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감상의 가치는 충분한 영화다. 누구나 한번쯤 감상해볼만한 작품이며, 존재가치나 영화적 완성도에 있어 분명 존중받아야할 영화라 생각한다. 작품에 대한 호의를 분명히 밝힌 상태에서 한가지 치명적 아쉬움을 짚고 넘어가야 겠다. 전작인 <부러진 화살>을 보지 못해서 정지영 감독의 스타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본 작품에서 취한 연출적 의도를 정확히 분간해내긴 힘들겠으나 감독의 의지나 방향성과는 별도로 주요 지점에서 감정선의 맥을 끊고 몰입을 저해하는 듯한 상투적인 연출의 배치는 아쉬운 실수 내지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


한정된 공간안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진행하는 구조를 기준삼아 평하자면 그렇게까지 훌륭한 각본은 아니었으나 시나리오 상의 감독이 구축한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로서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인 배우들의 환영은 '이야기'의 초점을 온전히 육체와 기억으로 고정시켜주며 그러한 단점을 망각토록 유도해준다. 역사의 무게와 배우들의 열연은 결국 <남영동 1985>를 나쁘지 않은 영화로 기억하게 할 것이다.

 

시선의 고정과 영혼을 바친듯한 연기의 나열로 인해 주제적 목표와 영화적 재미는 기준치 이상으로 충분히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낡은 상투성이 목에 걸린 가시마냥 자꾸 신경 쓰인다. 물리적 압박에 숨통이 막혔던 관객들에게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면서, 폭력성에 마비됐던 이성이 그간의 경험적 조각들을 모아 스스로에게 이야기의 가치를 형성하고 의미를 완성시킬 '순간'에 와서 설득력없는 식상함으로 안일하게 대처한게 아닌가싶다. 정말로 주요한 내면의 묘사나 갈등의 순간들을 대처함에 있어 매끄럽게 선을 잇지 못한것 같다.  


러닝타임의 절대 비중을 따져보면 미미한 순간들이긴 해도 이런 투박하고 아쉬운 연결로 인해 '남영동 1985'를 올해의 영화로 꼽지 못할것 같다. 극의 절반을 경과할때쯤 난 확신했었다. 근 2,3년간 본 한국영화 중 <황해> <부당거래> 이후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될것 같다고. 결정적 상투성과 미적지근한 현재 시점의 묘사로 인해 이 영화는 그냥 2012년 한국영화의 어느 한 순간 정도로 기억될 것 같다. 지옥과도 같은 22일에 대한 묘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깨를 짓누르고 신경에 바람을 불어넣는 듯한 강렬함을 느끼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허나 노감독의 고정관념일지, 주제에 대한 강박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먼지쌓인 시선과 불필요한 부연설명의 존재는 소제의 온도를 오롯이 장르로 연장시킨 차가움도, 뚜렷한 주제 전달을 위한 악몽과도 같은 드라마의 뜨거운 열변도 당당히 독립시키지 못한채 어중간히 섞여버린 인상이다. <남영동 1985>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만한 흠은 아니지만 분명 영화적 포만감엔 아쉬움이 남는 틈이라 할 수 있다. 


<남영동 1985> 의 가치는 배우와 그 연기력이 집중적으로 파고든 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중점적으로 응시하고 있는 '고문'이란 행위를 표현함에 있어 특별한 영화적 장치를 활용하진 않고 있다. 대부분이 무기력하게 바라보도록 꾸며져 있다.  특정 장르영화의 팬이라면 세포하나 미동하지 않을 수위지만, 체감 수위는 예상외로 높은 편이다. 역시 중요한건 표현을 담는 그릇인것 같다. 고작 5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닿을 수 있는 근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이기에,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선 정신적 자극이 박원상의 수난을 보다 지독하고 자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것같다. 막연하게 귓동냥으로 들어온 독재의 그림자 속으로 온전히 몸을 내던지는 경험의 가치는, 언제나 과거사 문제에 안일하게 뭉뚱그려온 우리네 현실을 향해 던지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였다.

영화가 공개된 시기 때문에 이 작품의 정치적 의도에 대한 외부적 힐난이 존재할 것이다. 개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진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인권과 경각에 대한 범위 안에서 순수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한 작품이다. 선동으로 치부하고 감상도 하기 전에 낙인을 찍어 존재를 부정하기엔 너무도 잔악한 역사였고 충분히 곱씹어볼만한 부끄러움 이었다. 정견을 가지고 흑백논리로 득과 실을 논하기엔 너무나 심한 과정이었다. 정치를 마치 패션처럼 전시하며 극단적인 배타성을 띄는 몇몇 젊은이들에게도 단지 '인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 각본만 가져가서 다른 감독이 연출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인터뷰를 읽어보니 감독과 배우들간의 신뢰가 없었다면 완성되기 힘든 영화였던것 같다. '왕년의 스타감독'이 쏟아내는 푸념과 한탄의 다큐 <영화판> 을 통해 오늘날 노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대한 고민을 내던졌던데, <남영동 1985> 는 그에대한 충분한 자답이 됐을것 같다.


2004년으로 넘어가는 시점부터 엔딩 크레딧을 메우고 있는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까지 전부 들어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후일담을 꾸미더라도 <타인의 삶> 같은 완결성이 아니라면 이전의 메시지와 감각을 둔화시킬 뿐 그닥 좋은 매듭을 짖긴 힘들다. 특히나 이처럼 강렬한 직선의 영화라면 더욱. 그리고 군부정권에 혹사당한 피해자의 증언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은 누군가에게 굉장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영화적 감흥의 자아성찰을 둔화시킬 위험이 있다. 22일의 '팩트'에 집중했다면 더욱 근사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남영동 1985> 의 독특한 특성은 지적을 함에 있어 기묘한 부담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영화적 완성도와 기술적 측면에 비중을 두고 생각을 펼치다 보면 왠지모를 죄책감이 달라 붙는다. 옳은 시선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담감이다. 


고문 포르노가 판을 치는 영화판에서 '고문'의 이미지가 긍정적인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쉽지않은 경험을 선사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이런 영화가 없었단 사실이 의아하기도 하다. 간격의 길이만 다를 뿐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될 역사이기에, 과거사에 둔감한 젊은이들과 우리 뒷세대에게 의미있는 인권 교육의 장이 될 것 같다.



[ 505호실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캐릭터가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박원상. <남영동 1985>를 박원상의 영화라 해도 서운해할 사람은 없을것같다. 그리고 이경영. 이토록 좋은 배우가 왜 원조교제를 해서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필모그라피에 허무하게 구멍을 냈는지...]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