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인식했던 것은 어느 감독과의 대담자리였다. 그의 이름은 ‘장률’. 대륙과 반도의 어느 중간지점 쯤 위치하고 있는 감독의 작품 속에는 중국변방 지역에서 삼륜차를 끌며 김치를 파는 조선족의 모습과 두만강을 경계로 우정을 나누게 된 조선족 소년과 함경도 북한 소년의 관계를 통해, 움직여야만 했던 혹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불안과 한계의 경계 속에서 삶을 위해 삶을 이어가는 대다수의 수동적 디아스포라의 모습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사실 영화를 본 이후에도 이 작품들을 통한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었다. 영화의 감상이 끝난 후 가지게 된 감독과의 대담자리에서 그가 뱉어낸 이야기를 접한 순간 단순히 서울을 기점으로 안과 밖의 경계인식을 해오던 내 머릿속 지도의 개념이 한층 확대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중국말로 생각을 한 후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 영화들은 정작 중국 땅에서는 단 한 차례도 소개 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막연히 기묘한 경험으로서 접하게 된 이러한 이야기들이 문화인류학 수업을 통해 민족과 상상의 공동체의 이해를 거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과 인식들에 당도하는 순간 디아스포라에 대한 심상이 보다 강렬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많은 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져가는 요즘, <Touch of spice> 속에 담긴 경계와 소비의 함의파악을 통하여 2011년의 대한민국, 영원한 정착과 일관성이란 곧 무의미한 환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이곳에서 오늘을 살아가야만 하는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그간의 수업을 통해 듣고 느낀 바를 토대로 다시금 떠올려 보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이권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파악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다퉈온 과정 속에서 역사서의 문장들이 채워져 왔으리라 믿고 있다. 특히 디아스포라 같이 독특한 개념의 집단들은 갈등의 시계추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서 파생된다고 본다. 만약 키프로스내의 그리스-터키 간 분쟁이 없었다면 파니스는 이스탄불의 어느 향료가게에서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사이메와의 추억을 통해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작은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자신은 존재조차 모르는 어느 경계지대의 이권다툼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인생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로 문화와 정치의 이동과 마찰 속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근대국가의 개념이 명확해진 이후, 특히 집단 간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본격화 되면서 점화되기 시작하여 글로벌화의 추세 속에서 보다 빠른 속도로 다양화되며 하나의 단어로서는 규정짓기 힘든 복잡성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큰 맥락에서 나누어 파악해 본다면 각자의 원점에 위치하고 있는 뿌리를 향해 정신적으로 품고 있는 향수와 애착의 정도가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니스의 기억과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본 영화의 구성은 독특하게도 유년기와 중년기를 통해 각각의 특성들을 보여줌으로써 한 개인의 순간순간들을 넓게 펼쳐내어 1-2세대의 태도와 존재성의 차이를 한 몸속에 담고 있다. 그 결과 억압의 객체로서의 다수적 측면과 선택의 주체로서의 소수적 측면을 파니스의 인생여정을 통해 보여주며 디아스포라가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주연장신청 기각과 추방명령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본격화 된다. 파니스의 가족은 그리스의 혈통을 지니고 있음에도 터키에서 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경계인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터키에선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에선 터키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일상은 여러 방면을 통해 강요를 받기 시작한다. 파니스의 성장과정 속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강요이다. 학교와 경찰서에서 파니스의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듣는 이야기는 그리스 언어와 역사에 대한 강조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런 조언을 구하기 전에 파니스 부모에게 던진 ‘터키를 떠나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죠?‘라는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어린 학생에 대한 교육적 차원의 훈계가 아니라 민족과 민족 간의 갈등 속에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상대를 구별 짓고 혈족적인 굴레 속에서 타자를 배격하는 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위 문단에서 언급한 차별을 전제로 한 폭력적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요리와 파니스의 관계역시 생각해 볼만하다. 직접적인 정치 사회적 묘사 없이 일상의 영향력을 통해 구성원으로서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룬 작품인 만큼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매개삼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 많은것 같았다. 유년시절 파니스가 음식을 만드는 행위는 부모와의 사소한 마찰로서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고 있다. 물론 향료로서 세상을 묘사하는 영화이기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요소이지만 나는 그 과정속에서 파니스를 향한 부모와 세상의 시선과 태도를 바라보며 디아스포라와 같은 숙명적 소수자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틀에서 벗어낫다‘ 판단되는 것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자신만의 삐뚤어진 자를 들이대어 기준을 설정하고 올바르기를 강요하는 태도, 바로 그와 같이 다름에 대한 인정없이 강요와 평준화를 요구하는 폭력적인 시선. 파니스와 부모 사이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바라보며 굵직한 상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 생의 최악의 5초를 회상하며 서글피 눈물 흘리던 파니스의 아버지가 대변하는 이민족의 서러움만큼이나 디아스포라에 대한 한 운명을 잘 표현해주는 듯 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본 작품의 중심에는 항상 맛에 대한 기억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동하며 그때마다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서 바꿀 수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있다' 라는 가정일 뿐 무조건 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는 현재의 시스템과 문화를 구축시켜 왔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에피타이저 - 메인디시 - 디저트의 소제목으로서 <Touch of spice> 속 파니스의 기억들은 명확하게 나누어진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을 이전과 이어주며 사회적 차별의 시선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스탄불의 그것과 맥을 함게하게 해주는 것은 계피를 비롯한 여러 향신료 및 맛에 관한 소비적 태도이다.


