 보다 더 많이 읽혀야 한다는 것. 어쩌면 괴상한 40여분의 영상물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영화적 고민을 파생시켜준 독특한 경험이었기에 애정과 존경을 아끼고 싶지 않다. 








Posted by Alan-Shore :

더 웨이 (The way)

2012. 2. 18. 01:12 from Cinema/Mine












울수 있다는건 참 감사한 일이다. 제서야 슬그머니 어른이 되어감을 공감하게되는 요즘, 불시착의 공허함과 숙명적 불안 사이에서 가끔이나마 눈물흘릴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누군가 나를 바라볼때 비생산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하다 여길 수 있는 너무나 잦은 습관들. 영화와 술. 언어와 공상만으론 풀리지않을 현실의 고립타분한 매듭에, 안으로든 밖으로든 어느 방향이건 울음을 끌어내 다소간이나마 찰나의 일탈과 황홀한 느슨함을 경험토록 해주는 이들과의 만남이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욱 잦아지고 점점 진솔해져 가는것 같다. 운다. 운다는 것. 영화를 사랑하는 첫번째 이유를 요즘에서야 찾게된것 같다. 특히 어젯밤 나와 만나게된 이 작품은 내 마음속에 마르지 않을 추억과 인생살이의 근원적 원동력이란 이름으로 비처럼 흘러내려 평생을 고여있길 바라기에 이곳에 속삭이고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도 싶었다. 


사실 이 작품을 감상하며 간간한 맛의 눈물을 많이 흘린건 아니였다. 허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론 우리네 광활한 감정폭을 온전히 묘사해낼 순 없다고 믿는 이중의 하나로서 어젯밤의 나는, 마음속으로 또한 생각과 다짐의 어느 계곡속으로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 보냈다고 믿고싶으며 그 점에 대해 굉장한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안으로 운다는건 지나치게 개인적인 표현일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감상과 경험에 있어 감동과 자극의 반응을 눈물로서 표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단순히 물방울의 흐름정도로 간단히 설명하기는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극장을 나서고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바라볼때 비록 눈시울은 촉촉할 뿐이지만 지나간 인생살이와 머나먼 가능성을 향해 장마빗마냥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후회와 시기란 이름의 눈물들은 도구적 신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생각과 행동들을 정화시켜 준다. 그 시립고 애틋한 몽롱함을 느낄때면 나는 안으로 울었노라... 라며 숨막히는 일상의 강박대기를 참아낼 활력과 위안을 얻는다.  



티나지 않을 흐느낌을 한참 토해내고 나면 해당 작품들의 중심에는 후회와 시기의 동경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The way> 는 이 두가지 감정선을 가지런히 엮어 나의 눈과 귀 속으로 화사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실 자신의 경험을 명확히 전달할만한 약간의 감상과 최소한의 정보전달만으로 영화에 대한 추천사로서 충분함을 절감하는 나 이지만 오늘 만큼은 이쁘고 온전한 형태의 기록으로서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어졌다. 인간이 맞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중 하나인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서글픈 부모의 시선으로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최악의 비극을 통탄의 신파가 아닌 삶의 과정, 화합의 도구로서 넘겨내는 <The way>의 사정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겠다.




넉넉한 안과의사이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공허한 아버지이기도 한 탐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업무와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날 프랑스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아들인 대니얼이 어젯밤 사망했다는 소식. 소중한 이들을 몇번이고 떠나보낸 그이지만 핸드폰 하나 지니지 않은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예상치 못한 절망으로서 다가오게 된다. 아들의 시신을 데려오기 위해 곧장 프랑스로 향하게된 탐은 싸늘한 아들에게 다가가는 시간,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후 유품을 매만지는 시간, 그 잔인한 진공의 시간속에서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자유와 깨달음을 위해 그간 쌓아온 모든것을 뒤로한 채 여행길에 올랐던 대니얼의 뒷모습에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들과 겪게된 사소한 마찰, 그리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속마음. 죄스럽고 의아한 마음들은 그의 어깨에 아들의 가방을 둥여매게 만든다. 현지에서 대니얼을 화장시킨 탐은 가방속에 대니얼의 흔적을 간직한채 자신의 아들이 끝까지 밟아보려 했던 산티아고의 기나긴 순례길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중간 중간 대니얼의 흔적들을 순례길 이곳 저곳에 흩뿌리며 부자는 800km 의 대여정을 함께한다.  


생각해보면 영화를 아무리 많이보아도 눈이 매서워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The way>를 내 생의 영화로 당당히 들어올리는 이 과정에서도 완성도의 견고함에 대해선 보증을 설 수 없을것 같다. 어찌보면 상투적이고 보수적인 작품이란 생각마저 할 수도 있겠다. 이순을 훌쩍넘긴 노년의 자기반성과 화해의 여정.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야기와 인물들. 마치 산티아고의 순례길 곳곳에 대형 스피커들을 박아놓은듯이 끈질기게 흘러나오는 일생살이의 배경음들까지, 로드무비의 과욕과 가족을 바라보는 감독의 평이한 시선은 <The way>를 평작으로 끌어내렸다. 매체지향층의 공통적인 사회관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더 많은 영화인들이 가족을 그림에 있어서 대안을 이야기하며 전복적인 사고를 꾀하고있다. 물론 장르적 관습으로서의 뻣뻣한 가족관 묘사에는 반기를 드는 편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담아내고있는 비슷한 틀속의 나태한 가족관은 되려 클리쉐의 이름을 넘어 환상동화를 읽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The way> 가 부자간의 이해와 화합을 다루는 가족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The way> 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대니얼이란 인생의 회전문을 만난 탐의 다리저린 성장통이었다. 


