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장르를 좋아한다. 극영화에 비해 표현의 상한선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에 여러모로 한정적인 제약이 따라붙긴 해도 현실과 일상의 결을 따라 걷다 마주하게 되는 감동과 자성의 울림 속에는 감히 극화된 이야기들은 따라잡기 힘든 넓고 진한 감정적 파장이 숨겨져 있기에, 굳이 커다란 환상이 없더라도 내 스스로를 꿈꾸고 울게 만드는 것 같다.
길을 걷거나 밥을 먹다가, 가끔씩 근례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유독 선명히 그려지는 상들은 누군가 진솔히 속삭여준 어느 이웃의 삶이었던 것 같디. 몇 년을 손꼽아 기다리다 개봉과 동시에 달려가 기대치 이상의 영화적 쾌감을 선사받았던 봉준호 감독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어느 신작보다도, 겨울의 낯선 하루. 생각 없이 극장 앞을 지나다 몇 안 되는 관객들과 함께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시간과 기억의 고민을 담고 있는 쿠바 발 엽서 한 장에 모든 기억과 그리움을 집중시키는 것을 보니, 확실히 다큐멘터리 장르에 마음이 쉬이 걸리는 것 같다.
지난 한 세기 낯선 땅에서 서로의 인생을 비춰가며 쿠바를 살아 낸 한인들의 인생과 사랑의 짤막한 기록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의 춤이란 제목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 주는 증거가 되지만, 송일곤 감독은 시간의 표면위에 포근한 나레이션을 흩뿌려 놓으며 기억의 대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어 준다. 모든 여행을 책임져준 이하나씨의 친절한 나레이션도 좋았지만, 불쑥 끼어들어 또 다른 차원의 기억 속으로 관객을 잡아끌며 다시금 시간의 춤이란 제목을 아련히 완성시켜 주는 장현성씨의 편지 낭독이야말로 가장 선명한 그리움 중 하나이다.
헤로니모 임이 보내는 첫 번째 러브레터. 상기나 향수 따위의 도구적 경험여부 정도는 큰 무리 없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순간의 기적이다. 쿠바의 리듬처럼 뜨겁고 애잔한 작품 전반의 흐름 속에서도 유독 아련히 봉곳 솟아난 기억이다.
그나저나 <시간의 춤> 이라는 제목, 생각할수록 좋다. 송일곤 감독의 새로운 초대, <시간의 숲> 속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나섰던 것 역시 순전히 제목이 풍기는 기억에 대한 믿음때문이었다. 쿠바 여행을 통해 이러말을 남겼다 '시간이 죽지 않는 삶은 멋진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사랑한다면 시간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야쿠시마의 깊은 숲 속에선 '시간은 기억을 지우고, 기억은 시간을 만들어 낸다.' 고 했다. 앞으로 송감독의 시선은 어느 무대를 향하게 될까. 기회만 된다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그랬던 것처럼 박용우와 타카기 리나의 치유적 여정이 몇 번만 더 반복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아예 일상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우리 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되짚어 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