이익추구를 우선시하는 경제적 논리 하에서 지역, 민족 간의 경계의 벽을 가장 쉽게 드나들 수 있기에 상업적 측면은 점점 보편화되며 세계화에 있어 담장 무너뜨리기의 대표적인 측면으로 부각되고 있다. 자신을 구성하는 소비패턴을 통해 정체성과 차별점을 둔다는 것. 그리고 이익집단의 정책에 따라 전 세계의 인류들이 비슷한 방식과 유사한 과정으로 이를 경험한다는 것. 얼핏 보면 한 가지 맥락으로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소비의 단면적 특징의 일부일 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또 다른 경우의 수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디아스포라 같이 자신의 뿌리 밖으로 소수인원들이 튕겨져 나갔을 경우 이와 같은 소비의 특성은 앞서 언급한 보편화의 대척점에서 자신들만의 특수한 문화를 유지해나가는 방어적 장치로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 전반에 이와 같은 특징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가장 확실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은 파니스의 삼촌과 그리스 약혼녀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피상적으로 대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그들은 조리법을 논하면서도 각자의 차이를 분명히 들어내고 있다. “우린 음식에 뭘 숨기지 않아 ! ” “시집 오려면 숨기는 법도 배우세요.” 그렇게 파니스 가족의 소비방식은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디아스포라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 비자발적이고 억압된 숙명적 상황.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계위치를 이용해 다양성으로서 인생을 살아내는 상황. 그리고 시대의 상황에 따라 모두를 묶기도, 각자를 묶기도 하는 소비패턴의 상반된 모습들. 본 영화 속에서는 위에 언급된 바들이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서 디아스포라와 사회의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 의거해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입장에서는 역시나 파니스의 중년기에 더 많은 시선이 가게 되었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걷는 그의 주변부의 상황과 모습들을 보며 현재적 의미로서의 디아스포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몇몇 가지 눈에 띄는 사항들이 필름 너머의 현실 속 상상력을 자극해 주었다. 고향땅으로 돌아와 그들과 그리스어도 터키어도 아닌 영어로서 소통하는 파니스의 모습. 터키의 대학에서 별다른 제한 없이 교수직을 맡게 되는 모습. 수업시간을 통해 들은 선택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지닌 디아스포라의 모습들. 그들의 특성들이 분명하게 들어난 장면들이었지만 나는 영화 속에는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은 쓸쓸함이 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제 아무리 자신의 능력과 기회를 통해 억압적 상황을 탈피해 주체적으로 선택권을 지니게 된 이들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폭력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뿌리에서 뽑혀진 이들의 의식과 정서 속에 남겨진 불안함과 공허함이 파니스의 표정 속에서 얼핏얼핏 느껴졌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점점 다양한 형태로서 확장될 것이다. 일년 후 내가 살고 있을 장소가 꼭 대한민국일 것 이라 장담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낳은 자식들이 결혼상대로 외국인을 데리고 올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화된 사회 속에서 언제든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직장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지금 그러한 곳에 살고 있다. 장과 단을 따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올바른 파악과 이해라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현재가 완성되기 까지 지나온 발자취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의 실수담과 무용담들. 짧은 강의와 한편의 영화였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스스로 고민하고 정리해본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정체된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 앞으로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다름에 대한 편견적 우를 범하지 않도록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 같다. 파니스는 샤메이와 이스탄불의 거리를 거닐며 짧게 중얼거린다. ‘다들 달콤한 걸 들고 다녀...’ 많은 것들은 변하고 우리의 생각 또한 많은 그것들과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 26살


Posted by Alan-Sh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