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OGRAPHY

2013. 8. 12. 03:17 from Cinema/Mine














얼마전 영화게시판에 근 한달 내 본 영화들에 관한 간단한 리뷰를 끄적인 적이 있다. 고작 한달이라는 짧은 시간을 기억해내는 자리에서 무려 3,4 편의 영화들의 경우는 감상에 대한 기억 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려니 여기며 며칠을 보낸 후 왓챠라는 어플을 받아 수천 수만의 리스트 중에서 내가 감상한 작품들을 하나 둘 고르다보니 그 존재 자체를 잊은 상태로 살아가는, 너무도 좋은 영화들이 많다는 사실에 약간의 경각심을 느끼게 됐다. 몇년전 폐쇄했던 블로그에서도 모든 감상의 기록을 남겨보려는 시도는 했었다. 타고난 게으름 탓에 실패했으나 이번에 다시한번 도전하려 한다. 보고 들은 것들은 무조건 기록해야겠다. 작품의 원 컨텐츠에 접근하기 보단 주변부의 정보나 새로운 발견에 큰 재미를 느끼는 탓에 스치듯 훑어가는 정보들의 양을 전부 기억하기가 힘들다. 여기 저기에 끄적였던 기록들을 겨우 겨우 검색해야만 과거의 감상을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곳엔 영화를 바로 옆 글에는 앨범을, 귀찮더라도 적자. 적어.    


포스터를 누르면 IMDB 페이지로 링크가 되는, 뭐 그런 뻔하디 뻔한 구조로 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대부분은 IMDB일테고 북미 시장에 이름을 알리지 못한 몇몇 제 3국의 영화일 경우 경우 트레일러로 연결된다. 한국영화는 특별한 링크가 필요없을것 같다.  













 








    



Jazz on a summer's day 는 1958년에 열린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전경을 담아놓은 다큐필름이다. 바로 직전에 쓰인 '전경'과 '다큐 필름'의 순수한 의미에 이보다 근접한 작품이 또 존재하려나. 지역의 풍경과 그 곳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가 전해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작자나 전수자의 첨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의미로서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본 작품의 가치로도 연결되는데, '재즈'라는 주제적 흐름 마저 눌러버리며 시대상의 생생한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해받는 미덕이 있다. 카메라의 포커스 역시 무대와 관중을 양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와같은 선택을 했다는건 놀라운 기분을 전해준다. 58년의 미국사회. 그러니깐 <백 투더 퓨처>에서 마티 맥플라이가 뛰어든 시대로 부터 고작 3년이 흐른 시점이다. 난 당시의 이미지들에 큰 동경을 느끼는 편이다. 물론 60년대 이전 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기록물에서 읽을 수 있는 모호한 단정함에 묘한 흥분을 느낀다. 50여년 이상의 세월에 큰 흥미를 느낀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락영화인 <백 투더 퓨처>에 가장 근접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쳐다보고 있으니 재즈고 나발이고, 그들의 패션과 표정 하나 하나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50년대를 기록하는 필름의 색상 역시 환상적이니, 더이상 무슨 형언이 필요하겠나. 



영화는 낮을 이야기하는 소소한 전반부와 밤을 수놓는 후반부의 별들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 암스트통 역시 어둠이 깔린 페스티벌의 절정기에 위치해 있다. 난 그럼에도 전반부에 펼쳐지는 카메라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 밤이 찾아오고 재즈계의 큰 스타들이 스며드니 카메라는 (기술적, 대중도의 차이로인해) 자연스레 무대에 고정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난 이 작품의 참맛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색에 관한 관찰이라고 생각하기에 찬란한 햇살 아래 개성있는 조연을 자처한 객석의 생동감이 참으로 좋다. 코나의 노래를 인용하자면, 객석의 낮은 무대의 밤보다 아름답다. 라고나 할까. 영화가 끝나면 페스티벌을 떠나보내는 어느 일군을 포착하며 하나하나 스탭롤을 올려 보인다. 작품에 대한 편견이 부른 착각일까. 카메라 감독, 음향, 조명, 음악 ... 각종 스택들의 이름은 보았지만 감독의 이름을 읽지 못한것 같다. 뭐 착각이라도 좋다. 이렇게 객관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다큐를 감상한 후 그런 착각을 했다는건 꽤 괜찮은 일이니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굉장한 혼란을 느낄때가 있다. 현실과 진실에 포커스를 맞춘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시각을 지나고 난 후 무시무시할 정도로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정작 그 작품을 통해 해당 이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입장에선 훅 맥이 풀려 버린다. 송일곤이 만든 시간의 다큐와 <Jazz on a summer's day>가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건 이런 이유에서 일거다.


백 투더 퓨처 1편에서 마티 맥플라이는 자신의 부모님을 이어준 후 무대에 올라 척 배리의 노래를 부른다. 저메키스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역사에 관한 농은 여기서도 이어진다. 마티의 무대를 수화기 넘어 척 배리의 사촌이 들려주는 씬. 백 투더 퓨처의 시점으로 부터 3년이 흐른 본 작품의 무대 위에서 척 배리는 마티 맥플라이 처럼 한발을 들고 깡충거리며 기타를 연주한다. 그냥 혼자서 낄낄 거린 순간이기에 기록하고 싶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순진무구 성장담, <보이>는 작품의 가치에 비해 부차적인 주변요소로 인해 후한 평가를 받는 듯하다. 특별한 차별점이나 성취가 느껴지지 않는 이 영화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냈을지, 두고 두고 고민할 부분이다. 한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통상적으로 인지해온 뉴질랜드에 대한 인상과 너무도 판이한 세팅 정도랄까. 어쩌면 그런 부분에서 사람들은 흥미를 느낀 것일까. 국적을 지우고 본다면 동어 반복의 성장담에 불과한것 같다. 배우들을 보는 맛은 확실히 존재한다. 물론 훈훈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지는 착한 영화다. 다들 이렇게 하나하나 이유를 찾다 좋아지는 것일까. 물론 나쁘진 않다. 



<스테이션 에이전트>는 요 몇년간 왕좌의 게임을 통해 주가를 올려온 피터 딘클리지의 가장 훌륭한 영화 필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데스 앳 퓨너럴>이란 코미디 영화를 봤다. 07년작인 영국 영화와 2010년의 리메이크 작 모두에 피터는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존재 이유라곤 이미 시체가 들어찬 관 속에 들어갈 아주 작은 사람의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서사적 의외성과 단발성 웃음을 위한 장치 정도랄까. 그 속에는 어느 배우가 들어가도 무관했을 것이다. 키만 아주 작다면. 하지만 <스테이션 에이전트>는 여타의 작품에서 그를 활용해온 방식과는 판연히 차이가 있다. 그는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며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세상에 드러난 상처를 몸소 끌고 다니며 주변부의 인생과 슬픔을 당기는 인물이다. 감독의 제작과정과 해당 배우의 인생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진 못했지만, 그 둘의 의기투합 위에는 핀으로 분한 그의 인생이 담겨있으리라 믿는다. 작은 사람. 누구나 단박에 눈치채는 외부적 생채기. <스테이션 에이전트>의 톤과 흐름은 배우 본인과 감상자 모두를 감싸안으며 따듯하고도 유머러스하게 위로한다. 정말이지 웃기고, 슬프며, 감동적이기 까지한 작품이다. 더 신기한건 그런 정서의 표면을 흐르는 이야기는 참으로도 뻔하다는 것이다. 미묘하다. 미워할 수도 없다. 이 영화가 참 좋다. 별을 5개 붙일때는 그냥 그 영화가 참 좋은거다.    



    






Posted by Alan-Shore :