세상의 모든 로드무비는 곧 성장영화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펼쳐진다. 일탈을 통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보고있자면 클리쉐의 적극적인 활용이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다. 일탈과 여행이란 단어를 바라본다. 인간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듣고 읽고있지만 저 단어들에 바라는 기대치는 독특한 목적성이 존재하리라 믿고 있다. 사랑과 함께 우리가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용감한 순간들. 항상 갈구하게되는 저 행위들의 순간들은 그 자체로서 환상이자 그것은 곧 한차원을 뛰어넘어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 구역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인류가 일상에선 겪기힘든 예외의 순간들. 그곳에는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지피는 비슷한 굴곡과 비슷의 향기의 길들이 존재한다. <The way> 는 일탈과 성장의 평범한 환상들을 여행자들의 상상로를 따라 펼쳐낸다. 산티아고의 기나긴 순례길.       


 
전체적인 분위기와 태도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결정적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 남몰래 숨겨놓은 열망과 컴플렉스를 부추기고 위로해줄 만한 순간순간의 요소들이 필요하다. 극 초반 탐은 아들을 공항까지 바래다주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내 인생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내가 택한 인생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대니얼의 대답은 이 영화의 주제인 동시에 영화전반의 여정을 설득시켜주는 중요한 이야기다. '인생은 택하는게 아니에요, 아버지. 살아내는 거지' You don't choose a life, you live one. 일년전쯤 <시> 의 미자와 그녀를 그려낸 이창동 감독을 바라보며 나와 영화 사이가 친구이자 사제지간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 그것과 맞닿은 맥락에서 나는 탐과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감독에게 삶의 태도에 대한 긍정적인 가르침을 얻었다. 명확히 밝힐순 없지만 앞으로의 30여년을 살아낼 근원이자 그 이후의 삶과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에 관한 소중한 지표가 될것이다. 역시 운명에는 상황의 연이 필요한것 같다. 짧은 호흡이었지만 30여일간을 테두리 밖으로 나서며 새로운 땅을 걷고 새로운 곳의 공기를 마시는 일의 가치를 체감한 요즘, 어느 고집스런 노인의 하나하나의 발자욱들이 선명히 가슴속에 자국을 내는듯 하다. 


또하나의 사랑스런 습관은 탐이 기나긴 여정속에서 만나게된 세 여행자들의 존재와 그들끼리 나누는 마법같은 순간의 눈빛이다. 각기다른 국적과 각기다른 목적으로 산티아고에 오른 네명의 동반길은 그들 생의 딱 한번만 존재하는 황홀한 조합이자 마법같이 멈춰진 시간으로서 평생 그들의 기억속에서 머물것이다. 어찌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로망일 수 있겠지만 요즘의 상황에서는 이들의 옅지만 운명적인 우정에 짠한 동경이 남는다.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으로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할 낭만적인 그림이다. 요즘들어 우리네 만성적 불안에 공포와 혐오를 느끼고 있다. 점점 나이가 들 수록 한정적인 범위로 집중되어가는 인간관계에서 미묘한 고독을 느끼게 된다. 얼마전 기이한 경험을 했다. 몇년을 알고 지내온 이들과 함께한 자리, 너무나 당연하게 한가지 이야기에 목을 메고있는 기괴한 커뮤니케이션. 취직과 합격역시 분명히 생의 중요한 과업이지만, 서로의 불안감을 안정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무의미한 위로를 이끌어내는 못생긴 화법에 주변 모든것들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우리가 살아내는 이 사회의 환경속에선 자연스럽게 끌어내기 힘든 저들의 일탈적인 생의 대화와 화합은 역시나 운명적인 궤를 함께하며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나는 <The way> 가 참 좋다. 이게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종합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것 같다. 지나치게 작품성에 대해 딱딱한 시선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한번쯤 좋은 경험으로서 동반해볼만한 여정이 아닐까 싶다. 시기적으로도 참 적절할때 만났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될것 같다. 영화를 관심있게 지켜본지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그 이유에 대해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가 가능한 때가 온것같아 더욱 기분이 좋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배우의 부족한 자질과 역량을 지적할 순 있어도 그들의 연기가 훌륭할 경우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없는것 같다. 평범한 관객의 형언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들은 진지했으며 또한 열정적으로 불탔으니. 참고적으로 영화관람의 독특한 재미가 될것같아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마틴쉰의 아들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본 작품의 연출과 아들역인 대니얼을 함께 맡았다. 이런 지극히도 사적인 관계를 알고보면 그들의 연기사이에 흐르는 독특한 기류 역시 추가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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